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65)화 (65/303)

65화 #14 – 인정받는다는 것 (4)

“하아, 피곤하다.”

연습실 테이블 위로 올라온 대본이 벌써 8개.

처음 읽는 대본은 초반 어느 정도만 읽어도 감이 잡히지만.

조금 괜찮다 싶은 대본은 중반부, 혹은 마지막까지 읽어야 감이 온다.

초반에 솔깃했다가 중반부 이후로 대본 내용이 산으로 흘러간다거나, 캐릭터의 성격이 변하는 작품도 꽤 많은 편이다.

그러니 심도 있게 읽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흐르고는 한다.

오전에 출근 후, 대본을 본 지도 어언 4시간가량이 흘렀고.

계속 앉아만 있어 굳어진 몸을 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켜 짧은 스트레칭을 마친 후 곧장 자리에 앉았다.

오른편에 쌓여 있는 대본들.

이건 이미 한 번씩은 읽은 대본들이다.

즉, 탈락한 대본들이라는 것이지.

그리고 왼편에 여기저기 널브러진 대본 여러 개.

이것은 이제 읽어야 할 것들이다.

순서대로 쌓아두지 않고 여기저기 겹치지 않게 펼쳐둔 이유.

한눈에 살펴보며 끌리는 대본을 집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어떤 걸 읽어볼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대본 위 허공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탁.

손은 자연스레 하나의 대본 앞에 멈췄다.

왠지 끌리는데?

그 대본을 들고 앉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렇게 몇십 분이 흘렀을까.

시선을 떼지 않고 대본의 절반 이상을 읽어 넘어갔다.

점차 집중할수록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온 신경을 집중해 읽고 있기에 나오는 표정.

똑똑.

어느새 김 실장은 연습실 문을 두드렸고.

그는 집중한 내 모습에 조심스레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걸지 않은 채.

오른편에 쌓인 대본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형.”

나는 들고 있던 대본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김 실장을 불러 세웠다.

“응.”

그는 대본을 바라보며 답했고.

그의 얼굴 앞으로 들고 있는 대본을 들이밀었다.

“이 대본 오디션 좀 알아봐줘.”

내 말이 끝나자마자 김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자리에 앉았다.

“뭐야, 괜찮은 거 찾았어?”

며칠이나 대본 찾기에 매진했기에.

오디션을 보고 싶다는 말에 흥분한 듯 보였다.

“어, 이거 괜찮은 거 같은데, 어때?”

김 실장이 내 손에 있던 대본을 빼앗듯 잡아챘다.

“잠깐만.”

그러고는 몇 분간 입을 열지 않고 심각한 얼굴로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맨 앞 대본 서너 장을 살펴본 후.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희성아, 뒤에는 내가 차분히 읽어볼게. 그리고 아직까지는 대본 괜찮은데?”

“그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잠시만, 나 다이어리 좀 들고 올게.”

빠르게 연습실 앞 자신의 자리에 다녀온 그는 다이어리와 종이 몇 장을 뒤적이며 말했다.

“MBS 드라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배역은 주연급 조연 정도야.”

“응, 그 캐릭터가 괜찮은 것 같아.”

이미 대본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점이다.

작품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 주연 역할은 오디션보다 지정 캐스팅이 많은 편이다.

더불어 이 작품에서 내가 하고 싶은 배역은 주연이 아닌, 주연급 조연이었지.

오히려 딱 맞아떨어졌다.

이에 김 실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 역할이 희성이 너랑 잘 어울리겠더라.”

“오디션 볼 수 있는 거지?”

김 실장은 손으로 종이의 글씨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응, 그 역할, 캐스팅 없이 전체 오디션으로만 할 거래.”

“다행이다.”

“대신 MBS 드라마니까, 경쟁률은 엄청 심할 거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상파 3사 중 하나인 MBS.

조건 없이 전체 오디션을 진행하다 보니, 많은 이들이 오디션에 쏠릴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높은 경쟁률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직 시작도 안 해봤으니까.

충분히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고.

김 실장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해볼래.”

확신에 찬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김 실장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응, 대형 기획사 배우들도 올 테지만, 희성이 네 연기력이면 충분히 도전해볼 만해. 해보자.”

김 실장은 다시 대본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어갔다.

“이 작품, 감독 네임드도 좋네.”

“작가도 괜찮지 않아?”

“작가는… 평작이 좀 많기는 한데, 그래도 간간이 흥행한 드라마도 있는 편이야. 이 정도 작감 라인이면 좋다고 봐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스토리가 마음에 들어.”

“그럼 됐네. 도전해보자.”

김 실장이 눈썹을 들썩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오디션 일정이… 아?”

순간 다이어리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말을 멈췄고.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이거, 백영훈도 오디션 보기로 했는데?”

“…어?”

***

역시나, 예상대로 오디션 장소는 시장통처럼 북적였다.

수많은 사람들.

눈에 익은 배우들도 꽤 보였고.

다른 대형 기획사의 배우들도 오디션에 참석했다.

충분한 연습을 하고 왔지만.

쟁쟁한 후보들을 직접 눈으로 보니,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이 많은 경쟁자들 중 몇 위 안에 드는 것은 소용이 없다.

그저 1등, 첫 번째로 뽑히는 사람만이 배역을 따낼 수 있다.

이들을 모두 제쳐야만 내가 드라마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지.

긴장해서 떨고 있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배우들 역시 쉴 새 없이 대사를 입 밖으로 내뱉으며 떨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청심환을 먹고 있는 사람도 종종 보였다.

그들을 바라볼 틈이 없었다.

그저 오디션 연기 연습에 매진할 뿐.

더불어 긴장을 풀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오디션에서 긴장하게 되면 연습한 만큼의 연기를 보여주지 못한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입으로 천천히 그 숨을 내뱉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습한 만큼만 보여주자.

그때.

저 멀리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

낯익은 얼굴에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영훈이다.

김 실장에게 미리 들어서 알고 있던 사실이다.

같은 회사 후배이자, 떠오르는 신예로 불리는 배우.

HS 엔터로 입사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고.

현재 첫 작품을 끝낸 후 차기작을 고르는 중이었다.

백영훈과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가 회사에 들어왔다고 매니저와 인사를 하러 왔을 때, 그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나보다 나이가 어린 그는 허리를 깊게 접으며 인사했다.

주변에서 들은 말로는, 그와 내가 비슷한 결을 가졌다고 했다.

은근히 만들어진 라이벌 구도.

그런 말들에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조금이나마 그의 행보를 살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

그 역시 매니저를 통해 나에 대한 소식을 몇 번 물었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경계심이 조금 있지만, 백영훈은 예상과는 달리 밝은 얼굴로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처음에 회사에서 인사드린 후로 뵐 일이 없었네요.”

백영훈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잘 지내셨죠?”

“그럼요. 영훈 씨도 얼마 전에 촬영 끝났다고 들었는데, 안 쉬고 바로 시작하시네요?”

“예, 쉬면 오히려 힘들 것 같더라고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몸이 내게 다가왔다.

“저… 형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경계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너무나 친근하게 나를 대했다.

동네 친한 동생처럼.

굳이 그와 선후배 사이로 딱딱하게 남아 있고 싶지는 않았다.

같은 회사 식구였고, 서로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달려 나가고 있으니까.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그는 두 손을 모으며 답했다.

“말씀도 편하게 하세요, 형.”

“하하, 그럴까?”

그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그때.

오디션 차례가 다가왔다.

오디션은 2인 1조로 이루어졌고.

젠장.

하필 나와 한 조로 묶인 사람은 다름 아닌 백영훈이었다.

하지만 같은 조가 아니었더라도 이미 같은 배역 오디션을 볼 것이기에, 애초에 경쟁자이기는 했다.

다만 함께 오디션장에 들어가 서로의 연기를 볼 수 있을 뿐.

“안녕하십니까,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내 인사가 끝나자마자 심사석에 앉은 감독이 입을 열었다.

“바로 연기부터 볼까요?”

“네.”

우리는 곧장 연기를 시작했다.

준비된 연기를 모두 마친 우리.

앞에 나란히 앉은 감독과 캐스팅 디렉터, 그리고 작가.

그들은 흡족한 표정으로 나와 백영훈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서 탈락과 합격 여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백영훈과 내 연기가 마음에 들기는 한 모양이다.

더군다나 내가 본 백영훈의 연기 또한 훌륭했다.

확실히 연기를 잘하기는 했기에.

그가 연기를 보여줄 때, 속으로 감탄을 자아냈다.

물론 나 역시 후회 없는 연기를 펼쳤다.

대기실에서 그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렸고.

준비해온 만큼, 모든 걸 보여주었지.

내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이제 그들의 선택만이 남은 것.

감독이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

“연기 잘 봤습니다. 같은 HS 엔터 소속이시네요?”

“맞습니다.”

백영훈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대형 기획사답게 연기는 두 분 모두 좋았습니다. 만약에 떨어지게 된다면… 그건 색깔의 차이라고 생각하셔야겠네요.”

그의 말인즉, 배역에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을 찾겠다는 것.

이 캐릭터에 더 잘 맞는 색의 배우라….

감독의 말에 옆에 앉은 작가가 답했다.

“맞아요, 감독님. 어려운 선택이겠는데요?”

그녀의 말에 감독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

결과 발표가 하루 남은 날.

합격한다면 너무나도 좋겠지만, 혹여나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오디션을 본 이후로도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당장 내일 결과가 나오지만, 그걸 바라보며 쉬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희성아, 커피 좀 가져다줄까?”

그의 말에 들고 있던 대본을 내려놓았다.

“아니야. 내가 가져다 마실게.”

나는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손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같이 가자. 나도 피곤해서 좀 움직여야겠어.”

그 역시 어깨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습실 문을 열고 탕비실로 향하는 길.

“내일 발표 몇 시 정도에 나오려나?”

내 말에 김 실장이 눈동자를 굴리며 답했다.

“듣기로는 오전에 알려준다고 하더라.”

“하아-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게. 그래도 이번 오디션 결과는 오래 안 걸려서 다행이….”

띠리리.

그때 울리는 벨소리에 김 실장이 급히 휴대 전화를 들었다.

“희성아, 나 전화 좀 받고 들어갈게.”

“알겠어. 형 커피도 내가 뽑아둘게.”

김 실장은 두 손으로 공손히 전화를 받으며 뒤를 돌았고.

나는 탕비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있던 백영훈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반겼다.

“형!”

“어, 영훈이 있었네?”

그는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이내 미소를 지었다.

“네, 커피 한잔하려고요. 형도 한잔 드릴까요?”

“아니야. 내가 마실게.”

백영훈은 활짝 웃으며 커피를 들고 테이블에 다가가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형, 식사는 하셨어요?”

“그럼.”

커피 머신의 버튼을 꾹 누르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 연습하러 온 거야?”

평소 그와는 회사에서 마주친 적이 없었다.

각자의 스케줄이 다르기도 했지만, 백영훈은 연습을 하러 회사에 출근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 물음에 눈동자를 굴리며 답을 머뭇거렸다.

“아, 뭐….”

지이잉.

순간 그의 앞에 올려 있던 휴대 전화에서 세찬 진동이 울려 퍼졌고.

백영훈은 곧장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형, 잠시만요!”

“응.”

“여보세요? 어, 진짜? 아, 알겠어.”

전화를 받은 그의 표정이 급격히 심각해졌고.

중요한 대화인 것을 직감한 나는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커피 머신에 눈을 고정했지만.

들려오는 백영훈의 목소리는 내 귀를 강타했다.

“어, 형. 회의실이면… 나 탕비실이라 금방 갈 수 있어.”

백영훈은 입술을 움찔거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응, 그럴게. 몇 분 안 걸려.”

아마 그의 매니저와 통화하는 듯했다.

그 말을 끝으로 백영훈은 전화를 끊었고.

서둘러 남은 커피를 입에 털어 부었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곧장 내 앞으로 다가왔다.

심각한 그의 얼굴이 걱정되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영훈아, 무슨 일 있어?”

눈썹을 들썩이며 묻자, 그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음….”

말을 흐리는 그의 표정에는 옅은 미소가 보였고.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약간의 우월감?

어딘가 모르게 기분 나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곧 눈썹을 팔자로 축 늘어뜨리며 측은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형… 미안하게 됐네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눈을 연신 깜빡이던 백영훈은 그대로 뒤로 돌아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백영훈, 뭐지?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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