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12 –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2)
“혹시… 괜찮겠어?”
임 감독이 조심스레 물었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되물었다.
“근데 그쪽에서는 뭐래요?”
“누구, 찬성 씨?”
임 감독은 눈썹을 치켜세웠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찬성 씨는 희성 씨랑 같이 팬 사인회하는 거 신경 안 쓰인다고 하더라.”
임 감독이 전한 강찬성의 어이없는 반응에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참아냈다.
강찬성이 현장에서 내게 보였던 태도를 생각하면, 나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는데.
괜한 자존심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날 보며, 임 감독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치익.
라이터를 통해 불이 붙은 담배는 그의 들숨으로 인해 연초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뽀얀 담배 연기를 내뿜던 임 감독이 시선을 내게 옮겨왔다.
“희성 씨는?”
“네?”
“희성 씨는 찬성 씨랑 하는 거 괜찮냐고.”
사실 강찬성과 일정을 함께해야 한다는 게 그다지 기쁘진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싫은 쪽에 가까웠지.
이제 드라마 촬영도 끝났기에, 그를 다시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겹친 사람이 하필 강찬성일 줄이야.
강찬성이 떼를 부리며 일정을 바꿔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여기서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임 감독은 내 의견을 듣기 위함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통보를 하려고 부른 것일 테니까.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풀며 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금 불편하기는 합니다.”
내 말에 임 감독은 시선을 애써 피하며 담배를 물었다.
“그러면?”
“그런데 일이니까요. 괜찮습니다.”
내 대답에 그는 그제야 입꼬리를 올렸다.
“가능하겠어?”
“예, 해야죠.”
임 감독은 물고 있던 담배를 밟아 꺼버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연기를 모두 내뿜은 뒤,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희성 씨. 좀 불편해도 마지막 드라마 일정이니까 잘 좀 해줘.”
“네.”
“아직 우리 마지막 회 방송 전이잖아. 팬 사인회 잘하고, 마지막 시청률까지 힘내보자고!”
“예, 알겠습니다.”
임 감독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강찬성과의 팬 사인회라….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
몇 시간의 회식이 이어진 끝에.
자정이 되어서야 자리가 마무리되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다들 조심히 가고, 곧 만납시다.”
식당 앞에 나와 있던 김 실장이 손을 들어 나를 반겼다.
서둘러 차에 올라타자, 그는 내게 숙취 해소제를 건네며 말했다.
“이거 마셔.”
“고마워, 형.”
숙취 해소제를 입에 털어 부었고.
운전석에 앉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형, 우리 팬 사인회 일정 들었어?”
그가 룸 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안 그래도 너 임 감독님이랑 나갔을 때, 조감독님이 말해 주시더라.”
“그래?”
“응, 강찬성이랑 일정이 겹쳤다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김 실장의 입을 통해 다시 한번 듣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 근데 나랑 강찬성 둘만 가는 거야?”
“그건 아니고. 주연들이랑 인기 조연 몇 명씩 묶어서 간다더라.”
“아… 근데 하필 나랑 강찬성이 묶였네.”
김 실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희성아, 저번에 내가 보여줬던 거 기억나?”
“어떤 거?”
그는 자신의 휴대 전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기사랑 시청자 게시판 캡처해뒀던 거.”
지난번 시청자 게시판과 기사에 도배되었던 강찬성과 내 케미에 대한 것을 말하는 모양이다.
나는 단번에 캐치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기억나.”
“아무래도 너랑 강찬성 케미가 좋았던지라, 동선상 둘이 계속 묶일 거 같더라고.”
“아이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쉽지 않겠는데.”
“그래도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은 둘의 케미에 환호하니까.”
“그러게 말이야.”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강찬성과 엮이는 게 껄끄럽기는 했지만.
내 인생에 처음 있는 팬 사인회.
걱정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벅차왔다.
물론 오는 이들이 전부 내 팬은 아니겠지만.
그중 일부는 내 팬도 있을지 모르니까.
누군가가 내 연기를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떨려왔다.
그런 존재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으니까.
“형, 근데 팬 사인회에서 뭐 해야 하는 거야?”
나에게는 팬 사인회가 처음이지만, 매니저 일을 오래한 김 실장에게는 흔했던 행사 중 하나일 터.
“장기 자랑 같은 거 하는 곳도 있는데, 그건 주연급에서만 할 거야.”
“아… 그럼 나는?”
“너는 그런 것까지는 안 해도 되고.”
김 실장은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이어갔다.
“드라마 관련해서 MC가 물어보면 잘 대답하고, 사인할 때는 그냥 팬 서비스만 잘하면 돼.”
“맞다, 사인!”
팬 사인회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인이다.
단역 시절, 주변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사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단역 배우는 내게 진지하게 조언을 했다.
‘유명하지 않을 때부터 사인을 만들어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사인을 요청했을 때, 그저 이름을 정자로 써줘야 할 테니까.’
당시에는 그 단역 배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썩 와닿지는 않았다.
내가 언젠가 누군가에게 사인해줄 날이 오기는 할까?
그 시절에는 한 드라마에 지나가는 단역 배우로 한 신을 나오기조차 힘들었을 때니까.
하지만 꼭 성공할 거라는 다짐으로 사인을 만들어 두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사인… 그때 만들어두길 잘했네.”
***
“서빈아.”
최서빈의 매니저 배태헌 실장이 그에게 다가오며 종이를 내밀었다.
“네가 달라고 했던 영화 출연진 정리한 거.”
최서빈은 앉은 자리에서 그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었다.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 작품 말하는 거지?”
“맞아.”
배 실장은 그의 앞에 의자를 당겨 앉으며 입을 열었다.
“방금 연락받은 출연진 최종인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서빈이 종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야, 출연진 바뀌었어?”
“어, 안 그래도 그거 말해주려고 했어.”
종이에 시선을 고정한 최서빈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
주연 : 최서빈
주연 : 박나연
조연 : 박민준
조연 : 진희성
.
.
.
“형, 이게 뭐야, 박나연?”
“응, 이번에 바뀐 게 박나연이야.”
최서빈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배 실장을 바라보았다.
“아니, 당장 다음 달 촬영 아니야?”
그의 말에 배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크랭크 인 임박한 시점에 왜 바뀌어?”
최서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재차 입을 열었다.
“원래 여주가 조혜민이었잖아.”
아무도 없는 회의실.
배 실장은 조용한 회의실 안에서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입을 열었다.
“근데 조혜민이 이번에 사고 쳤대. 아마 기사도 곧 뜰 거야.”
“무슨 일인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서빈에게 몸을 당겨 말했다.
“어, 음주 운전했다고 하더라. 곧 기사도 나갈 거라 급하게 바꿨대.”
배 실장의 말에 최서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거 불길하네….”
최서빈의 표정에 배 실장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래도 촬영 들어가기 전에 차라리 이게 낫지.”
“그렇긴 하지만. 박나연이라….”
바뀐 주연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최서빈은 계속해서 출연진 종이를 바라보았고.
그 모습에 배 실장이 그에게 물었다.
“혹시 박나연, 무슨 문제 있어?”
그의 질문에 최서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뭐, 박나연이 연기 잘하는 건 워낙 유명하니까. 괜찮겠지.”
“그럼, 박나연 유명한 연기파잖아.”
최서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는지, 숨을 길게 내쉬며 ‘박나연’이 적힌 글씨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읊조렸다.
“근데… 뭔가 완성된 그림이 안 그려지네.”
***
“희성아, 다 도착했어.”
김 실장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차량이 도착하기 전부터 북적거리는 소리에 잔뜩 긴장한 채 앉아 있었으니까.
긴장되는 마음과 설레는 마음이 공존한 채로 이날을 기다렸다.
팬 사인회.
입구부터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에 아래턱이 자연스레 벌어졌다.
“우와, 이게 다 오늘 팬 사인회 온 사람들이야?”
선팅이 진한 차였기에, 나는 창문에 얼굴을 붙여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김 실장은 웃으며 답했다.
“어, 사람 진짜 많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재차 창밖에 있는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들은 입구로 들어서는 차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차는 안내 요원의 지시를 받으며 천천히 앞으로 향하고 있었고.
나는 길게 늘어선 줄의 사람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부 내 팬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내가 함께 완성한 ‘연예계 엑스트라’ 작품을 재미있게 본 팬들일 것이다.
더운 날씨에도 나를, 우리를 보기 위해 먼 걸음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이 넘칠 듯이 가득했다.
배우로서 사랑을 받는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심장이 쿵쾅거리고 가슴이 웅장해졌다.
숨을 천천히 마시고 내쉬었다.
“희성아, 떨려?”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너 하나만을 보려고 왔다는 게, 신기하지?”
“응, 물론 나 보러 온 팬분들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분은 날아갈 것 같네.”
김 실장은 룸 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따스한 눈빛은 떨리는 내 마음을 진정시켜 주려는 듯 보였다.
“앞에 다른 배우들 차가 밀려서, 우린 좀 천천히 들어갈 거야.”
“알겠어.”
김 실장은 이내 시선을 앞으로 돌렸고.
나 역시 고개를 돌려 재차 창밖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차가 앞으로 조금 움직이니, 그제야 보이는 몇몇 사람들 품에 들고 있는 피켓들.
창문에 얼굴을 붙인 채 눈에 힘을 주고 피켓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모습과 글자가 선명히 보이나, 그들에게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터.
피켓들의 글씨를 바라보니, 역시나.
강찬성의 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를 향한 문구들이 수두룩했고.
몇몇 팬들은 강찬성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까지 입고 있었으니까.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강찬성을 떠올렸다.
그래.
원래 시청자들이 배우의 인성을 알 리가 없으니까.
TV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 그의 모습이 다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겠지.
저렇게나 좋아해주는 팬들이 많은데, 강찬성은 참….
떠오르는 강찬성의 인성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선을 돌리던 그때,
“…어!”
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는 팬이 보였다.
내 소리에 김 실장이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저기에 내 팬도 있나 봐. 내 이름 적힌 피켓을 들고 계셔!”
고조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고.
김 실장은 웃으며 답했다.
“뭐라고 적혀 있는데?”
“진희성… 나랑 결혼하자. 하하.”
나는 피켓의 글씨를 따라 읽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결혼하재?”
“응, 그렇게 쓰여 있네.”
김 실장이 놀란 듯 입을 벌렸다가 너스레를 떨듯 답했다.
“이야, 신부 생겼네. 축하한다.”
“그러게.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고. 좋아해 주신다니까 뭉클하네….”
손가락으로 피켓들을 가리키며, 천천히 그것들을 읽기 시작했다.
간간이 보이는 내 이름들은 심장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를 좋아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목이 메어왔다.
“흠흠.”
메이는 목을 풀며 긴장을 풀어내던 그때.
저 멀리에 보이는 피켓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강찬성X진희성 성성라인♡’
‘성성즈 영원해라’
그 피켓에는 나와 강찬성의 투 샷 사진이 커다랗게 붙어 있었고.
주변은 하트로 도배되어 있었다.
강찬성와 나의 케미라….
참 미묘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