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49)화 (49/303)

49화 #11 –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 (7)

“사과 못 하겠습니다.”

임 감독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하자,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갔다.

“못 하겠다고?”

사과를 시키기 위해 간절한 눈빛을 보내던 임 감독은 아랫입술을 꽉 물었고.

그럼에도 강찬성을 향해 내 모든 것을 숙여야 할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예, 제가 사과해야 하는 이유를, 아니 백번 양보해서 사과한다고 쳐도, 무릎 꿇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내 말에 동공이 흔들렸지만, 굳은 얼굴로 답했다.

“감당되겠어?”

임 감독은 나를 회유하기 위해 일부러 거센 말투로 말했고.

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예, 게다가 사과는 저희 김 실장님이 먼저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재차 떠오르는 기억에 숨이 가빠왔고,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그냥 사과를 해달라 요구해도 할 생각이 없는데, 무릎을 꿇으라는 게 웬 말인가.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갑질을 해도 유분수지.

곱씹을수록 강찬성이 괘씸하다고 느껴졌고,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근데 사과는….”

“저…!”

그때.

조용히 있던 김 실장이 내 말을 툭 잘라버렸다.

나와 임 감독 앞으로 다가온 그는 마른침을 크게 삼켜낸 뒤 입을 열었다.

“감독님, 솔직히 저희가 누구 백으로 드라마 들어온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섭외가 들어온 거지 않습니까.”

김 실장의 말에 임 감독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캐스팅에는 캐스팅디렉터와 많은 이들의 의견이 있었겠지만, 그중 임 감독의 선택도 있었을 터.

김 실장은 차분히 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희성이가 조연으로 들어왔다고 해도, 같은 드라마의 배우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김 실장은 두 눈을 부릅뜨며 옅게 입꼬리를 휘었다.

“저희도 어중이떠중이 아니고, HS 엔터입니다.”

짧은 그의 한마디.

대단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회사 이름을 외친 것뿐.

하지만 그 회사가 대형 소속사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말에서 강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이래서 연예계뿐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도 대기업, 대형 소속사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흠, 일단 무슨 말인지 알겠네.”

역시나.

‘HS 엔터’라는 한마디에 임 감독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이런 일을 많이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김 실장은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처해 나가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김 실장은 이 상황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다음 해결 방안에 대해 물었다.

임 감독은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미간을 찌푸렸고.

김 실장이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희성이 촬영은 이어가야 하잖습니까.”

그의 말에 임 감독은 내가 아닌 김 실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희성 씨 매니저가 대신해서 사과의 뜻을 좀 전하면 좋을 것 같은데.”

임 감독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 실장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바로 김 실장의 팔을 붙잡았다.

“형!”

강찬성이 나에게 사과를 요구했는데, 김 실장이 사과를 하러 간다니.

나 대신 그가 나서야 한다는 것도 싫었지만.

김 실장이 강찬성에게 사과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싫었다.

하지만 김 실장은 내 손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답했다.

“희성아, 애초에 나랑 그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이야.”

“그래도….”

“괜찮아. 금방 해결하고 올게. 어쨌든 촬영은 어서 이어가야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김 실장은 미소를 보이고는 곧장 임 감독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

“하아….”

임 감독과 김 실장은 나란히 현장을 걸어가고 있었다.

둘 사이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김 실장의 한숨 소리뿐.

그 외에 대화는 일절 없었다.

진희성에게 미소를 보이며 해결하고 오겠다고 외쳤지만, 김 실장 역시 내키지 않는 사과였다.

하지만 그는 진희성의 매니저이고, 그가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 것.

그러기 위해서는 김 실장이 나서서 사과하고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굳게 마음먹고 가는 자리임에도 김 실장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는 하지만, 최대한 천천히 가고 싶었던 김 실장의 발걸음은 점차 더뎌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세 강찬성의 차에 다다랐다.

“감독님!”

순간, 임 감독을 찾는 목소리에 그들은 고개를 돌렸다.

급히 임 감독에게 달려온 조감독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왜?”

“저 작가님한테 연락이 왔는데, 뒤에 신에서 급히 수정할 부분이 있다고 하는데요.”

임 감독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 수정?”

“네, 혹시 바쁘십니까?”

조감독을 바라보던 시선이 김 실장에게로 옮겨왔고.

김 실장은 양손을 뻗으며 말했다.

“감독님 가보셔도 됩니다. 저 혼자 가겠습니다.”

“…괜찮겠어?”

“네, 오히려 그게 더 편할 것 같습니다. 정말 가셔도 됩니다.”

임 감독은 김 실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장 뒤를 돌아 조감독과 자리를 떠났고.

홀로 남은 김 실장은 이내 참고 있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하,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한 거라니까?”

“어머, 오빠. 그 말이 완전 웃겨요.”

저 멀리서 웃고 떠드는 강찬성과 그의 매니저, 스타일리스트가 김 실장의 시야에 들어왔다.

강찬성은 대기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댄 채 다리를 꼬며 웃고 있었고.

그의 옆에 서 있는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는 강찬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이 잔뜩 받았다던 강찬성은 온데간데없었고.

자신의 스태프들과 하하 호호 웃는 모습에 김 실장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로 인해 김 실장의 얼굴은 파르르 떨려왔다.

탄식을 쏟아내며 그는 서서히 눈을 떴다.

더럽고 치사해도 자신이 사과 한마디만 내뱉으면 끝날 일.

빨리 사과한 뒤에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김 실장은 굳은 얼굴을 억지로 풀어내며 멈췄던 발길을 재차 움직였다.

하지만 가기 싫은 곳에 억지로 끌려가는 듯한 느낌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가 저벅저벅 걸어가자, 웃고 있던 강찬성의 스타일리스트가 고개를 들었다.

“어?”

그녀의 말에 강찬성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돌렸고.

김 실장임을 확인하자 웃고 있던 입꼬리는 싸늘하게 내려갔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김 실장의 말에 스타일리스트는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자리를 피했고.

강찬성은 여전히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김 실장의 주변을 살폈다.

“혼자 온 겁니까?”

“네.”

그의 말에 강찬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진희성은요?”

“제가 대신해서 사과하러 왔습니다.”

김 실장은 이를 악물고 허리를 깊게 접었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그의 머리가 아래로 향하자, 강찬성의 한쪽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몇 초간 김 실장의 머리는 숙여져 있었고,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강찬성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혀를 차며 말했다.

“저는 무릎 꿇고 진실하게 사과하는 걸 원했는데.”

그의 비아냥대는 듯한 말투에 김 실장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속이 부글대며 끓어올랐지만, 그 뜨거움을 겨우 차갑게 눌러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김 실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 떨림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강찬성의 입꼬리는 의뭉스럽게 휘어졌다.

“근데 뭐, 이 정도로 봐드릴게요.”

김 실장의 양 주먹은 터질 듯 쥐어졌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강찬성이 눈썹을 들썩이며 말을 이어갔다.

“진희성한테 똑똑히 전달 좀 하세요. 다음부터는 깝치지 말라고요.”

그는 그제야 기대고 있던 등을 의자에서 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 조연 따위가 주연한테 기어올라?”

김 실장은 강찬성의 태도에 시선을 피한 채 마른침을 삼켜냈다.

***

김 실장이 떠난 후.

강찬성에 대한 차오르는 분노로 여전히 차 앞을 서성였다.

대체 왜 사과를 해야 하는 거지.

김 실장이, 그리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주연이면, 연예계에서 톱급이면 이래도 되는 건가.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만을 연달아 내쉬었다.

차 앞을 몇십 번 배회하던 그때.

저 멀리서 걸어오는 김 실장의 모습이 보였다.

서둘러 그를 향해 걸어가며 소리쳤다.

“형!”

내 부름에 김 실장은 밝은 얼굴로 손을 뻗으며 답했다.

“어, 희성아. 더운데 왜 차 앞에서 이러고 있어, 차에 있지.”

“아니야, 괜찮아. 형은 갔다가 온 거야?”

김 실장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응, 사과하고 왔지.”

웃고 있지만, 전혀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가 걱정할까 싶은 마음에 억지로 입꼬리만 올리고 있는 듯한 모습.

눈에는 슬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아.”

그런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쏟아졌고.

오히려 그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나, 괜찮아.”

김 실장의 말에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나 정말 괜찮다니까.”

“내가 안 괜찮아, 형.”

나는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차마 김 실장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가 나를 달래주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희성아.”

나는 그와 눈을 맞추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고 작게 읊조렸다.

“형, 미안해….”

“네가 뭐가 미안해.”

그는 꽉 다문 입술로 미소를 지었고.

그때 울리는 김 실장의 전화.

“일 전화다.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김 실장은 내게 휴대 전화를 들어보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목을 풀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네, 진희성 매니저 맞습니다. 예, 예.”

그는 두 손으로 전화기를 붙잡고 내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 와중에도 내 업무와 관련된 전화를 밝은 목소리로 받는 김 실장을 바라보며,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진짜 뭣 같은 상황이다.

강찬성, 개자식.

김 실장이 강찬성에게 사과했다는 사실보다도 더 화가 나는 건.

내가 김 실장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보다 잘나가는 강찬성의 말에 휘둘리며, 내가 내 사람을 막지 못했다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싫었다.

결국은 내 사람을 건드는 걸 지키지 못한 거니까.

“하아, X같네.”

김 실장이 들을세라 겨우 목소리를 삼켜내듯 읊조렸다.

이렇게까지 열이 받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화가 났고.

부아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 탓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터질 듯했다.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김 실장을 지켜보는 것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이런 일을 재차 겪지 않을 방법.

그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더 높이 올라가는 것.

배우로서 자리를 잡아 강찬성만큼, 아니 그보다 더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

그래야 내 사람을 상처 받지 않게 지킬 수 있을 테니까.

두 눈썹을 파르르 떨며 주먹이 터지도록 꽉 쥐었다.

그 누구도 건들지 못하게.

내 사람들은 내가 지켜야 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