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58)화 (58/303)

58화 #13 –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 (1)

우중충한 잿빛 하늘.

바람이 세차게 부는지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비 오려나 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그러게. 일기 예보에서도 비 온다고 했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안 봐도 무조건 오겠는데?”

“하긴, 소나기라도 오기는 하겠다.”

촬영 때마다 더운 날씨 탓에 흘리던 땀.

오늘은 오히려 스산한 날씨 탓에 얇은 겉옷을 걸쳐 입었다.

“오늘 야외 촬영 신 몇 개 있던데, 비 내리기 전에 빨리 찍어야겠다.”

내 말에 김 실장은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응, 안 그래도 방금 촬영 시작했을 거야.”

“아, 벌써?”

“첫 신은 단역 배우들이라서 말 안 했지.”

나는 겉옷을 여미며 김 실장에게 답했다.

“그래도 촬영하는 거 보러 가야겠는데?”

“그래, 가자.”

***

미간을 찌푸린 채 현장을 응시했다.

주연을 맡은 박나연과 최서빈의 연기.

그들은 미묘한 감정을 눈빛으로 주고받았고.

그들의 연기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냈다.

“와아! 박나연, 연기 잘한다고 듣기는 했는데 확실히 다르긴 하네.”

내 옆에 있던 김 실장이 그녀의 연기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게. 눈빛에서 감정이 바로 드러난다.”

“어,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고인 것 같잖아.”

멀리서도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물을 흘리는 신도 아닌데 꼭 눈물이 가득 차오른 듯한 눈동자.

“저 봐. 저 눈이 렌즈가 아니라고 하더라.”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눈이 깊기는 하네….”

우리가 박나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컷, 오케이!”

장 감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신 바로 들어갈게요.”

다음 신 촬영 준비에 박나연과 최서빈이 현장을 빠져나왔다.

“선배님!”

내 앞쪽으로 걸어 나오는 최서빈과 눈이 마주쳤고.

그를 살짝 부르며 목례를 보냈다.

“어, 희성아.”

그는 자연스레 내 곁으로 다가와 서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다음 신이 너랑 나, 같이 찍는 거지?”

“예, 그래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현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왜 벌써 나와 있었어. 중간에 긴 신이 하나 있잖아.”

최서빈은 현장에 서 있는 박민준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 말고 저 친구만 나오는 걸로 기억하는데?”

최서빈과 박민준은 같은 소속사 선후배 사이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가 가깝지 않다는 것은 호칭만 들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맞아요. 아까 와서 선배님 연기 보면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아, 내 연기 봤어?”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선배님 연기는 항상 봐도 배울 점이 많잖습니까.”

내 너스레에 최서빈이 어깨를 툭 치며 활짝 웃었다.

“나도 안 쉬고, 너랑 같이 대기하다가 바로 슛 들어가야겠다.”

최서빈의 말에 나는 그를 훑어보았다.

“선배님, 환복은요?”

“나 다음 신도 이 옷 그대로야.”

그때 조명이 켜지고.

박민준 홀로 현장에 우뚝 서서 카메라를 응시했다.

“레디, 액션!”

장 감독의 사인에, 최서빈은 말을 하려다 황급히 입을 막았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시선을 박민준에게 고정했다.

박민준은 카메라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거지 같네.”

대사를 내뱉자마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휴대 전화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한껏 올라간 목소리.

“여보세요. 네, 원장님. 저 박 대리입니다.”

휴대 전화를 양손으로 쥔 채 통화하는 모습.

“아니요. 거기 아니고, 광주에 있는 WG 메디컬에 박 대리요. 네, 네.”

상대 배역이 앞에 있지 않고.

전화를 든 채 연기하다 보니, 박민준의 얼굴에서는 어색함이 조금 묻어나왔다.

그 모습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고.

“컷, NG!”

아니나 다를까, 장 감독의 눈에도 그렇게 보인 모양이다.

곧바로 난 NG.

“민준 씨, 비굴하게 전화를 하는 건데, 그렇게 하지 말고. 다시 한번 가볼게요.”

“아, 죄송합니다.”

박민준이 볼에 바람을 넣으며 안면 근육을 풀어냈다.

장 감독은 자리에 서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는 박민준을 향해 전화를 받고 있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런 식으로 가능하죠?”

장 감독의 모습에 박민준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의 모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시 해 보겠습니다.”

“바로 다시 갈게요.”

그는 짧은 한숨과 함께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레디, 액션!”

장 감독의 말대로 박민준은 앉은 의자에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여보세요. 네, 원장님. 저 박 대리입니다.”

누가 보고 있지 않아도, 통화만으로도 기가 죽은 영업 사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아니요. 거기가 아니고, 광주에 있는 WG 메디컬….”

“컷, NG!”

박민준의 대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치는 장 감독의 사인.

장 감독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고.

모든 이들의 시선은 그를 향했다.

“아니, 어떤 영업 사원의 말투가 그래.”

“아….”

박민준은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르는 듯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장 감독의 말에 대꾸할 수는 없었으니까.

“NG!”

이어지는 박민준의 촬영.

그리고 연이어 나오는 NG.

장 감독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참고 참던 장 감독이 화를 눌러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알려준 대로만 하지 말고, 응용을 해야지. 그렇게….”

계속되는 장 감독의 코치에 박민준은 잔뜩 풀이 죽은 듯 보였고.

내 어깨에 팔을 올리고 있던 최서빈은 손을 스르륵 내렸다.

“하아, 촬영 엄청 길어지네. 오늘따라 장 감독님의 컨디션이 안 좋으신 거 같긴 한데….”

그의 말에 최서빈이 아닌, 장 감독을 바라보았다.

“근데 민준 씨가 저 간단한 연기를… 아니다.”

최서빈은 말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음 신은 나와 최서빈 차례였기에.

살짝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수없이 연습했지만, 현장에서 실수를 해버린다면 그 연습은 모두 물거품이 될 터.

고개를 들고 대사를 떠올렸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오는 점점 흐려진 하늘.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곧 비 쏟아질 것 같은데요?”

내 말에 최서빈도 고개를 들어 답했다.

“그러네. 민준 씨가 빨리 오케이를 받아야, 우리 거까지 촬영할 수 있을 듯한데.”

“저희가 마지막 야외 신이라고 들었어요.”

그는 내 말에 눈썹을 들썩였다.

“아, 중간에 비 오면 촬영 밀리는데. 민준 씨가 이번에는 잘 좀 연기했으면 좋겠네.”

메가폰 너머로 들려오는 장 감독의 목소리.

“컷, 오케이.”

힘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분명 오케이 사인이었다.

나와 최서빈은 서둘러 몸을 풀곤 곧장 현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감독이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날씨가 조금 안 좋으니까, 다음 신 바로 찍을게요!”

“네.”

최서빈과 나는 감정을 잡으며 함께 걸었고.

그때.

우리의 앞으로 박민준이 터덜터덜 다가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힘이 쫙 풀린 모습.

앞선 촬영에서 장 감독에게 핀잔을 그렇게 들었으니 힘이 없을 터.

갑자기.

최서빈이 박민준의 앞을 가로막으며 발길을 멈춰 세웠다.

박민준은 고개를 들어 그를 확인하고는 머리를 숙였다.

“선배님.”

최서빈은 그의 부름에도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그리고 박민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민준 씨, 연기 연습 좀 잘하고 옵시다.”

박민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고.

연신 눈만 깜빡거리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다른 사람한테 피해가 가잖아요. 잘 좀 합시다.”

“…네, 죄송합니다.”

최서빈은 그에게 가시 박힌 말을 쏟아낸 뒤 유유히 현장으로 걸어갔다.

***

“얼른 찍고 마무리합시다.”

장 감독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액션!”

최서빈은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대리님이 이런 거죠?”

“아니, 처음 보는 소모품이야.”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침을 떼는 내 모습에 최서빈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대리님이 한 거 봤다고 이미 다 들었어요.”

“누가, 누구한테 들었는데!”

“컷, NG!”

장 감독은 앉은 자리에서 신을 끊었다.

내 실수였다.

가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나는 목을 풀며 모두가 들리게 외쳤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그러자 장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갈게요. 레디, 액션!”

“누구한테 들었는데!”

“컷, NG!”

젠장.

재차 터진 내 실수였다.

벌써 세 번째 NG.

하필이면 또 같은 부분에서 실수가 쏟아졌다.

이번에는 꼬여버린 발음이 문제였다.

하아, 갑자기 왜 이러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어이없게도 이어진 별거 아닌 NG에 장 감독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결국 장 감독은 메가폰을 내려놓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평소라면 넘어갔을 수도 있지만, 앞서 박민준의 촬영에서도 순조롭지 못하게 지나갔기에.

화가 누적이 된 모양.

그때.

최서빈이 생글거리며 미소를 지었고.

장 감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 감독님. 매일 덥다가 갑자기 바람이 부니까 입이 얼어붙나 봐요.”

최서빈은 자신의 입과 볼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곧 비 올 거 같은데… 다시 한번 빨리 가도 될까요?”

그의 말에 장 감독은 내게로 오던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하아, 그래. 다시 가봅시다.”

장 감독은 발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고.

나는 최서빈을 바라보며 데시벨을 낮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용기를 북돋아 주려는 듯 말했다.

“아니야. 기죽지 말고, 딴 데 홀리지도 말고 집중해.”

“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 할 수 있는 연기해. 네가 잘해야 나까지 끌고 올라가지.”

최서빈의 말에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한마디에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용기가 샘솟았다.

눈을 부릅뜨며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그에게 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

“희성아, 왔어?”

“응, 좋은 아침!”

차에 올라타자 김 실장이 나를 반겼다.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차는 집 앞을 벗어났고.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김 실장을 향해 물었다.

“어제 말한 대로 촬영 두 번째 신에….”

“아!”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 실장이 손가락을 튕기며 입을 열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놀란 얼굴로 그에게 묻자, 김 실장은 코를 찡긋거렸다.

그러고는 룸 미러로 나를 바라보며 내 옆 좌석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희성아, 옆에 대본 새로 나온 거야.”

“대본이 수정됐어?”

“어, 장 감독님이 뒷부분을 많이 수정하셨더라.”

영화를 촬영하면서 아쉬운 걸 느꼈던 모양이다.

이미 촬영은 중반까지 이어지고 있었고.

이제 와 다시 찍을 수는 없기에, 새로 모색한 방법이 대본 수정이었을 터.

김 실장의 말에 재빨리 대본을 펼쳐들었다.

수정된 부분을 읽어 내려가던 내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형,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버리네?”

나는 대본을 빠르게 넘기며 재차 입을 열었다.

“게다가 찬조 출연이라고 하기에는 비중이 꽤 높잖아. 거의 구원 투수로 부른 느낌인데?”

김 실장이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어. 드라마면 모를까, 영화에서 중간에 들어온 구원 투수가 이렇게 비중 높은 건 진짜 드물거든.”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둘러 투입되는 배역의 높은 비중.

과연 누가 맡게 되는 거지?

대본을 넘기던 도중 가운데 끼워진 종이가 튀어나왔다.

‘추가 영입: 강찬성’

잠깐만.

강찬성?

그 드라마용 배우가 구원 투수로 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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