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52)화 (52/303)

52화 #12 –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1)

“희성아, 왔어?”

겨우 3시간 남짓 잠을 잔 뒤.

딱 붙은 눈을 겨우 떼어내며 도착한 차.

김 실장이 커피를 들어 보이며 인사를 보냈다.

“커피 고마워.”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뒤 그에게 물었다.

“형, 피곤하지?”

12시가 훌쩍 넘어 도착한 집.

그리고 겨우 몇 시간이 지나 새벽에 다시 만났기에, 그 역시 피곤할 터.

내 말에 김 실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야 현장에서는 쉬잖아. 희성이 네가 피곤하지. 가는 길이라도 눈 좀 붙여.”

그의 배려 있는 말에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하지만 휴식도 잠시.

드라마 촬영이 막바지로 향했기에, 촬영 분량이 넘쳐나는 요즘이었다.

눈을 붙일 새도 없이 부릅뜬 눈으로 대본을 펼쳐 들었다.

생방송처럼 대본이 실시간으로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추가로 나오는 대본이나, 수정되는 부분이 조금씩 있기에.

현장에서 실수가 나오지 않으려면 연습은 멈출 수가 없었다.

커피를 내려놓으며 대본을 펼치자, 김 실장이 룸 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그의 부름에도 나는 대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답했다.

“응?”

“어제 드라마 끝나고, 시청자 게시판 난리더라.”

김 실장의 말에 들고 있던 대본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리라는 말에 혹시나 무슨 일이 터진 건가 싶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 실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휴대 전화를 내게 내밀었다.

그가 건넨 휴대 전화에는 시청자 게시판 창이 열려 있었고.

내용은 나와 강찬성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강찬성이랑 진희성 케미 미쳤다!

-둘이 한 신에 잡히기만 해도 올라가는 내 입꼬리 어쩔 거야.

-희성이 다음 드라마도 강찬성이랑 찍으면 왜 안 돼?

-찬성X희성 라인에 코인 태웁니다~

└‘성성라인’ 만차인가요?

└성성라인 타려면, 번호표 뽑으셔야 합니다!

나는 게시판을 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나랑 강찬성. 성성라인으로 묶어서 팬덤이 생긴 거 같은데?”

내 말에 김 실장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맞아. 그리고 기사도 났더라.”

“기사까지?”

“응, 거기 휴대 전화 사진첩에 캡처해 뒀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진첩을 클릭하니, 뜨는 기사.

-‘연예계 엑스트라’ 강찬성X진희성 매니저와 연예인 역의 미친 케미↑

드라마에서의 강찬성과 내 관계에 몰입한 시청자들.

강찬성만 떠올리면 미간이 찌푸려졌는데, 드라마 연기에서는 그게 티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뿌듯하면서도 여러 감정이 공존했다.

“진짜 무대 뒤는 모른다는데….”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

“그만큼 연기를 잘해서 케미가 좋아 보였다니까 다행인 거지.”

김 실장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런 건가?”

“응, 둘이 사이 안 좋은 게, 연기에 하나도 묻어나오지 않았잖아.”

그의 말에 대답 대신 미소를 보였고.

이내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다시 대본을 집어 들었다.

극 중 케미로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물론 나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강찬성을 압살할 만큼의 연기 실력을 가졌다는, 그런 말을 더 듣고 싶었으니까.

***

외투 따위는 필요 없어진 맑은 하늘.

드라마 촬영이 시작한 지 어느새 3개월을 꽉 채웠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드라마의 마지막 촬영 달.

그러니까 이번 달은 드라마와 영화를 병행해서 촬영해야 하는 달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세트장 건설 문제의 이유로 촬영 시작이 지연되었고.

그런 일은 내게 불행이 아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지.

그 덕에 힘들게 병행하는 일은 없어졌으니까 말이다.

“그럼 영화 촬영은 언제부터 시작인 거야?”

김 실장에게 묻자, 그는 스케줄을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또 밀리지 않는다면, 아마 다음 달에 대본 리딩부터 시작할 거야.”

“응, 그럼 드라마 끝나고 거의 바로 시작이겠네.”

김 실장은 내 걱정을 하는 듯한 얼굴로 코를 찡긋거렸다.

“어, 드라마 찍느라 고생했는데, 얼마 쉬지도 못하고 바로 촬영하겠네.”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하는 김 실장에게 나는 손사래를 치며 미소를 지었다.

“에이, 원래는 병행하는 거였잖아. 오히려 잘됐지.”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고마울 게 뭐가 있어. 오히려 내가 두 작품 모두 하고 싶다고 욕심을 부려서 형이 고생이지.”

김 실장은 내 말에 눈썹을 들썩이며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더 열심히 해보자, 희성아.”

“그래. 앞으로 더 바빠져야지, 우리!”

김 실장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그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아, 맞다!”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치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바라보았다.

“왜, 무슨 일 있어?”

“아침에 시청률 확인했거든.”

드라마 막바지 촬영에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터라, 전날 방영한 방송은 전혀 보지도 못했다.

잠을 잘 시간조차 없었으니까.

“얼마 나왔게?”

그의 말에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켜냈다.

초반 시청률은 3.7%로 시작했고, 차차 오르는 추세였다.

하지만 마음처럼 따라와 주지 않는 게 시청률인 것을 알기에.

나는 한껏 상기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김 실장이 눈썹을 들썩였다.

“대충 예상되는 시청률 없어?”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예상하는 시청률….

사실 예상이라기보다는 희망이란 말이 더 적합하지만.

눈을 찡긋거리며 조심스레 데시벨을 올렸다.

“한 4% 정도 나오면 좋기는 하겠는데.”

내 말에 김 실장은 누가 봐도 놀란 얼굴로 입을 동그랗게 모으며 공기를 빨아들였다.

“왜?”

그의 표정에 덩달아 놀란 나는 심각해진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어제 방송이 4.6%야. 4%를 넘었어.”

“와아, 진짜로?”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차가 울리도록 소리쳤다.

“대박인데?”

“그러게. 이 정도면 진짜 잘 나온 시청률이야.”

김 실장과 나는 양 손뼉을 부딪쳤다.

그는 광대가 터질 듯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기세대로, 5% 돌파해서 마지막 회는 6% 넘었으면 좋겠다.”

그가 내뱉은 숫자에 흥분되기 시작했다.

동 시간대의 쟁쟁한 드라마들이 즐비했고, 그 가운데서 6%를 받을 수 있을까?

내심 기대감을 키우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잘됐으면 좋겠다.”

***

방영될 몇 화만을 남겨둔 채.

현장에서는 최종회의 마지막 신.

그 장대한 막을 먼저 내리게 되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박수와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몇몇 스태프와 배우들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나 역시 가슴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드라마든 영화든 항상 시작과 끝이 분명히 존재한다.

촬영에서는 내가 맡은 배역에 대해 완벽히 파고들어 가 그 인물과 하나가 되어야만 진정한 연기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노력과 연습으로 배역에 빠져드는 것이지.

긴 시간 끝에 마지막 촬영을 하고 나면, 이별을 하게 된다.

함께 고생한 스태프들과 배우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의 배역과도 이별을 맞이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물론 그 배역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힘든 건 사실이지만.

아쉬움과 애틋함은 남겨 두더라도 그 배역에서는 철저히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또 다른 배역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오늘도 소중했던 작품에서의 ‘나’와 또 하나의 이별을 맞이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른 아침에 마지막 신을 촬영한 뒤.

곧바로 오늘 저녁.

종방연 자리에 참석했다.

이후 많은 배우들의 스케줄이 빼곡하게 있기에, 함께 모일 수 있는 날은 오늘뿐이었기 때문이다.

단 한 명도 빠진 이가 없이 종방연은 시작됐고.

시끌벅적한 식당에서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어, 여기 자리 없어요?”

화장실을 다녀온 듯한 한소정이 내 앞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술자리가 시작된 뒤, 몇 번이고 옮겨진 자리였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앉으셔도 돼요.”

그녀는 자리에 털썩 앉으며 힘들다는 듯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도 그럴 것이 오전까지 촬영을 하고 왔기에,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정 씨, 술 많이 드셨어요?”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어제도 잠을 못 자서, 좀 피곤해서요.”

“촬영 끝나고 종방연 오기 전에 안 쉬다 오셨어요?”

“네, 인사하고 정리하다 보니까 저녁 시간이더라고요. 희성 씨는요?”

그녀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였다.

“저도요. 쉬다가 오려고 했는데, 회사 들어갔다 오니까 그럴 시간도 없더라고요.”

그녀와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나저나 이번 드라마도 진짜 고생하셨어요.”

“희성 씨도 고생 많으셨어요. 그래도 희성 씨 스타일리스트도 해보고, 배역이 너무 재밌었어요.”

한소정은 극 중 내 스타일리스트 역을 맡았기에, 유독 촬영장에서 나와의 독대 장면이 많았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와 이야기를 자주 나눌 수밖에 없었지.

그녀는 술잔을 들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이번 드라마 촬영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는데, 그래도 꽤 좋았던 것 같아요.”

나는 한소정을 따라 술잔을 들었다.

“맞아요. 드라마를 찍으면서 현장에서도 배우는 게 많았고요.”

“저 조연급은 처음이라, 받는 대우도 다르고… 아무튼 너무너무 좋았어요!”

그녀는 활짝 웃으며 들고 있던 잔을 내 술잔에 부딪쳤다.

“짠!”

우리는 동시에 술잔을 털어 부었고.

그녀는 안주를 먹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아, 그거 기억나요?”

한소정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기도 전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번에 5화 촬영이었나?”

그녀는 손뼉을 부딪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희성 씨랑 찍었던 신에서 NG 났을 때….”

한소정이 박장대소하며 내게 조잘조잘 이야기를 쏟아내던 그때.

순간 따가운 시선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저 멀리 보이는 강찬성의 싸늘한 얼굴.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 한소정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곁눈질로 그를 쳐다보자, 내 눈빛을 느낀 강찬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고.

자리에서 겉도는 듯한 그의 모습에 나는 조소를 지으며 시선을 한소정에게 옮겨왔다.

눈웃음을 활짝 지으며 이야기하던 한소정은 내 눈길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고는 자신을 바라보던 강찬성을 확인하고 다시금 내게로 고개를 돌려세웠다.

한소정이 앞에 앉은 내 쪽으로 몸을 들이밀며,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희성 씨.”

“네?”

그녀는 침을 한 번 삼켜낸 후, 데시벨을 한껏 낮췄다.

“실은 저… 강찬성 씨가 밖에서 같이 밥 먹자고 한 적이 있어요.”

“정말요?”

그녀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몸을 테이블 쪽으로 당겨 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재빠르게 끄덕이며 말했다.

“네, 연기 알려준다고 따로 보자는 거예요.”

한소정의 말에 내 얼굴은 자연스레 일그러졌다.

그리고 서둘러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래서요?”

“근데 제가 그날 약속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거절했죠.”

“아… 잘했어요.”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잘했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뻔히 보이는 강찬성의 마음.

사적인 만남에서 연기까지 알려준다는 게, 어찌 순수한 마음이겠는가.

그런 강찬성의 태도에 절로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한소정은 내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더니 이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참, 저 이번에 조연 러브콜 들어왔어요!”

“오, 축하드려요. 무슨 조연이에요?”

그녀는 등을 꼿꼿이 세우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무려 지상파 드라마요.”

“진짜 축하해요, 소정 씨.”

한소정은 헤실거리며 몸을 움직였고.

곧장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 씨는 다음 일정 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저는 영화 하나 시작하기로 했어요. 곧 대본 리딩 들어가거든요.”

“와, 대박!”

한소정은 자신의 일인 것처럼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진짜 잘됐다. 축하해요, 희성 씨.”

“고마워요.”

한소정은 다시 한번 술잔을 들었고.

우리는 서로를 위한 축배를 부딪쳤다.

한소정을 처음 만난 건, 첫 단막극에서부터였다.

그녀와 나 모두 신인 시절이었고.

왠지 한소정과는 같이 성장하는 느낌이다.

바닥부터 함께 차근차근 필모를 쌓아가는 좋은 동료가 생긴 것 같은 마음이 들었고.

나도 모르게 항상 그녀를 응원하게 되는 것 같다.

진심을 다해.

“둘 다 여기 있었네?”

술잔을 내려놓자마자 임 감독이 우리 테이블에 몸을 기대었다.

“네, 감독님.”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턱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한소정이 없는 자리에서 내게 따로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식당 앞으로 나섰다.

임 감독은 식당을 나오자마자 몸을 벽에 기대며 입을 열었다.

“희성 씨.”

“예, 감독님.”

그는 쓰읍, 소리를 내며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그를 바라보았고.

임 감독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드라마 종영 기념으로 팬 사인회를 열게 되었거든.”

그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앗, 정말요?”

“응, 사인도 하긴 하지만, 사실상 팬 미팅에 가깝다고 보면 돼.”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 좋은 소식을 왜 조심스레 전달하는 거지?

거기다가 임 감독은 은연중에 내 눈을 피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결정되고 나서 말하기가 영 미안한데….”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팬 사인회를 따로 진행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일정상 희성 씨가 찬성 씨와 함께해야 될 것 같더라고.”

“…예?”

임 감독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괜찮겠어?”

하필.

일정이 잡혀도 이렇게 거지같이 잡힐 수가.

이거 아주 머리 아프겠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