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11 –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 (8)
“레디, 액션!”
메가폰 너머로 울려 퍼지는 임 감독의 목소리.
현장은 그의 한마디에 언제 시끌벅적했냐는 듯 고요해졌다.
진희성과 강찬성은 서로를 마주 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누구 하나도 대사를 내뱉지 않았지만, 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차디찬 기운이 스태프는 물론이고 카메라에까지 전달되고 있었다.
빨간 불빛이 선명한 한 대의 카메라가 진희성의 눈을 클로즈업했고.
또 한 대의 카메라는 강찬성의 불끈 쥔 주먹을 잡았다.
숨이 막힐 듯한 팽팽한 긴장감.
카메라는 돌고 있었지만, 몇 초 동안이나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빛으로 신경전을 주고받고 있을 뿐.
그 누구도 섣불리 숨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카메라에 잡힌 그들의 눈빛 연기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 왔으니까.
그때.
강찬성이 고요한 정적을 깨트리며 탄식을 내뱉었다.
“하아, 진짜.”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희성은 눈썹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입을 열었다.
“형, 자꾸 그런 식으로 일할래?”
진희성의 불만 어린 말투에 강찬성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강찬성이 쥐고 있던 주먹은 터질 듯 부들거렸고.
이를 놓칠세라 카메라는 다각도에서 그 흔들림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다음 대사는 말이 아닌 지문이었다.
강찬성이 진희성을 가격하는 장면.
카메라 한 대는 진희성이 고개를 돌리는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이미 아래 방향을 찍고 있었고.
진희성 역시 강찬성이 팔을 휘두르면 고개를 돌리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퍽-!
그 순간.
강찬성의 손바닥이 진희성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그 커다란 소리에 현장은 순식간에 더욱 싸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분명 대본에도, 그리고 촬영이 들어가기 직전에도.
배우들과 카메라 스태프들이 합을 맞출 때에도 진짜로 때리는 장면은 없었다.
그저 때리는 시늉을 하는 것일 뿐.
뒤통수를 때리는 소리는 추후에 따로 영상에 입히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강찬성은 사전 협의도 되지 않은 뒤통수를, 그것도 촬영장에 울리도록 아주 세게 후려쳤고.
그 탓에 준비도 되지 않은 진희성의 고개는 앞쪽으로 깊숙이 숙여졌다.
긴장감이 맴도는 신이었기에, 현장 분위기는 애초에 좋지 않았다.
거기에 강찬성의 돌발 행동으로 현장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다.
김 실장은 퍽! 소리와 동시에 얼굴이 붉어졌고.
곧장 자리를 박차며 현장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 전부터 강찬성에 대한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터라, 그에게 화를 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
감히 내 배우를 때리느냐는 듯한 얼굴로 가슴을 들이밀자, 옆에 있던 스태프와 타 배우의 매니저가 그를 붙잡았다.
조감독 역시 김 실장의 팔을 거세게 잡았고.
모두의 시선은 임 감독을 향했지만, 그의 손에 들린 메가폰은 여전히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NG라고 외칠 생각이 없는 듯 보였고.
오히려 그의 시선은 진희성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이씨!”
현장에는 메아리가 치듯 진희성의 욕이 울려 퍼졌다.
그가 내뱉은 말은 강찬성과 마찬가지로 대본에 없는 것이었다.
김 실장은 진희성의 말에 눈썹을 들썩이며 몸을 제자리로 돌렸고.
그를 붙잡고 있던 팔들도 하나둘 스르르 사라졌다.
강찬성의 가격에 숙였던 고개를 빳빳하게 든 진희성이 재차 입을 열었다.
“미친 새끼야, 어디 배우를 때려?”
“…뭐?”
“네가 형이면 다야? 다냐고?!”
이 상황에 당황한 건 맞은 진희성이 아닌, 그의 뒤통수를 때린 강찬성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진희성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바닥에서 굴러먹던 인간쓰레기 주제에.”
진희성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코웃음을 쳤다.
“취업도 못 하고 빌빌대고 있는 거 불쌍해서 그냥 옆에서 운전이나 하라고 데려왔더니, 뭐라도 된 것 같지?”
강찬성도 당황함을 삼키고, 다시 연기에 몰입했다.
애드리브라면 그도 자신 있으니까.
“너 지금 뭐라고 했냐?”
“귓구멍 막혔어?”
하나 진희성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내뱉었다.
“이러니까 X발… 형 때문에 내가 드라마용 배우 소리를 듣는 거라고. 알아?”
자신감도 잠시.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찬성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냐?”
그의 말에 김 실장을 비롯한 온 스태프는 촬영 현장이 아닌 영화를 보듯 빠져들었고.
그 모습은 흡사 싸움 구경을 온 사람들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못 알아들었어? 형 때문에 내가 ‘드라마용 배우’ 취급받고 있다고.”
강찬성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을 떼지 못했고.
입술과 안면 근육이 파르르 떨려왔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지난 기억이 밀려들었다.
첫 영화 촬영 때의 일.
자신의 첫 영화였기에, 굉장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듣는 말은 단 하나였다.
‘드라마용 연기 좀 하지 마. 제대로 좀 해.’
‘넌 드라마용 배우야.’
자존감을 바닥끝까지 떨어뜨리게 만들었던, 톱 배우 최서빈의 말.
강찬성에겐 트라우마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때 들었던 수없이 많은 말들과 그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 듯했고.
지금 강찬성의 눈에는 진희성이 아닌, 최서빈의 얼굴과 목소리가 겹쳐 보이고 있었다.
강찬성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갔다.
진희성은 그런 그의 속마음을 전혀 알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몰아쳤다.
“드라마용 배우라고. 영화도 못 맡는 폐급.”
“…….”
“왜 그런지 알아? 매니저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뭐, 뭐?”
그는 애써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다시 진희성이 눈을 부릅뜨며 말을 쏟아냈다.
“내가 모를 것 같아? 나 휴식 기간 동안 형이 유혁이 매니저 대타로 뛸 때, 영화판 가서 형이 얼마나 똥을 싸고 오면 그딴 소리를 하겠어? 오죽하면 나보고 매니저가 어벙해서 힘들겠다고, 고생 많다고 위로를 하더라.”
강찬성의 눈에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매번 촬영장에서 가만히 있기나 하고, 영업도 못 하고, 그냥 미팅만 가면 말도 못 한 채 망해서 오고. 형이 그렇게 날린 CF가 몇 개인지나 알고 이러는 거야?”
강찬성은 당장이라도 촬영을 멈추고 싶었다.
자신의 트라우마가 떠오를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눈앞의 진희성이 짓는 가소로운 표정을 보니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여기서 욱하면 지는 일이다.
본인이 시작한 애드리브였기에 절대 녀석에게 말려서는 안 됐다.
부서지기 직전의 멘탈을 붙잡았다.
그리고 연기로 돌아가려 했다.
“너 대본, 내가 다 골라준 거야. 알아?”
“대본? 그거 지나가던 옆집 똥개도 볼 줄 알아. 집에서 드라마 많이 봤다고 대본 잘 보는 줄 아나 본데, 애초에 나한테 들어오는 대본들은 수준이 달라. 나는 ‘톱스타’고, 너는 일개 매니저라고.”
진희성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맨날 운전석에 처박혀서 운전만 하다 보니까, 정신이 아직도 안 드냐?”
강찬성은 진희성의 말에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임 감독은 그들의 표정에 흡족한 얼굴로 빤히 바라보았다.
“그냥 나한테 대꾸하려 하지 말고, 시키는 거나 좀 잘하라고.”
“…….”
강찬성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으나, 그는 꾹 참았다.
극 중 자신은 매니저였으니까.
연예인에게 대들 수 없는 매니저.
이게 진희성의 의도였다.
며칠 전, 커피 차 앞에서 자신의 매니저에게 갑질을 했던 그를 엿 먹이는 것이지.
정확히는 김 실장에 대한 복수였다.
강찬성이 진희성의 뒤통수를 때린 순간, 모든 설계가 시작된 것이다.
진희성은 그제야 진정이 된 듯 호흡을 가다듬고는 한쪽 팔을 강찬성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내가 제대로 활동 좀 하려니까, 이게 뭐냐.”
어깨를 툭툭 내려친 뒤 손을 내려놓는 진희성이 혼잣말하듯 작게 읊조렸다.
“잘 좀 하자, 형.”
“…….”
진희성은 강찬성에게 눈빛을 보낸 뒤, 뒤를 돌아 걸어갔다.
“컷, 오케이!”
메가폰을 너머에서 들려오는 임 감독의 목소리.
그의 목소리는 신의 마무리라는 것을 알리려는 것보다, 연기에 대한 극찬을 보내는 듯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임 감독이 현장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손뼉을 치며 그들의 앞에 선 임 감독은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둘의 호흡 너무 좋았어. 미리 짜놓은 거지?”
그의 말에 강찬성과 진희성은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사전에 협의라고는 전혀 없었으니까.
그걸 알 리 없는 임 감독은 감탄을 자아내며 재차 말했다.
“나는 희성 씨가 뒤통수 맞은 거 애드리브인 줄 알고 진짜 놀랐잖아. 촬영 들어가기 바로 전에 맞춘 건가?”
임 감독의 말에 진희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뭐, 그렇죠.”
강찬성은 분노를 겨우 눌러내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진짜 오늘 명장면이었어.”
임 감독이 그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감사합니다.”
진희성의 대답에 임 감독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답했다.
“다들 고생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장의 스태프들이 하나둘 소리쳤다.
“고생하셨습니다!”
강찬성은 곧장 뒤돌아 현장에서 사라졌고.
진희성은 허리를 접어 스태프들을 향해 인사를 보냈다.
드르륵.
차 문이 열리고 진희성이 올라타자, 김 실장이 환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희성아, 고생했어.”
운전석에 앉은 김 실장은 몸을 돌려 진희성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고맙다.”
자신에 대한 복수를 해준 것만 같다는 생각에 김 실장은 미안함과 고마움이 공존했고.
진희성 역시 그 마음을 알고 있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게 인사를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으니까.
“뭐가?”
진희성의 물음에 김 실장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켜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아니야. 출발할까?”
진희성은 고개를 끄덕인 후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아, 치킨 먹고 싶다. 형, 같이 먹을까?”
운전대를 붙잡은 김 실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지. 내가 살게!”
***
강찬성은 대기 중인 차에 올라타자마자 입고 있던 옷을 바닥에 내팽개치듯 던지며 소리쳤다.
“아, 진짜 X같네!”
조금 전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신 실장도 보았기에.
그는 강찬성에게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어설프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가는 그 화를 모조리 자신에게 쏟아부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지.
마침 신 실장의 전화가 울렸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들고 급히 차에서 내렸다.
차에 홀로 남은 강찬성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고.
주먹으로 조수석을 내려치며 울부짖듯 소리쳤다.
“진희성 개X끼, 진짜!”
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대본을 바라보던 강찬성은 대본을 들어 운전석 쪽으로 세게 던져버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밖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신 실장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안녕하십니까!”
촬영장에 도착한 차.
문을 열고 내리자, 바로 앞을 지나가는 조감독이 보였다.
재빨리 그를 향해 인사를 보냈고.
조감독은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어, 희성 씨.”
그에게 달려가자, 조감독은 활짝 웃으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어제 연기 진짜 좋았어. 완전 100점이었다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어제 말을 못 했네.”
그의 말에 눈동자를 굴리자, 조감독이 재차 입을 열었다.
“크으, 찬성 씨한테 뒤통수 맞자마자 소리 지르면서 거침없이 대사를 내뱉는 게….”
조감독은 열연을 펼치듯 말을 이어갔다.
전날 강찬성과의 감정 신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답했다.
“하하, 감독님. 감사합니다.”
내 말에 조감독은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는 손을 자신의 입 옆에 가져다 대며 귓속말하듯 입을 열었다.
“희성 씨 매니저님 대단하시더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내 말에 그는 눈을 찡긋거리며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어제 찬성 씨가 희성 씨 뒤통수 때린 거, 협의 없었던 거지?”
“예?”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어제 희성 씨가 뒤통수 맞자마자 매니저님이 깜짝 놀라시더라고.”
“아….”
“협의된 거라면, 매니저님이 알고 있었겠지.”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튼, 매니저님이 잔뜩 화가 나서는 현장으로 뛰어들려고 하더라고.”
그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요?”
“어, 그래서 다른 매니저들이랑 우리가 급하게 말렸지. 매니저 복이 있네, 희성 씨가.”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순간 떠오른 김 실장의 얼굴.
그의 행동과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졌고.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더욱 성공이 간절해졌다.
내가 높이 올라야만, 내 사람들도 나와 함께 오를 것이니까.
성공하고 싶다.
아니,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