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63)화 (63/303)

63화 #14 – 인정받는다는 것 (2)

연습실 의자에 기댄 채 쌓여 있는 대본을 넘겼다.

“이건 나랑 캐릭터가 너무 다르고.”

며칠간 연습에만 매진하다 보니 혼잣말 정도는 예삿일도 아니었다.

“조연이 사이코패스 역할이라….”

똑똑.

김 실장이 꽉 다문 입술로 연습실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그러고는 나와 눈을 마주친 채 안으로 들어왔다.

“희성아, 연습 잘돼가?”

“오전에 보던 건 다 봤고, 다른 대본들 좀 더 보려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앞에 착석했다.

아무 말 없이 책상에 양팔을 올리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모습.

그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할 말 있어?”

내 말에 김 실장은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얼굴에서 알 수 있었다.

좋은 소식은 아니라는 것을.

탁.

들고 있던 대본을 덮으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뭔데, 이야기해 봐.”

그러자 한숨을 삼켜내듯 어깨를 들어 올리는 김 실장.

그의 태도에 나는 눈을 연신 깜빡였다.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여?”

김 실장은 쓰읍 소리를 내며 눈썹을 팔자로 휘었다.

“저번에 말했던 주연 캐스팅 있잖아.”

“응.”

“그거 우리가 고민하는 사이에, 못 기다린 제작진 측이 다음 캐스팅 후보한테 넘겼다더라.”

“아….”

얼마 전 김 실장과 그 작품에 대해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아직 결론을 짓지 못했지.

그 작품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적은 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캐스팅을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연이라는 달콤한 캐스팅에, 김 실장이 너무나도 끌린다고 하던 작품.

그래서인지 배역이 다른 배우에게 넘어갔다는 말에 김 실장은 안타까워했다.

“좀 아깝다.”

작품을 할 마음이 없기는 했지만, 아쉬워하는 김 실장에게 상관없다고 말할 순 없는 노릇.

누구보다 나를 위해 뛰고 있는 사람이 김 실장이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그에게 답했다.

“그러게. 그 드라마는 나랑 인연이 아니었나 봐.”

김 실장이 애써 입꼬리를 늘렸다.

“그래도 미니시리즈 첫 주연이 될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내가 그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괜찮아. 더 좋은 기회가 오겠지.”

“그래야지.”

김 실장은 내가 속상할까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가 눈썹을 들썩이며 턱을 하늘 높이 들었다.

“희성아, 대본 내려놓고, 테라스에 가서 잠깐 머리 좀 식히자.”

드라마 캐스팅이 넘어가서 좌절하거나 속상한 마음은 없었지만.

김 실장의 배려에 미소를 지었다.

“나 정말 괜찮은데, 형.”

“그래도, 어차피 지금 대본 고르는 건 급한 거 아니니까.”

“그러자, 그럼.”

김 실장이 한숨을 삼켜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 그의 마음은 오히려 내게 자극이 되었다.

나만큼 내 성공에 진심인 사람.

내 합격 소식에 기뻐하고, 탈락 소식에 슬퍼하고 아쉬워하는 이가 있다는 것.

그건 내 원동력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었다.

더 열심히 연습해 높이 올라가고 싶게 만들었으니까.

***

테라스에서 몇십 분간의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찾아온 연습실.

다시 쌓여 있는 대본을 보기에 바빴고.

김 실장은 오디션 일정을 확인하며 스케줄 정리를 하고 있었다.

지이잉.

그때, 휴대 전화의 진동이 책상에 가득 퍼져 울렸고.

대본을 한 손으로 든 채 휴대 전화를 들었다.

-XX은행 입금 58,503,500원 HS 엔터테인먼트.

통장의 입금 내역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금이 5천만 원.

아니, 거의 6천만 원에 가까운 숫자였다.

“헉!”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탄성이 터져 나왔고.

자연스레 벌어진 턱을 다시 닫자, 김 실장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그를 향해 휴대 전화를 돌려 화면을 보여주었다.

“형, 이게 뭐야?”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 휴대 전화 화면을 바라보았고.

이내 김 실장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너 출연료.”

“…이렇게 많이 들어왔다고?”

내 말에 김 실장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더니 스케줄러를 덮으며 본격적으로 입을 열었다.

“원래 조연들은 그 정도 받아. 아니, 희성이는 이제 더 많이 받을 거지만.”

김 실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톱 배우들을 제외하고, 꽤 괜찮은 조연들은 2천에서 3천쯤.”

“와아!”

금액에 입을 헤벌렸다.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주변에서 그 금액을 받는 동료 배우는 없었기에.

김 실장을 통해 직접 액수를 듣자 새삼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평범한 조연의 경우는 천에서 2천 정도. 희성이 너는 첫 조연이니, 그보다 조금은 깎였지. 회당 625만 원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물었다.

“회사에서 떼어가는 건?”

“촬영하고 평소에 너한테 들어가는 것들. 회사 정산 떼어가고, 세금이랑 정리한 뒤에 금액이 오늘 입금된 거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한번 휴대 전화 입금 내역을 확인했다.

58,503,500원.

드라마 회당 출연료가 625만 원.

미니시리즈 드라마가 16부작이었으니, 그걸로 1억을 채운 것이지.

거기에 영화 출연료 3천만 원.

총 1억 3천만 원의 수입이 생겼다.

내가 휴대 전화를 빤히 바라보자,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활동비는 뭐 뭐인지 알지?”

“어. 의상이랑 차량, 스타일리스트….”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아. 거기에 내 월급이랑 기타 활동비까지.”

김 실장은 다이어리를 뒤적이며 말을 이어갔다.

“합치면 이번 건은 2천만 원 정도 빠졌을 거야.”

김 실장의 말대로 활동비를 제외하면, 남은 금액이 1억 1천만 원 정도.

이제 이걸 100%로 환산하여 계산하여야 한다.

55:45.

바로 배우와 회사의 비율이다.

내가 55%, 엔터 회사가 45%를 먹는 것.

그러니 60,500,000원을 가져가게 되었을 것이고.

거기에 마지막으로 떼어가는 세금 3.3%까지.

총금액에서 확확 줄어가는 돈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그렇게 해서 내게 온 금액은 58,503,500원이 되는 것이다.

이 금액도 내게는 너무나 큰 숫자이기는 했다.

침을 꿀꺽 삼킨 후 다시 숫자를 확인했고.

…미친.

그 숫자에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이게 내가 연기를 하면서 벌게 된 돈이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연기가 좋아서 시작한 배우 생활.

하지만 꿈을 좇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생계유지는 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연기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건, 편의점 아르바이트였다.

그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연기했지만.

연기로 버는 돈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돈이 생활에는 더 도움이 됐다.

주변에서는 그런 괴리감에 연기를 접은 동기들이 몇몇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의 길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간절히 원하던 것이니까.

그게 내 꿈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제야 꿈에 한 발짝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돈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돈이 있어야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여건이 될 테니까.

이제야 한 계단을 올랐을 뿐.

아직 내게 올라가야 할 계단은 길게 펼쳐져 있었다.

“진짜 많이 떼어가지?”

김 실장이 한쪽 입꼬리를 옅게 올리며 물었다.

그의 말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이 정도 벌게 해준 게 감사하지.”

김 실장과 함께 다시 업무를 시작했고.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고,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희성아, 월급은 아니지만, 처음 정산 받은 느낌이 어때?”

그는 자신의 일처럼 뿌듯한 얼굴로 물었고.

이에 난 입꼬리를 활짝 올리며 답했다.

“너무 좋지.”

“이제 뭐 할 거야?”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 실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정산 받으면 하고 싶던 거 없어?”

“음, 글쎄….”

그의 말과 동시에 나는 턱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큰돈이 생기면 뭐부터 해야 좋을까.

금전적으로 여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정산을 받으니 뭘 하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내가 이렇게 돈이 많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진지하게 머릿속으로 계획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

“…집!”

“응?”

큰 목소리에 김 실장이 몸을 움찔거렸다.

나는 곧장 휴대 전화를 열어 주변의 집 시세를 확인했다.

한강이 보이는 집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저 경사가 가파르지 않게 올라갈 수 있는 집.

그리고 연습하기 위해 입을 열어도, 옆집에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는 집.

단지 그런 것들뿐이었다.

그렇게 잠깐 집 시세를 검색하다가 서둘러 창을 닫았다.

“하아-”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

지금 가지고 있는 돈으로 집은 턱도 없었다.

내 표정을 바라본 김 실장이 아랫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집을 자기 돈으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다 대출이지.”

“그렇긴 한데, 전세 대출 같은 건 복잡하기도 하고 잘 몰라서….”

말끝을 흐렸고.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배우가 프리랜서라 대출이 잘 안 나온다고는 하더라.”

“맞네. 톱 급이 아니면 진짜 나올 수가 없겠다.”

내 씁쓸한 표정에 김 실장이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명품을 사는 건 어때? 원래 처음 돈 벌면, 명품 플렉스도 하는 거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어휴, 내 형편에 명품은 무슨….”

집도 얻지 못하는 적은 돈으로 명품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저축을 하면 했지.

그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

손가락을 튕기며 작게 읊조렸다.

“명품… 부모님 사 드려야겠다.”

***

아직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자를 꾹 눌러쓰고 마스크를 낀 채 백화점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장 명품 매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부모님을 생각하며 고르는 선물들.

여느 때보다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부모님이 반대하시던 배우 일.

그 일을 보란 듯이 해내기 위해 애를 썼고.

아직 완전히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일로 번 돈.

그 돈으로 선물을 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속이 뜨거워졌다.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선물을 고르는 내내 내가 선물을 받는 것보다 더 벅찬 기분이 들었다.

백화점에서 인사를 받으며 나오는 길.

내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이 양손 가득 들려 있었다.

커다란 명품 로고가 박혀 있는 쇼핑백.

무게가 꽤 나갔지만, 발걸음은 너무나 가볍기만 했다.

***

딩동.

가득 짐을 들고 있던 탓에, 도어 록이 아닌 초인종을 눌렀다.

인터폰으로 누구인지도 묻지 않은 채 문으로 달려오는 발걸음이 문밖까지 들려왔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움에 달려오는 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선물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실까?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게 이런 느낌일 터.

벌컥.

문이 열렸고.

달려 나온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였다.

“왔어?”

아버지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무뚝뚝한 말투와는 달리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

아버지가 최대한으로 뿜어내는 반가움의 표시였다.

“네, 식사하셨어요?”

“아니. 너 오면 같이 먹으려고 안 먹었지. 어서 들어와라.”

“예.”

아버지는 내 손에 들린 쇼핑백을 서둘러 받으셨다.

자신의 선물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시는 눈치.

그저 내 손에 들린 짐을 들어주시는 듯 보였다.

“뭘 이렇게 많이 들고 왔어, 무겁게.”

평소 부모님께 애교가 없던 나는 마음과는 달리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선물이요.”

아버지에게 짧게 답한 뒤, 부엌에 있는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어머니는 이미 물이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시며 내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아들, 왔어?”

“네.”

“오느라 고생했다.”

“고생은 뭘요. 자주 못 와서….”

내 말에 어머니는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바쁜데 뭘 자주 와. 그저 잘 먹고 잘 지내면 됐다.”

“희성이 엄마, 희성이가 뭘 잔뜩 사왔어.”

아버지는 어머니를 향해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

“어머, 뭘 이렇게 많이 사왔어?”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쇼핑백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품을 바로 알아차리신 모양이다.

“저거 비싼 거잖아.”

어머니는 서둘러 쇼핑백을 풀며 아버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희성이 아빠, 이거 다 명품이잖아요. 희성이 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 이런 걸….”

어머니는 한소리를 하셨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에이, 저도 이제 TV에 나오잖아요. 좋은 거 사드리고 싶었어요.”

어머니 옆에서 쭈뼛대는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도 한번 보세요, 마음에 드시는지.”

“나는 비싼 거 안 좋아해. 그저 싼 거 여러 개면 되지, 뭘 명품이야.”

말과는 달리 쇼핑백을 열고 있는 아버지의 눈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그러고는 첫 번째 쇼핑백 안에 들어 있는 벨트를 들고 거울로 다가가 옷에 걸치고 계셨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아냈다.

“아버지, 마음에 드세요?”

“뭐, 명품이라 그런지 가죽이 좋아 보이기는 하네. 근데 너무 비싼 거 아니냐?”

“괜찮아요. 마음에 드시면 됐죠.”

아버지는 흐뭇한 얼굴로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연신 거울을 바라보았고.

나는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뿌듯함이 온몸을 감쌌다.

식사를 거의 다 했을 즈음.

아버지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아들.”

“네?”

아버지는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TV에 아들 얼굴이 자주 나오니까 좋다.”

“…….”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뒤, 처음으로 아버지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이었다.

나는 놀란 마음에 곧장 입을 열지 못했고.

아버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러고는 거실로 걸어가시는 뒷모습.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아빠가 저렇게 말해도, 밖에선 항상 네 자랑을 하고 다니더라.”

“정말요?”

“어, 어찌나 희성이 네 자랑을 하는지, 오히려 내가 말린다니까?”

어머니는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고.

저 멀리 소파에 앉은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며 벅차오르는 마음을 삼켜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새겼다.

부모님에게 더욱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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