66화 #14 – 인정받는다는 것 (5)
백영훈이 탕비실을 빠져나가자, 홀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귓가에 맴도는 백영훈의 목소리.
내가 아니라 백영훈이 캐스팅된 건가?
설마….
물론 백영훈도 연기를 잘하기는 했다.
그 누가 됐더라도, 연기를 못하고 잘하고를 떠나.
배역의 색과 맞는 사람이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내가 아닌 백영훈이 됐다는 사실은 나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덜컥.
그때, 굳게 닫혀 있던 탕비실 문이 열리며 김 실장이 들어왔다.
“희성아.”
그의 손에는 휴대 전화가 들려 있었고.
김 실장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두운 쪽에 가까웠다.
내 이름을 부르면서도 말하기 힘들다는 듯 턱을 움찔거렸고.
시선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이미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예상이 됐다.
내게 다가오는 김 실장을 바라보며,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커피를 건넸다.
“형, 여기 커피.”
“고마워.”
그는 내가 건넨 커피를 받으며 말했다.
“앉아서 이야기 좀 할까?”
“그래.”
김 실장과 탕비실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따뜻한 커피에 손을 녹였고.
내가 아닌 테이블을 살피며 말할 타이밍을 찾는 듯 보였다.
“형, 나 오디션에서 떨어진 거지?”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곧장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캐릭터가 우리랑은 좀 안 맞았나 봐.”
김 실장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조금 전에 탕비실 오면서 전화 받았어. 우리는 다른 작품을 찾아보자.”
사실 오디션에서 떨어진 것이 처음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오디션을 보았고, 그만큼 떨어지기도 해봤지.
모든 오디션에서 합격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탈락이라는 건, 수없이 겪는다고 하더라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애써 괜찮다는 듯 미소를 보냈지만.
김 실장은 내 표정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안타까운 소식이 남았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 역할에 백영훈이 들어갔대.”
역시나.
백영훈의 얄밉던 사과의 말투.
자신이 역할에 들어갔기에 내뱉은 말이었겠지.
내가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김 실장이 내게 물었다.
“뭐야, 알고 있었어?”
“아까 탕비실에 영훈이 있었거든.”
“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기는 하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제기랄….
하필 같은 회사 식구가 그 자리를 꿰차다니.
그렇다고 내내 좌절해 있을 수만은 없다.
이미 결과는 발표됐고.
아쉬워한다고 해서 그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자.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멘탈을 잡아야만 한다.
좌절과 슬픔의 늪에 빠지게 되면 끝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서둘러 다른 작품을 찾아야만 한다.
“희성아, 오늘 술 한잔할까?”
나는 깨물던 입술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
“자, 한잔하자.”
“그래.”
김 실장과 함께 집 근처의 작은 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챙.
넘실거리는 술잔을 부딪쳤고.
우리는 동시에 술을 넘겼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차디찬 알코올.
속상하던 마음이 가볍게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탁.
김 실장이 빈 소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일 많잖아. 얼른 털고 일어나자, 희성아.”
“그럼. 뭐, 오디션 떨어진 게 처음도 아니고.”
그는 내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대형 기획사일수록 회사 식구들이랑 경쟁하는 일이 많아.”
“하긴, 워낙 배우들이 많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네.”
그에게 소주를 건네받아 김 실장의 잔에 따라 부었다.
“그렇지.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골라서 데리고 온 거니까.”
우리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앞으로 이런 경우가 없을 거라고는 말 못 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처럼 또 오디션이 겹치는 경우가 있겠지.
“그거에 너무 불편해하지는 마.”
“응, 불편하지 않게 내가 배역을 따내야지.”
그제야 김 실장이 미소를 보였다.
“그래, 희성이 네가 배역을 따내면 되지.”
김 실장은 안주를 하나 집어 먹으며 말을 이어갔다.
“뭐 보니까, 영훈이도 마냥 나쁜 애는 아닌 것 같더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김 실장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다른 질문을 던졌다.
“희성아, 내일 하루는 쉬었다가 모레부터 회사 나올래?”
나를 배려하는 거겠지만.
그 말이 달갑게 들리지는 않았다.
많은 대본을 보며 골랐던 작품.
그 대본으로 오디션을 보았고,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 하나의 난관을 가지고 쉬어갈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나아가야 할 길이 너무나 많고 길기 때문이지.
고작 구렁 하나에 빠졌다고 하루를 허비하는 것은 나와 맞지 않았다.
“아니, 내일 일찍 사무실로 갈 거야.”
“하루 정도는 괜찮아.”
타이르듯 말하는 김 실장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빨리 연기하고 싶어, 형.”
내 단호한 말에 김 실장의 말문이 막혔다.
이내 그는 눈빛을 반짝였다.
내 진심이 담긴 표정을 읽었는지, 홀로 술을 들이켜며 답했다.
“대본 괜찮은 거 더 뽑아놨어. 내일 같이 보자.”
김 실장은 이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응.”
***
김 실장이 가져온 몇 개의 대본.
그것들을 모두 다 읽었음에도 마음을 끄는 대본은 없었다.
물론 대본의 내용은 훌륭했다.
부족한 점이 있는 대본도 있지만, 그가 추천한 대본의 대부분은 평타 이상이었지.
그렇지만 마음을 확 이끄는 대본을 찾지 못했다는 것.
“흐음….”
대본을 넘기며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벌써 마지막 대본인가?”
대본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테이블에 올려진 대본들을 바라보았다.
“응, 이게 마지막이네.”
눈썹을 들썩이며 말하자, 그가 쓰읍 소리를 내며 답했다.
“그것도 마음에 안 드는구나?”
내 표정만으로도 그는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보였다.
아직 몇 장이 더 남았지만.
사실상 뒷부분은 읽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미 이 대본은 내 마음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대본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그에게 물었다.
“형, 뭔가 좀 확 끌리는… 다른 대본은 더 없을까?”
그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눈동자를 굴렸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깊은 생각을 한다는 건, 대본이 더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근데 요즘 대본이 넘쳐나서… 나도 아직 덜 읽어봤거든.”
“넘쳐난다니, 왜?”
김 실장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KTS에서 드라마 공모전을 했거든.”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 들었어. 엄청 규모가 컸다고 하던데?”
“맞아. 그래서 들어온 대본만 해도 어마어마해.”
그의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대본이 엄청나게 쌓였다는 거구나.”
“응.”
“게다가 KTS면 믿고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니야?”
내 물음에 김 실장은 코를 찡긋거렸다.
“대상이랑 최우수상이야 그렇지. 그건 애초에 회사에서 푸시해 주니까, 배우들도 급 높은 애들로 쫙쫙 뽑힐걸?”
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내려뜨렸다.
“아, 그러겠네….”
자체적 공모전에서 뽑은 작품.
그 작품을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애초에 배우들 캐스팅 역시 화려할 것이다.
즉, 내 자리는 없을 거라는 말이지.
아무리 작품의 완성도가 화려하다고 해도, 출연 배우들 또한 중요할 테니까.
“문제는 나머지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뒤에 우수상까지는 그래도 괜찮아.”
김 실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고.
나는 그의 말에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 이하인 장려상부터는 좀 애매해.”
“왜?”
김 실장이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장려상부터는 딱 그거지. 지들이 만들기에는 뭔가 아쉽고, 그렇다고 남 주기는 아까운 작품.”
“딱, 계륵이네.”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욕심에 쥐고 있으려는지, 입선상이라는 명목으로 100만 원씩 주고 판권을 다 가지고 있대.”
공모전에 왔던 작품이니 만큼.
KTS 입장에서는 푼돈이라 할 수도 있는 100만 원을 건네고, ‘입선’이라는 명목의 상을 준 것.
그럼 다른 방송사에 빼앗기지도 않고.
혹시나 급히 작품 대본이 필요할 때, 자신들이 가져다 쓸 수가 있을 테니까.
“그런 작품이 많아?”
그는 다이어리를 뒤적였다.
“보자… 어, 장려랑 입선이랑 합쳐서 서른 작품 정도 되네.”
“이야, 엄청 많네.”
말이 서른 개의 작품이지.
그걸 하나씩의 미니시리즈라고 생각한다면 어마어마한 개수였다.
“어쨌든 소재가 괜찮으니까, 100만 원씩이라도 주고 묶어둔 거 아니야?”
“그렇긴 해. 근데 그 작품들이 모두 드라마로 제작되기는 힘들 거야.”
김 실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드라마라는 게,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하는 거잖아.”
“맞지.”
“그래서 드라마에서는 기대치. 그러니까 예상 수익이라는 게 있잖아. 그걸 못 미치겠다고 판단하면, 애초에 제작이 들어가지 않는 거지.”
냉정하지만 맞는 말이다.
작품을 오랫동안 만든 방송사에서는 한눈에 보일 것이다.
이 대본이 작품으로 만들어졌을 때 돈이 될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것인가가.
애초에 애매한 대본이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지.
당연한 것이다.
미리 드라마의 예상 수익이 정해져 있을 터.
그걸 뽑지 못할 것이 뻔한데, 그 누가 시작을 하겠는가.
“제작 안 하면, 결국은 우리한테 캐스팅이 들어오지는 않잖아.”
김 실장은 내 말에 눈썹을 들썩였다.
“그럴 줄 알았는데….”
그의 말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다른 수가 생긴 건가?
김 실장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다이어리 글자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번에 시티즌이랑 KTS가 협약을 맺었대.”
시티즌.
OTT 플랫폼인 시티즌은 최근 우리 HS 엔터에서 투자를 한 곳이다.
“그래서 뭐 엄청 만든다고, 쫙 뿌려놨대.”
솔깃했다.
공영 방송인 KTS는 드라마의 방영 개수가 정해져 있다.
하지만 OTT 플랫폼인 시티즌은 공영 방송과는 다른 체계.
많은 작품을 수용하고 배출할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지.
“그럼 거기로 장려상이랑 입선상 받은 작품이 갈 수 있겠네?”
내 말에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근데 뭐, 80%는 실질적으로 커리어 되기도 힘든 웹 드라마일 거야.”
그는 아랫입술을 내밀며 말을 이어갔다.
“판권 계약 기간이 5년이거든. 근데 심지어 곧 만료되기 직전인 대본들까지 다 넘겨줬어.”
나는 입을 떡 벌리며 답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거였네. 그럼 그 30개 작품이 전부 시티즌으로 가는 건가?”
김 실장은 허공에 손을 가로저으며 답했다.
“여기서 어떤 건 들어가고, 어떤 건 안 들어간다는데. 어쨌든 우리가 시티즌 투자처니까 먼저 대본을 받은 것 같더라.”
내가 그의 말에 눈썹을 들썩이자, 김 실장이 다이어리를 덮으며 말했다.
“근데 우리가 신경 쓸 건 없어.”
“왜?”
“왜라니, 이미 애매한 작품들이니까 우리랑은 상관없지.”
나는 김 실장과 조금 생각이 달랐다.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형, 여기에도 좋은 대본이 있지 않을까?”
내 말에 김 실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설마 대본을 다 보려고?”
그는 내가 하지 못할 말이라도 내뱉었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진흙 속의 진주일 수도 있잖아. 내가 그 진주를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김 실장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야, 근데 대본이 진짜 많아.”
“한번 보면 안 돼?”
농담이 하나도 없는 진지한 내 물음에 그는 얼굴에 남은 작은 미소도 지워냈다.
“…진짜로?”
“응, 보고 싶어.”
김 실장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고.
나는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내 눈빛에 김 실장은 졌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어휴, 알겠어. 기다려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