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56)화 (56/303)

56화 #12 –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5)

쓰읍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컷, NG!”

동시에 장 감독의 목소리가 현장에 울려 퍼졌다.

최서빈은 바로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었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최서빈의 대사 실수는 아니었다.

장 감독이 메가폰을 쥔 채 입을 열었다.

“서빈 씨, 좋은데… 영화에 첫 신으로 들어가는 거라, 다시 한번 가봅시다.”

“네, 다시 해 보겠습니다.”

최서빈은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장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디, 액션!”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최서빈의 표정.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하아, 다른 메디컬에 물건을 넣었다는 게 말이 돼?”

“컷!”

장 감독의 외침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음에 들지 않음을 표했고.

이번에도 역시나 대사 실수로 일어난 NG는 아니었다.

“장 감독님이 서빈 씨 연기가 지금 마음에 안 드나 봐.”

김 실장은 불쑥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고.

“원래 이런 경우가 많아. 대본 리딩 때 보통 톤이나 어조를 잡기는 하지만, 초반에 또다시 잡아줘야 하는 게 일반적이거든.”

“아….”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내가 느끼기에도 최서빈의 톤이 대사와 어울리진 않았다.

뭐랄까.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니다.

분명 발성도 좋고, 호소력도 좋다.

하지만 문제는 주연인 민지훈 역과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장 감독의 말에 최서빈은 한숨을 삼켜내는 듯 보였고.

그런 그를 향해 장 감독이 입을 열었다.

“서빈 씨, 톤을 조금 바꿔보면 좋을 거 같은데.”

“예, 다시 해 보겠습니다!”

“그래. 바로 가볼게요.”

장 감독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내려다 다시 앉으며 외쳤다.

“레디, 액션!”

재차 이어지는 촬영.

짧은 대사 세 줄이었지만, 수차례의 NG가 반복됐다.

“컷컷!”

장 감독이 한숨을 내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 서빈 씨, 그 톤이 아니지. 다시!”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최서빈의 굳은 표정.

그와 함께 연기하면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항상 자신의 연기에 자신만만하던 사람이었으니까.

나 역시 재차 NG를 내는 그를 바라보며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촬영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쉬었다가 다음 신 들어가겠습니다.”

조감독의 한마디로 현장은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자리로 움직였다.

최서빈의 세 줄짜리 첫 신은 무려 13번의 트라이 만에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다.

고사를 지낸 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촬영이 시작됐지만.

주연인 최서빈의 신이 겨우 오케이를 받았다는 것이 퍼지자, 배우들을 포함해 스태프들까지 긴장감에 휩싸였다.

단순히 초장에 기세를 잡기 위함은 아닌 듯 보였다.

그저 최서빈이 주연 캐릭터에 맞춰가는 시간이 걸렸을 뿐.

그런 것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12번의 NG, 13번의 촬영이 현장의 모두를 긴장케 하였다.

“수고하셨습니다.”

현장에서 걸어 나오는 최서빈을 향해 고개를 숙였지만.

그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화답하고는 자신의 차로 이동했다.

다음 신은 최서빈과 나의 투 샷 촬영.

그런 최서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서둘러 대본을 펼쳐들었다.

대사를 내뱉는 첫 신이기에, 되도록 한 번에 OK 사인을 받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NG 횟수가 조금이라도 줄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연기할 배역인 최 대리와 내가 잘 어우러졌으면 했으니까.

이미 다 외운 대사였지만 쉬는 시간 내내 눈을 감고 복기했다.

“슛 들어가겠습니다!”

스태프의 외침에 차분히 심호흡을 한 뒤에, 들고 있던 대본을 김 실장에게 내밀었다.

“잘하고 와.”

그의 응원에 나는 말없이 미소를 보였다.

떨리는 마음을 겨우 눌러내며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장 감독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메가폰을 들었다.

“서빈 씨는 마지막 했을 때처럼 그 톤을 살려서 해주면 돼.”

최서빈은 그의 말에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희성 씨는… 우선 한번 가보자고.”

장 감독의 말에 진희성 역시 굳게 다짐한 얼굴로 머리를 주억거렸다.

“예.”

그는 의자에서 등을 떼고 모니터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메가폰에 입을 가져다 댄 채 외쳤다.

“레디, 액션!”

빨간 불빛이 들어온 카메라.

그와 동시에 최서빈과 진희성의 눈빛이 돌변했다.

카메라 한 대가 최서빈의 얼굴로 줌 인된 순간,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최 대리님, 이거 대리님이 한 짓이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희성이 순식간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뭐?”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진희성의 표정 연기.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그 차가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살기가 가득 어린 눈빛이 좌중을 압도했다.

“너 방금 ‘짓’이라고 했냐?”

진희성이 소리를 지르지 않은, 낮은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 바닥에 깔렸다.

그 목소리는 오히려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최서빈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진희성에게 들이밀었다.

“이거 보시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십니까?”

진희성은 굳은 얼굴로 최서빈이 들고 있는 종이를 쏘아보았다.

자신의 사인이 적힌 서류.

진희성은 마른침을 삼켜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이게 뭐!”

오리발을 내미는 그의 행동에 최서빈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고.

그의 반응에 진희성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이 자식이 선배 앞에서 웃어?”

진희성은 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서빈이 들고 있던 종이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종이를 연신 구겨 발로 짓밟았다.

“컷!”

장 감독의 외침에 최서빈과 진희성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애매한 장 감독의 표정.

만족스럽지도, 그렇다고 불만족스럽지도 않은 듯한 얼굴.

“…….”

장 감독은 잠시 모니터를 바라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현장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최서빈과 진희성, 둘 중 그 누구도 장 감독을 향해 묻지 않았다.

이 정적의 의미에 대해.

장 감독이 쓰읍 소리를 내며 고요함을 깨트렸다.

“음… 우리 다시 한번 가보자.”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현장에 서 있던 최서빈과 진희성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네.”

“둘 다 연기는 괜찮았는데, 배역 느낌을 조금만 더 살려볼게요. 레디, 액션!”

이후 몇 차례의 트라이 만에 장 감독은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장 감독이 메가폰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대본을 든 채, 현장에 있는 그들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빈 씨, 톤은 이제 방금 했던 그대로 이어가면 될 것 같아.”

“네, 저도 이번 톤이 배역에 가장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장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살짝 민지훈 역과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거든?”

“예, 어떤 부분이….”

최서빈과 장 감독은 대본을 가운데에 둔 채, 열띤 토론을 펼치듯 대화를 나눴다.

진희성은 그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이내 장 감독이 진희성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희성 씨도 최 대리 역의 그 비열한 표정. 그리고 서빈 씨를 바라볼 때 무시하고 멸시하는 느낌을 조금 더 표현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다음 신도 방금처럼, 아니 조금 더 잘 표현해 보자고.”

그는 미안하다는 듯 덧붙였다.

“첫날이라, 확실하게 잡고 가는 거라… 많이 트라이해도 이해 좀 해줘.”

최서빈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대본 리딩 때 워낙 급하게 끝나서 어쩔 수가 없었어. 알지?”

장 감독의 말에 최서빈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장 감독은 그들을 격려해주듯 말한 뒤, 어깨를 두드렸다.

“다음 신으로 바로 가볼게요. 레디, 액션!”

진희성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최서빈을 쓰윽 훑었다.

그러다 최서빈을 향해 경멸하는 눈빛을 쏘아내자, 카메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아무런 대사가 나오지 않았지만.

그 눈빛, 흔들리는 입꼬리만으로도 카메라에 담길 장면이 넘쳐났다.

“네가 내 허락도 없이 모던 정형외과를 갔더라?”

진희성은 최서빈을 향해 소리치고, 안면 근육을 파르르 떨었다.

“그건… 아니, 제가 최 대리님 허락을 맡고 움직여야 합니까?”

그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내뱉었다.

최서빈의 말에 진희성은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식 봐라?”

진희성은 배를 내밀고 최서빈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너, 내가 이 바닥에서 입 열면 다시는 발도 못 딛게 돼. 알아?”

당차게 소리친 진희성의 목소리는 무언가 켕기는 게 있는지 잘게 떨려왔고.

그 완벽한 묘사에 장 감독은 흡족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진희성, 제법인데?’

“저희 라이벌 아니고, 같은 회사 식구입니다.”

최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진희성에게 소리쳤고.

“…식구 같은 소리 하네.”

진희성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최서빈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카메라를 응시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카메라와 아이 컨택이 몇 초간 이어졌고.

“컷, 오케이!”

이내 장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하지만 장 감독의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았다.

무언가가 찜찜한 듯한 얼굴.

비단 장 감독만의 고민은 아닌 듯 보였다.

최서빈과 진희성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분명 대본에 나온 내용 그대로 연기는 완벽히 소화해냈다.

지문도 잘 이행됐고, 두 명의 톤 또한 완벽했지.

그러나 그 미묘한 문제점을 모두 캐치하지는 못했다.

최서빈은 입술을 말아 넣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고.

진희성은 최서빈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데시벨을 낮춘 채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희 다시 한번 찍어도 되겠습니까?”

그의 질문에 최서빈은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러자.”

그리고 최서빈은 곧장 장 감독을 향해 소리쳤다.

“감독님, 죄송한데 이번 테이크 다시 가도 되겠습니까?”

최서빈도 진희성과 같은 마음이었다.

이번 신에서 좀 그렇다 할 만한 문제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연기력이 100% 나오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 그럼 다시 가볼게.”

장 감독이 답했고.

최서빈은 진희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다시 가보자.”

***

탁.

조수석에 올라탄 박민준은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최서빈과 진희성이었다.

창문이 모두 닫혀 있음에도 그들의 대화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굳이 대화 내용을 듣지 않아도 웃고 장난치며 신이 난 것쯤은 알 수 있었으니까.

선배인 최서빈이 진희성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주무르는 모습.

저 광경 하나만으로도 둘이 가까운 관계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 최서빈에게 음료수 뚜껑을 열어 내미는 진희성의 손짓.

박민준은 그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그들의 호칭은 선배님, 후배님이었다.

그러나 하는 행동들은 마치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형, 동생 같은 느낌.

“하아.”

박민준은 홀로 있는 차 안에서 긴 한숨을 내뱉었다.

분노에 차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회사 선배인 최서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게, 자신이 아닌 진희성이라는 사실에.

부러우면서도 질투가 어린 마음이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툭 내뱉었다.

“나도 저런 선배 하나 있으면, 진짜 잘할 수 있는데….”

탁.

그때 운전석 문이 열리며 매니저인 정명철 실장이 차에 올랐다.

“민준아, 뭐 보고 있어?”

“아, 별거 아니야.”

정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박민준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박민준은 황급히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이건 뭐야?”

그가 내민 것은 조수석에 올려져 있던 서류 하나.

정 실장이 시선을 서류로 옮겨왔다.

“그거 이번에 새로 들어온 드라마 대본이야.”

“아니, 이걸 여기에 들고 오면 어떻게 해.”

박민준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정 실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 안 들키면 되지.”

그는 박민준 손에 들린 대본을 잡으며 말했다.

“다음 작품으로 이거 어때? 이 드라마 진짜 괜찮아.”

정 실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민준이 눈을 반짝거리며 대본을 바라보았다.

“…그래?”

“응, 백현성 감독에 최나현 작가야.”

“뭐?”

박민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 감독에, 최나현 작가면… 진짜 대박이잖아!”

“그럼. 지금 주연 배우 찾고 있대.”

박민준의 눈썹이 들썩였다.

“오디션?”

“아니. 직접 캐스팅할 거 같은데, 아직 프리프로덕션. 본격적으로 배우 찾는 것도 아니고, 시기가 좀 남았어.”

“대충 언제쯤인데?”

정 실장이 눈동자를 굴리며 답했다.

“아마 우리 이 영화 끝날 때쯤, 그때 본격적으로 제작할 것 같아.”

박민준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 정도 작감 라인이면 훌륭하지.”

그는 대본 첫 장에 써진 작가와 감독 글자를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당연하지. 미리 한번 봐보고 괜찮으면 작업 좀 쳐둘게.”

그의 말에 박민준이 확신에 찬 얼굴로 답했다.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당장 작업 들어가.”

“오케이, 회사 통해서 한번 해볼게.”

박민준은 손으로 대본을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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