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14 – 인정받는다는 것 (1)
쾅쾅.
쾅쾅쾅쾅!
부서질 듯 두드리는 문소리.
한 명의 손길이 아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울리는 소리에 귀가 찢어질 듯 아파왔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겁에 잔뜩 질린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잠깐만….
왜 아무런 공기도 빨아들여지지 않는 거지?
재차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고 있지만, 여전히 입과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없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꿈이다.
그걸 깨닫기도 잠시.
쾅쾅쾅-!
“문 안 열어?”
순식간에 빠르게 흘러가는 눈앞의 상황.
이내 문고리가 곧 부서질 듯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형… 나 너무 무서워.”
내 다리를 꼭 붙들고 있는 어린 동생.
“쉿!”
다급히 동생의 입을 막으며 숨을 죽였다.
분명, 내가 의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레 움직이는 몸.
우리가 집 안에 있다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
그러면….
우리는 잡혀갈 테니까.
동생을 꽉 붙잡고 고개를 드니 보이는 앤티크한 가구.
그리고 소리 없이 나오고 있는 TV는 분명 흑백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 안 곳곳에 깔린 가구와 여러 제품은 꽤 옛날 물건들 같아 보였다.
하지만 골동품을 모아둔 느낌은 아니었다.
실생활, 그러니까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들.
그렇다면… 여기는 1980년대인가?
파직.
그때, 단단하던 문고리가 강한 흔들림에 이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동생을 데리고 급히 책상 아래로 몸을 숨겼다.
동생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아 소리를 차단했지만.
검은 옷을 입고, 각종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우르르 집을 뒤적였고.
젠장.
“아악!”
결국 나와 동생은 그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살려주세요!”
필사적으로 동생을 몸으로 막아내려 애를 썼지만.
몰려든 많은 인원과 이유 모를 매타작.
그리고 맨몸으로 동생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동생을 꼭 껴안은 내 몸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얼굴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동생은 내 품 안에서 그 뜨거운 액체를 손으로 닦아냈다.
“혀엉… 피….”
스르륵.
그리고 이내 나는 정신을 잃었다.
몸에는 감각이 사라진 듯했다.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도 구분할 수가 없었지.
그리고 꽉 감긴 눈.
서서히 정신이 또렷해지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괴롭혔다.
여전히 눈이 떠지지 않았다.
무언가 무거운 것에 눌려 있는 기분.
아니면 내 눈이 너무나도 부어 떠지지 않는 걸까?
“푸우우악!”
누군가가 내 뒤통수의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고.
어디인지 모를 곳에 얼굴이 담겼다.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내 코와 입, 그리고 귓속.
겨우 뜬 눈까지 넘실거리는 물이 새어 들어왔다.
살기 위해 온몸을 부르르 떨며 몸부림쳤다.
“푸악!”
그리고 이내 내 얼굴은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물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 걸까?
아니, 어쩌면 깨우기 위해 물속에 얼굴을 넣은 것일 수도 있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자, 내 머리를 쥐고 있는 어두운 물체.
그 남성이 입을 열었다.
“이 빨갱이 새끼야.”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빨갱이….
내가 왜 빨갱이라는 거지?
난 일반 대학생이었다.
그저 지극히 평범한 사람.
어떤 단체에도, 그리고 학교에서도 그 어느 활동조차 하지 않는 조용한 학생.
“내가 왜 빨갱….”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은 다시 어두운 욕조로 담겼다.
“푸우우!”
숨을 쉴 수가 없었고.
흐릿하게 들려오는 웃음 섞인 그들의 대화.
“쟤가 뭐 진짜 빨갱이겠습니까?”
“그게 뭐가 중요하냐. 위에서 하라면 하는 거지.”
“이러다가 얘도 죽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여러 명이 떠드는 소리.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정확히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저 단 하나.
내가 이곳에 끌려온 건, 정당하지 않다는 것.
그들이 부르는 빨갱이.
나는 확실히 아니다.
그리고 그들도 알고 있다.
그냥 끌려온 거라는 것을.
이건 그 어딘지 모를 ‘위’에서 시키는 짓이라는 것을 말이다.
대체 왜….
다시 내 머리가 욕조 위로 올라왔을 때, 힘겹게 입을 떼어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내 말에 그들은 입가에 웃음을 띤 채 답했다.
“알아.”
“근데 왜… 내게.”
“왜냐고?”
한 놈이 몸을 숙여 내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위에서 네가 빨갱이라면 빨갱이인 거야.”
“그게 무슨….”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게 다야.”
숨이 점차 가빠왔고.
어딘지 모를 이 검은 공간 안.
옆방으로 추정되는 공간에서는 비명이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아악!”
“살려주세요!”
공포의 소리로 가득한 이곳.
그리고 그들이 내게 말했다.
“그냥, 빨갱이라고 인정하는 게 편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꽁꽁 묶인 내 팔과 다리는 몽둥이에 두들겨 맞기 시작했고.
다시 내 머리는 물속 깊은 곳으로 담겼다.
이내 내 의식은 점차 흐릿해져 갔다.
팟-.
눈앞에 보이는 하얀 천장.
꿈에서 깨어났다는 생각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급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이게 대체 무슨 꿈이야.
지금껏 꿨던 꿈들은 깨고 나면 흥분되거나 설레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번 꿈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느낌.
이전 꿈과는 다른 의미의 두근거림이었지.
기분이 퍽 나쁜 꿈.
숨을 내쉬고 꿈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릴수록 차분해졌다.
갑자기 이런 꿈을 왜….
번뜩 뇌리를 스치는 것.
대본이었다.
내게 주연 캐스팅으로 들어온 드라마.
김 실장에게 받아온 대본을 재빨리 뒤지기 시작했다.
배경은 꿈에서 본 것과 비슷한 것 같았다.
아니, 분명 동일했다.
하지만 드라마의 내용은 내 꿈과는 전혀 다른 역사였다.
꿈에서, 그러니까 내가 그 시대에 겪은 역사가 아니었다.
빨갱이도 아니었고,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내게.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입 밖으로 내뱉을 수도 없는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그저 ‘위’에서 시킨 한마디라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드라마 대본 그 어디에도 그런 말은 한 줄도 없었다.
단 한 장면도.
드라마에서는 폭동을 일으킨 빨갱이들을 검거했다는 내용.
오히려 그 ‘위’라고 외치는 곳이 정당화되었고, 오히려 그들을 찬양하는 대사들이 가득했다.
그뿐이었다.
꿈을 통해 이제야 정확히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역사의 왜곡이다.
어제 대본을 보고 찜찜한 느낌이 들었던 게 이 때문인가….
대본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득 눈앞의 거울을 바라보자, 얼굴이 엉망이었다.
힘든 꿈을 꾼 터라 온몸과 얼굴은 땀범벅이었고.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맑은 정신으로 집에서 나와 회사로 향하는 길.
내 손에 쥐고 있는 대본.
처음으로 주연 역이 들어온 것이기에, 깊은 고민을 해보기로 했다.
물론 드라마니까, 허구가 섞여도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저 픽션인 것과 역사가 다른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비중이 바뀐다고 한들, 이 드라마가 당길 것 같지는 않았다.
대본이 흥미진진하고 다이내믹하긴 했으나, 왠지 모르게 끌리지 않았다.
드라마의 최나현 작가와 백현성 감독.
그 작감 라인을 본다면, 무조건 시청률은 보장되었다.
하지만 내가 이 드라마를 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
“안녕하십니까.”
회사에 들어서자 박 팀장이 나를 반겼다.
“어, 희성 씨. 오늘도 출근했네?”
“그럼요. 얼른 다음 작품 준비해야죠.”
그는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박 팀장은 내가 HS 엔터 입사 때부터 나를 반겨주었던 인물이다.
“희성 씨가 우리 HS 엔터로 들어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는 내게 의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다른 회사에서 채어갔으면, 우리 못 볼 뻔했잖아. 하하.”
그와 마주 보고 앉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그는 자신의 자리 옆에 있는 음료수를 내게 건넸다.
오랜만에 그와 마주하는 자리.
그러고 보니 입사 제안을 받은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래요.”
그는 김 실장의 빈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 실장은 잠깐 볼일이 있어서, 조금 이따가 올 거야.”
“아, 네.”
박 팀장이 손가락을 튕기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희성 씨, 이번에 주연 제안을 받았다며?”
“아….”
내 가방 속에 담긴 대본, 그 드라마를 이야기하는 것일 터.
“그거 작가랑 감독이 대박이잖아.”
박 팀장의 감탄 섞인 목소리.
“크으, 드디어 우리 희성 씨가 드라마 주연으로 급부상하는 건가?”
주연 캐스팅 소식에 박 팀장은 흥분하듯 소리쳤지만.
난 그 드라마를 거절할 생각이었기에 당황함을 겨우 감췄다.
아직 김 실장과는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박 팀장에게 먼저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입을 열지 않자, 박 팀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희성 씨가 연기를 잘하니까, 벌써 주연 자리로 오르고….”
“다녀왔습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김 실장이 다가와 그에게 허리를 접었다.
“어, 김 실장 왔어?”
“네, 말씀하신 건 처리해 뒀습니다.”
“고생했다.”
김 실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이 일찍 왔네?”
“응, 조금 전에 왔어.”
박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가도 좋다는 모션을 취했고.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행스럽게도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가 끊겼고.
서둘러 김 실장의 자리로 향했다.
김 실장과 함께 들어온 회의실.
문을 꽉 닫은 뒤, 김 실장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대본을 내려놓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본은 다시 읽어봤어?”
“응.”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빛.
내게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한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다른 대답을 내밀었다.
“형, 이거 별로인 것 같아.”
그러자 김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정도야?”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대본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답했다.
“나는 전체적으로 괜찮던데, 특히나 작가랑 감독이 짱짱하잖아.”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쓰읍 소리를 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기는 한데, 이거 실제 역사랑 좀… 아니, 완전히 달라.”
“난 또 뭐라고.”
김 실장은 안도의 표정과 함께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말을 이어갔다.
“원래 드라마랑 현실은 다르잖아. 현실 그대로를 드라마로 만들면, 자극적인 요소도 하나 없고 말이야.”
“그건 알긴 하는데, 그렇다고 역사랑 다른 건 좀 아닌 것 같아.”
김 실장은 내 말에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당황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나와 다른 의견에 고민에 빠진 듯한 얼굴.
잠시 그와 나 사이에 정적이 흘렀고.
김 실장이 대본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한참 대본을 넘기며 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희성아.”
“응.”
“우리 첫 주연이야.”
김 실장의 낮게 깔린 목소리.
이게 가장 핵심 포인트였다.
첫 주연.
나 역시 그걸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미니시리즈 드라마에서의 주연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달콤했으니까.
“…….”
“물론 종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번 주연을 맡고 나면 앞으로 주연 섭외가 오기 시작할 거야.”
그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앞으로 다른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주연 섭외가 오겠지.
그게 아니라면 큰 비중의 조연 정도는 캐스팅이 들어올 터.
하지만 그의 말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찜찜해.”
“너도 알잖아. 배우로서 주연급으로 올라가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거.”
알고 있다.
주연으로 한 번이라도 올라서느냐, 마느냐가 배우로서의 인생을 판가름한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너무 아깝지 않아?”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형도 알잖아. 한 번 해서 망해버리면, 그 책임이 전부 주연 배우한테 간다는 걸 말이야.”
“그렇긴 한데, 희성아 이번에는….”
그의 말을 칼같이 잘라냈다.
“형.”
내 부름에 그가 눈썹을 들썩였다.
“지금까지 내가 형 말을 다 들었잖아.”
“그랬지.”
“근데 이건 느낌이 안 좋아.”
한 번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항상 김 실장이 추천한 것은 거절한 적이 없었고.
그의 말을 따랐지.
그래서인지 김 실장은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기회를 내 한마디에 곧바로 포기할 수는 없는 듯싶었다.
“그럼… 조금만 더 고민해보자.”
그의 말에 내가 시선을 피하자, 재차 내게 말했다.
“아니, 이거 거절해도 되기는 하는데….”
“아니야. 조금 더 고민해볼게.”
내 말에 김 실장은 옅은 미소와 함께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