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14 – 인정받는다는 것 (3)
길게는 아니었지만,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 봤자 2박 3일간의 짧은 휴가였지만.
연달아 여러 작품을 마무리했기에, 잠깐의 휴식은 취해도 된다는 김 실장의 말.
하지만 하루빨리 다음 작품을 시작하고 싶어 그저 고향에 갔다 오는 짧은 일정으로 정했다.
부모님은 블루베리 농사를 지으셨고.
그 블루베리의 수확은 여름.
그러니까 지금이 한창 바쁜 수확 철이다.
연기로 인해 번 돈으로 부모님께 조금이나마 선물을 드리려고 온 것도 있지만.
겸사겸사 일손을 돕기 위해 내려온 것이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일을 많이 도와드린 적이 없었다.
그리 효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욕 얻어먹는 불효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항상 부모님은 내 손에 힘든 일을 안 시키고 싶어 하셨고.
자신들이 일하기에도 충분하니, 네 할 일만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그런 부모님 밑에서 큰 덕에 하고 싶은 일은 다 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부유하게 비싼 과외나 명품을 휘감고 산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건 항상 어떻게든 해주시려고 노력하셨던 분들이다.
그래서 더더욱 부모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컸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줄이고, 내게 그 모든 걸 해 주셨으니까.
그걸 다 갚지는 못하겠지만, 내 힘이 닿는 데까지는 부모님에게 꼭 효도하고 싶었다.
부모님의 청춘은 온전히 내게만 쓰인 것일 테니까.
“엄마, 여기로 쭉 따면 되는 거지?”
위아래로 편한 옷을 입은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바구니를 든 채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아휴, 그냥 쉬라니까, 왜 나왔어.”
어머니는 손을 허공에 쉬이 저으며 나를 말렸다.
“나 어차피 오늘 할 거 없어. 지금 바쁠 땐데, 블루베리 따는 거 도우려고.”
“아서라. 엄마랑 아빠 둘이 하면 돼.”
수확으로 정신없는 부모님은 새벽 일찍 농장으로 나가셨고.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나왔지만.
어머니는 내가 일하는 것을 극구 말리셨다.
“이렇게 딸 게 많은데?”
나는 탐스럽게 익은 블루베리를 하나 따서 입에 넣으며 말했다.
“나 여기서부터 쭉 딸게요.”
“그럼 날씨 더우니까, 조금만 하다가 그냥 들어가서 쉬어.”
“네, 네.”
어머니는 내 걱정에 숨을 내쉬었고.
그런 어머니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서둘러 익어가는 블루베리를 수확하기 시작했다.
내리쬐는 태양.
촬영 현장에서 받던 그 햇빛과는 차원이 달랐다.
현장에서도 땀을 흘리며 촬영했지만, 잠깐잠깐 밖에서 카메라 앞에 서는 것과.
이렇게 온종일 햇빛 아래에서 농사일을 하는 것은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
한참 허리를 숙여 블루베리를 따다가 스트레칭을 하며 일어섰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 계신 부모님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단 한 번도 허리를 펴지 않고 일하시는 모습.
점점 굽어가는 부모님의 등과 좁아지는 어깨에 괜스레 가슴이 찡해졌다.
매일 이 일을 어떻게 하셨을까….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내가 하고 싶다는 걸 다 해주셨다는 생각이 들자, 목이 메어왔다.
세월이 지날수록 커져가는 나, 반대로 점점 작아져가는 부모님.
하루빨리 성공해야 한다.
부모님이 내게 정성을 쏟으셨던 것만큼.
아니, 그 극진한 사랑에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 일부라도 내가 부모님에게 보답하려면, 꼭 성공해야 한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
여름이 끝나가고 있지만, 아직 해가 꽤 긴 편이었다.
아버지는 땀으로 얼룩진 옷을 휘휘 흔들며 내게로 다가왔다.
“희성아, 오늘 오랜만에 여기서 고기 구워 먹을까?”
“좋죠.”
자주는 아니었지만, 농장 한쪽에 마련해둔 바비큐장.
물론 실제로 바비큐장은 아니다.
그저 빈 공간에 우리만의 고기 먹는 장소로 지정해둔 것이지.
어릴 적부터 그곳에서 가족끼리 고기를 구워 먹고는 했다.
숯불 위에서 구워 먹는 고기는 언제 먹어도 맛있지.
그런데 하루 내내 땀을 흘리며 일하고 먹는 고기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답을 보냈지만.
문득 드는 생각에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아빠, 일하고 힘든데, 저기에 숯불 피우고 먹으면, 정리하기 너무 힘드신 거 아니에요?”
아직도 부모님 눈에 나는 어린아이였기에.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는 건 항상 아버지의 몫이었다.
내가 하겠다고 우겨도 소용이 없었지.
그렇기에 바비큐를 먹게 되면, 내가 나서도 결국 아버지가 다 하시리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에이, 그게 뭐가 힘들다고.”
그러곤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바비큐장으로 향하며 작게 읊조렸다.
“아들이 오랜만에 왔는데, 바비큐 한번 또 해줘야지.”
“그냥 나가서 편하게 드셔도….”
그런 아버지를 막아서려 달려갔지만.
순간 아버지의 표정을 보았다.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행복해하는 얼굴.
아들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어 뿌듯해하는 저 표정에 나는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게, 바로 저 마음일 터.
나는 더 이상 바비큐장으로 향하는 아버지를 막지 않았다.
그러고는 곧장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가 바비큐 준비를 돕기 시작했다.
“크으.”
아버지는 소주 한 잔을 들이켠 뒤, 입을 열었다.
“아들이랑 오랜만에 고기에 소주 한잔하니까 좋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의 빈 잔을 채웠다.
“엄마도 한잔 더 할래?”
“엄마 오늘 많이 마신 것 같은데… 그래도 아들 왔으니까, 한 잔만 더 마시지 뭐. 조금만 줘.”
“그래.”
부모님과 함께 술잔을 기울인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내가 연기를 시작하고부터는 이런 자리가 한 번도 없었다.
술을 마실 수 있는 20살.
그때 아버지에게 술을 배웠다.
이후 농장에서도 몇 차례 술잔을 들었지만.
졸업이 가까워질 때쯤.
확실히 배우의 길에 발을 들이겠다고 말한 순간부터는 이런 자리가 없었다.
워낙 연예계를 반대하셨으니까.
대학의 연극 영화과 역시 반대하셨다.
하지만 내가 원서를 넣어버렸고, 부모님은 대학교 때까지만 철없이 방황할 거라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 꿈은 확고했고.
오히려 대학교를 다니며 그 꿈은 온몸 가득히 뿌리 잡게 되었다.
반대하신 것과는 별개로, 이후 내가 너무나도 바쁜 생활을 했다.
이 업계를 싫어하시는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생계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시면, 더더욱 싫어하고 속상해하셨을 테니까.
그래서 배우와 병행해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집에 내려올 수 있는 시간이 없었지.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하는 술자리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느새 고기가 바닥이 났고.
불판 위에는 라면이 담긴 냄비가 올라갔다.
“우리 아들이 끓여주는 라면, 정말 오랜만에 먹네.”
어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얘는 꼭 여기서 먹을 때, 라면 끓이잖아. 하하.”
아버지도 한마디를 보태며 술을 한 잔 들이켰다.
“그럼. 바비큐에서 마무리로 라면은 꼭 먹어줘야지.”
나는 서둘러 아버지의 빈 잔을 채웠다.
라면이 끓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우리 셋.
서로의 시선은 마주치지 않은 채, 라면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 순간.
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들… 배우하길 잘했다.”
“…….”
분명 작은 목소리였지만,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처음이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두 분이 반대를 하셨지만.
특히나 아버지의 반대가 심한 편이었다.
힘든 길인 것을 아셨기에, 극구 만류하셨던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의 입에서 배우하길 잘했다는 말이 나오다니.
나는 그 말에 마른침을 크게 삼켰다.
그리고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기에, 분명 술기운으로 심장이 뛰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짧은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사실 그동안 안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너무나도 힘든 점이 많았지.
배우 생활부터 생계까지.
그런데 아버지의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위로해주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온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고.
감정의 소용돌이는 내 온몸을 감싸 안았다.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면.
왜인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고 응원해주는 가족이 있기에.
그 감사함에, 그 위로에 힘들었던 지난 시간이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은 기분.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고.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애꿎은 라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
높게 뻗은 언덕.
양손 가득 짐을 들고 가파른 언덕을 걷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온 서울.
그리고 높은 곳에 위치한, 좁은 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렇게 말렸지만 어머니는 온갖 밑반찬을 바리바리 싸주셨고.
집에서부터 들고 온 많은 반찬에 팔이 저려왔다.
어깨를 풀며 양손의 가방끈을 재차 꽉 쥐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생각이 튀어나왔다.
“아, 진짜 잘하고 싶다!”
정말 온 진심이 묻어나온 말이었다.
너무나도 간절한 마음에 가슴속이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반드시 배우로 성공해 내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꼭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아.”
가파른 언덕에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내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 지어졌다.
부모님을 만나고 왔더니, 힘이 나네.
***
“안녕하십니까.”
짧게 본가로 다녀온 2박 3일의 휴가.
그다음 날인 오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새롭게 각오도 다졌으니, 서둘러 작품을 골라야 한다.
내가 원하는 곳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으니까.
회사에 출근한 매니저들과 직원들을 향해 인사를 보낸 뒤.
서둘러 연습실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도 시작된 대본 찾기.
방대한 대본들 사이에서 나에게 꼭 맞는 대본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내가 고른 대본의 배역을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본을 고르고 나면, 그 배역을 따내기 위해 새로운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많은 대본을 일일이 읽어보며 고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읽은 대본과 읽어야 할 대본.
구분 지어둔 대본들 사이에서 허우적거릴 때, 연습실 안으로 김 실장이 들어왔다.
그런 그의 손에는 또 다른 몇 개의 대본이 들려 있었다.
“형!”
김 실장이 대본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것들도 보라고 가져왔어.”
“응, 그럴게.”
고개를 끄덕인 후, 대본을 끌어당기며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그런데 김 실장은 그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형, 무슨 할 말 있어?”
김 실장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뭔데?”
내가 재차 묻자, 김 실장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안타까운 표정인지 슬퍼하는 표정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
“달갑지 않은 소식이야.”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박민준이 그거 들어가기로 했대.”
“…어?”
“우리가 놓친 드라마.”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표정은 슬퍼했던 것이 아닌, 안타까워하는 표정이었다.
그 드라마의 주연을 내가 했으면 좋겠다고 계속해서 말한 사람이 김 실장이었으니까.
그런 자리에 박민준이 들어갔으니.
더더욱 못마땅하고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한숨을 짧게 끊어내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그 배역… WG 엔터에서 박민준이랑 물밑 작업 중이었더라고.”
김 실장은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하필 박민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