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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57)화 (57/303)

57화 #12 –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6)

찌뿌듯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며 현장으로 걸어갔다.

밤샘 촬영으로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차에서 쪽잠을 두어 시간 잔 뒤.

눈을 비비며 앞을 바라보자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고.

수많은 스태프와 배우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영화 첫 촬영 날, 고사상을 올렸던 게 얼마 전 같은데.

벌써 영화 촬영은 3분의 1지점까지 다가왔다.

피곤해하며 하루를 힘겹게 버티기에는 아직 이르다.

긴 영화 촬영의 반환점에 이제야 다가가고 있었으니까.

턱까지 내려오는 다크서클을 뽐내며 걸어가는 박민준의 얼굴.

그는 자신의 뒷목을 주무르며 차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놀랍게도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박민준과 단 한 번도 시비가 붙지 않았다.

그 생각과 동시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동료 배우와 시비가 붙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리 놀라울 일인가.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드라마 촬영에선 박민준과 매 신마다 트러블을 겪었다.

물론 그 모든 시비가 일방적인 박민준에게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이제는 박민준도 괜히 나를 건드렸다간 피 본다는 걸 알았을 터.

우습게도 이번 촬영 현장에서 한 번도 그와 인사를 주고받지 않았다.

박민준과 단둘이 찍는 신도 적었을뿐더러, 다른 배우와 함께하는 신에서도 굳이 대화를 주고받을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저놈이 최서빈의 눈치를 보는 게 조금 느껴졌다.

그렇다고 굳이 박민준과 이야기를 나눌 생각도, 더 나아가 친분을 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 희성 씨. 다음 신 준비할게요.”

차 앞에 서 있는 내게 다가와 말을 전한 스태프는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대사를 복기하며 의상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

최서빈의 신은 다른 배우들에 비해 월등히 많은 편이다.

주연 배우이기에 분량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주연을 처음 맡아본 것도 아닌 최서빈이 유독 힘들어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컷, NG!”

장 감독은 미간을 찌푸린 채 NG 사인을 내뱉었고.

그 말에 최서빈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그 탓에 번져 버린 화장.

서둘러 최서빈에게 메이크업 팀이 달려들었다.

“하아….”

최서빈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서 있는 채로 수정 화장을 받고 있었다.

다음 신을 최서빈과 함께 찍어야 했기에 가까이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는 더운 날씨 탓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이씨.”

그때 들려오는 최서빈의 퉁명스러운 목소리.

“아, 죄송합니다!”

화장을 수정해주던 한 스텝의 손이 최서빈의 눈에 닿은 모양이었다.

그런 일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종종 일어나기도 한다.

촬영 도중에 급히 화장을 수정해야 하고.

배우는 연습을 위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

최서빈 역시 그런 일이 처음은 아닐 텐데, 오늘따라 유독 짜증이 많은 느낌이었다.

“하아, 아직도 멀었어요?”

“다 했습니다. 죄송해요.”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스텝이 현장을 빠져나왔다.

아마 날이 더워진 탓도 있을 것이지만.

아무래도 잦은 NG에 짜증이 난 듯했다.

몇 차례의 NG 끝에, 다음 신 차례가 다가왔다.

“선배님, 더우시죠?”

최서빈과의 독대 신.

나는 그에게 다가가 살갑게 인사하며, 챙겨온 시원한 음료수를 건넸다.

그러자 그는 음료수병을 받아들며 건조하게 답했다.

“고맙다.”

“네.”

차가운 그의 반응에 나는 더 이상 말을 붙일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번 영화에서는 특히 최서빈의 NG가 많았고.

촬영이 길어지면 NG가 줄어들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는 내 말에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서빈 씨랑 희성 씨, 준비됐으면 바로 가볼게요.”

“네!”

조감독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 감독이 메가폰을 쥐었다.

“햇빛이 점점 더 뜨거워지니까, 야외 신 빨리 찍고 실내로 들어갑시다.”

장 감독은 자리에 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레디, 액션!”

주연인 최서빈, 그리고 그의 라이벌 관계인 나는 당연히 악역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번 영화에서 내 얼굴은 시종일관 화가 나 있었다.

아마 활짝 웃는 신이 몇 개 없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슛이 들어가자마자 오늘도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야, 민지훈.”

의자에 앉아 최서빈을 똑바로 바라보며, 빈 종이컵을 잔뜩 구겼다.

그는 내 말에 뒷짐을 진 채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최서빈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직장 선배인 내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

한숨을 억지로 삼켜내며 사과를 표했다.

“죄송?”

그의 억지 사과가 오히려 내 화를 돋우었고.

탄식을 내뱉으며, 들고 있던 구겨진 종이컵을 최서빈의 발 앞으로 던졌다.

“야, 그게 죄송한 태도야?”

그러자 최서빈이 숙였던 고개를 빳빳이 들어 나를 쏘아보았고.

그 숨 막히는 분위기에 현장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최서빈의 눈앞으로 다가갔다.

이글거리는 눈빛.

쌍심지를 켜고 최서빈을 바라보자, 그 역시 눈을 피하지 않았다.

뜨겁게 쏘아대는 햇빛에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마주한 채.

정적이 이어졌다.

그 고요함을 깨는 최서빈의 한마디.

“선배면, 선배답게 행동해.”

“뭐?”

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치켜세웠고.

“가만히 있으니까 당하고 있다고 착각하나 본데…….”

최서빈은 대사를 내뱉다가 스스로 말을 잘라버렸다.

“컷, NG!”

장 감독은 당연히 촬영을 끊었고.

최서빈은 양 주먹을 가슴팍까지 올리며 부들거렸다.

“하, 씨….”

대사가 틀리거나 말이 꼬인 건 아닌 것 같았다.

장 감독은 그의 분노 어린 말을 못 들은 체했고.

눈썹을 들썩이며 미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서빈 씨, 우리 한 번만 더… 가볼까?”

최서빈은 장 감독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켜냈다.

“…예, 가요.”

“그래, 얼른 바로 해볼게요.”

장 감독이 온화한 얼굴로 최서빈을 바라보며 답했다.

“레디, 액션!”

“컷, NG!”

또다시 최서빈에 의한 NG였다.

벌써 이 신만 일곱 번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한 차례도 대사가 틀린 적은 없었고.

그저 최서빈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스스로 촬영을 중단시켰다.

그는 잔뜩 짜증이 올라오는지, 머리를 손으로 헝클며 작게 읊조렸다.

“X발….”

물론 그 작은 소리는 장 감독에게 들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누군가를 향해 내뱉는 욕도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서 내뱉는 화였을 뿐.

장 감독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손짓으로 스태프를 불렀다.

최서빈의 머리가 헝클어졌기에 서둘러 수정하라는 손짓이었다.

그의 사인에 스태프가 뛰어 들어왔고.

김 실장 역시 그들과 함께 현장으로 다가왔다.

“희성아, 여기 물.”

너무나도 더운 찜통 날씨에, 김 실장은 내게 얼음물을 건넸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 물을 받아든 후.

최서빈을 바라보았다.

“선배님, 더우시죠. 이거 드시고….”

평소라면 고맙다며 내 물을 받아들었을 그가, 한껏 얼굴을 찌푸린 채 손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최서빈의 짜증 빈도는 최근 들어 점차 심해졌고.

다가오는 스태프에게도 퉁명스럽게 대해, 현장 분위기는 점점 삭막해지고 있었다.

그걸 느낀 장 감독 또한 기분이 좋지는 않을 터.

주변 스태프들은 최서빈과 장 감독의 눈치를 살피며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컷, 오케이!”

11번의 시도 끝에 받아낸 오케이 사인.

“고생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나자 내 등줄기에는 땀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다음은 실내 신이니까, 잠깐 쉬었다가 시작하겠습니다.”

조감독의 외침에 최서빈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허리를 접으며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보내자, 김 실장이 손 선풍기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희성아, 고생했다. 덥지?”

“어, 날씨가 진짜 덥네.”

나는 목 부분의 옷을 잡고 흔들며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답했다.

“아, 내일 촬영 쉬는 날인 거 알지?”

“맞네. 내일 공휴일이라고 하루 쉬어 간다고 했지.”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 촬영 일찍 끝내고 간단하게 회식한다고 하더라.”

“전체 회식인가?”

“감독님이랑 몇몇 스태프. 그리고 배우들과 한다고 조금 전에 전달받았어.”

회식이라….

요즘 현장 분위기도 조금 다운됐는데, 오히려 회식으로 환기를 시키려는 모양이었다.

중간에 회식을 하면 스태프들이나 배우들과 가까워질 수 있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장 감독과 조감독, 그리고 몇몇 스태프만이 참석했고.

배우들은 최서빈과 박민준, 그리고 오늘 촬영에 참여했던 조연 배우들까지 모두 자리를 채웠다.

간단한 회식이었지만, 생각보다 참여 인원이 많았기에 식당 전체를 가득 메웠다.

“이제 조금만 더 찍으면 절반 아닙니까. 더 힘내서 좋은 결과물 만들어 봅시다!”

“네!”

장 감독은 호탕하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 백만 가봅시다. 파이팅!”

“파이팅!”

무더운 여름.

하루 내내 땀을 흘리며 촬영한 뒤 마시는 첫 잔은 온몸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식도까지 전해지는 소맥의 시원함.

크으.

칙칙했던 현장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어졌고, 화기애애한 대화들이 오가며 술잔을 기울였다.

몇 잔을 들이켜다 보니, 자연스레 장 감독의 테이블에는 배우들이 인사를 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향했다.

“감독님.”

“어, 희성 씨. 오늘 고생 많았어.”

장 감독의 앞에 자리하자, 그는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아닙니다. 감독님이 고생 많으시죠.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하하, 그래. 우리 희성 씨 소맥 타는 솜씨가 또 기가 막히잖아.”

예전 최서빈과 함께했던 술자리에서 내가 탄 소맥을 맛있게 마셨던 장 감독이 그날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다.

“크으, 기억하시네요, 감독님. 맛있게 한 잔 타 보겠습니다.”

“우리 희성 씨는 연기도 잘하고, 노는 것도 잘하고. 못하는 게 없다니까.”

식당에 걸린 커다란 시계.

그 시곗바늘이 몇 바퀴를 돌았고.

식당에 남은 인원수는 처음보다 굉장히 조촐해졌다.

감독을 포함해 대부분의 스태프들이 떠났고.

내가 앉은 구석진 테이블에는 최서빈과 나, 단둘만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한 잔 더 받아.”

“네, 선배님.”

최서빈은 연거푸 마신 술에도 거뜬한지 얼굴색 변화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더 하얘진 것만 같은 느낌.

그는 잔을 앞으로 들었고.

나는 그곳에 술잔을 부딪쳤다.

“크으.”

최서빈은 술잔을 입에 털어 부은 후, 안주도 먹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희성아.”

“예.”

“근데 대본 말이야.”

나는 들었던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귀를 기울였다.

“대본이… 좀 부족한 것 같아.”

“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최서빈이 눈썹을 들썩이며 읊조렸다.

“아쉽다고.”

대본이 아쉽다라….

배우 입장에서 대본이 아쉽다는 건, ‘별로’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것이지.

나는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며 말을 흐렸다.

“…그런가요?”

“어, 연기를 할 때, 자꾸 NG가 나잖아. 대사를 틀린 것도 아닌데?”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래됐으니까, 연기를 하면 딱 알잖아. 근데 이건 대본이 조금… 그렇지 않나 싶어.”

최서빈의 말에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첫 촬영에서도, 그리고 지금까지의 촬영에서도.

NG를 수없이 내던 최서빈은 그 이유가 대본이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한 정답이 아니었다.

나는 그와 배역의 색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배역을 소화하려다 보니,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해서 나온 NG였다고 느꼈지.

그런데 최서빈은 그저 모든 걸 시나리오 탓으로만 돌리고 있는 모습.

최서빈이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말을 이어갔다.

“대본이 조금만 더 좋았어도 괜찮았을 텐데. 아쉽다, 아쉬워.”

나는 그가 들고 있던 술병을 받아들고 술을 따라 부었다.

내 술잔을 받은 최서빈은 고개를 들고 내게 물었다.

“희성이 네 생각은 어때?”

시나리오에 문제가 없다고 느끼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최서빈이 대선배이기도 하고.

또 그의 의견에 부정한다는 건, 최서빈에게 대본 보는 눈이 없다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하지만 무조건 맞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건 함께 시나리오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들릴 터.

나는 그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들어봐, 내가 연기 생활이 벌써….”

그는 내 의견을 재차 묻지 않은 채, 자신의 꽉 막힌 답답함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구태여 반대를 하거나 긍정하지도 않으면서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어쨌든 최서빈은 내 연기를 알아봐주고, 나를 위해주는 선배였다.

더군다나 이번 영화에서 함께하기 위해 장 감독까지 소개해 주었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최서빈에게 고마운 마음이 가득했고.

그의 불평불만을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 그를 위한 것이라면, 얼마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최서빈의 편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술잔을 연이어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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