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11 –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 (6)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내 외침에 커피차 앞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나를 향했다.
웅성거리던 이곳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얼어붙어 버렸고.
강찬성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쓰윽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아, 여기 장본인 오셨네.”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입꼬리를 올리는 강찬성.
마치 ‘잘 걸렸다’라는 듯한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그 의도가 무엇이든, 앞뒤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이든 상관없었다.
김 실장이 대체 그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한참 나이 어린 강찬성에게 꾸지람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게 어떤 사유든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강찬성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김 실장님에게 소리친 이유를 좀 들어야겠는데요.”
사실 커피차 앞에 다가왔을 때, 대충 이유는 알아차렸다.
커피차가 오자마자 내 커피를 받으러 갔던 김 실장.
그런데 커피차의 주인공인 강찬성이 오기 전이었다는 것.
하지만 그 이유로 소리쳤다고 하기에는 내 상식선에서는 이해 불가였다.
혹시나 내가 모르는 이유가 더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물은 것뿐.
그러자 강찬성은 한껏 올라가 있던 한쪽 입꼬리를 내리며 답했다.
“커피차가 이제 왔는데, 나보다 먼저 그쪽 매니저가 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강찬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이유가 그뿐이었다니.
며칠 전, 핫도그 간식차로 인해 내게 화가 났다고 할 때부터 강찬성의 지능이 대체 몇 살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었는데.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형, 이 말이 사실이야?”
내 말에 김 실장은 눈썹을 늘어뜨린 채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을 보자마자 눈이 뒤집혔고.
김 실장은 서둘러 내게로 달려왔다.
“희성아, 일단 진정하고 내가 먼저 커피차에 온 건 잘못이니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미간을 찌푸렸다.
“형이 커피차에 줄을 먼저 선 거 말고. 다른 거 한 건 있어?”
김 실장은 눈치를 살피며 작게 읊조렸다.
“…아니.”
“근데 왜 욕을 들어?”
“그래도 찬성 씨가 커피차에 먼저 갔어야 했는데.”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작 강찬성보다 먼저 커피를 받으러 줄을 섰다는 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정말… 이게 다라는 거지?”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겨우 참아내고 감정을 눌러 넣은 채.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려 김 실장에게 재차 확인을 요구했다.
선배이자 현장의 주연인 강찬성에게 후배인 내가 목소리를 높이며 대응하는 것 자체가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앞뒤 정황을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김 실장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이유만으로도 강찬성에게 대응할 수도 있지만.
뱉은 모든 말에는 책임을 져야 할 터.
“아, 그렇기는 한데. 어쨌든 애초에 잘못한 건 나니까….”
김 실장은 연신 강찬성의 눈치를 살피며 데시벨을 낮춰 말끝을 흐렸다.
결국, 내 분노의 버튼은 눌러지고 말았다.
“아니, 그게 뭘 잘못한 건데?!”
“그래도 내가 먼저 커피를 받았으면 안 됐던 거지.”
김 실장은 내 팔을 붙잡으며 말했고.
나는 그가 붙잡은 팔을 밀어냈다.
“원래 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당사자들에게 상황을 모두 듣고 나자 차분해지기는커녕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대체 강찬성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길래 이렇게 할 수가 있는 거지?
“잘 들었지?”
우리의 대화를 듣더니, 강찬성은 입꼬리를 비틀며 목소리를 더 높였다.
“네 매니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잘못은 무슨.
그의 말에 그간 쌓여왔던 의문과 분노가 결국 터져버렸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외쳤다.
“커피차는 당연히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게 룰 아닙니까?”
“룰은 무슨… 주인이 이렇게 버젓이 있는데, 먼저 가서 먹는 건 어디서 배운 룰이냐.”
도저히 통하지 않는 대화.
대체 어떻게 말을 해야 대화가 이어지는 것인가.
“이렇게 생색내면 누가 커피를 먹습니까?”
내 말에 강찬성은 황당하다는 듯 실소를 보였다.
그의 태도에 더욱 분노가 올라왔고.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쳤다.
“커피차로 무슨 갑질합니까?”
“뭐 갑질? 너 말 다 했냐?”
강찬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뒤집어 까며 소리쳤고.
이에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아니, 팬들이 보내준 거, 동료 배우가 보낸 거 감사한 거 다 잘 압니다.”
“아는 사람이….”
나는 강찬성의 말을 뚝 잘라내며 현장이 떠나가라 외쳤다.
“근데!”
내 말에 움찔 놀랐는지 그의 눈동자가 살짝 떨려왔다.
“그런데요. 지금까지 커피차, 간식차, 밥차 보낸 게 그쪽뿐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뭐, 그쪽?”
‘선배’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재차 분노하는 강찬성이었다.
하지만 호칭을 정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기에, 말끝마다 존대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의를 차렸다고 생각하니까.
“감독님 지인들, 다른 배우들의 팬클럽, 배우 동료분들의 커피차도 수두룩하게 많이 왔잖아요.”
“그래서 그게 뭐!”
강찬성은 턱을 내밀며 소리쳤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색은 낼 수 있지만, 갑질은 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강찬성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현장이 울려 퍼지도록 데시벨을 높였다.
“뭐 이 새끼야? 너 말 다 했어?”
나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그를 노려보았고.
강찬성 역시 파르르 떠는 눈으로 레이저를 뿜어냈다.
나는 차오르는 분노에 뜨거운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저 새끼가 진짜… 내가 한마디만 하면….”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때.
강찬성의 말을 끊어내며 나타난 사람.
바로 임 감독이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스태프가 임 감독에게 달려가 이 상황을 전달한 모양이다.
임 감독은 한참을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나를 포함해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일시 정지가 된 듯 행동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신성한 촬영 현장에서 다들 뭐 하는 짓이야!”
***
“감독님, 조금 이따가 촬영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조감독이 임 감독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오전에 있었던 커피차 소동 때문에 불편해진 건 비단 임 감독뿐만이 아니었으니까.
“하아… 그래서 싸운 이유가 그게 다야?”
임 감독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물었다.
“예, 강찬성,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말이 되냐?”
조감독은 혀를 차며 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강찬성 말로는 커피차 주인이 있다고 하는데, 뭐 진희성이 말한 그대로 강찬성이 갑질한 거죠.”
“참나, 현장에 간식차를 못 들어오게 할 수도 없고.”
임 감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휴, 강찬성 이 새끼, 진짜 인성하고는….”
“커피차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 지랄이야?”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가격으로 따지면 간식차 값은 얼마 되지 않는다.
물론 스태프의 수에 따라서, 그리고 간식차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지만.
이 현장의 경우 스태프가 적은 편이었기에, 커피차와 간식차는 대략 50만 원 선.
밥차라고 해도 100만 원 정도면 충분한 가격이다.
조감독은 임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맞죠. 오늘 커피차도 보니까 50만 원 좀 안 되게 한 것 같던데요.”
“뭐, 돈이 아니라 정성이 고마운 거긴 한데. 그걸로 갑질은 하면 안 되는 거지.”
“예, 감독님 말씀이 정확하십니다.”
임 감독과 조감독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한참 고민에 빠진 것 같은 임 감독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작게 읊조렸다.
“그래도 촬영을 이어가려면 내가 나서야겠네.”
그의 말에 조감독이 거들며 말했다.
“강찬성한테 가시는 거죠, 지금 갈까요?”
“어, 근데 나 혼자 다녀올게. 너는 촬영 준비하고 있어.”
임 감독이 손을 뻗으며 말하자, 조감독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 두겠습니다.”
***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강찬성은 팔짱을 낀 채 씩씩대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씨, 진희성 또라이 새끼.”
신 실장은 강찬성 옆에 서서 그의 말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말이야.”
“선배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아는 거지?”
그는 강찬성의 어깨를 주무르며 살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이, 그래도 찬성이 네가 참아.”
몇십 분 뒤 곧장 촬영이 있는 강찬성을 달래기 위해 신 실장은 온갖 부드러운 말을 쏟아냈다.
“그래도 네가 이 업계에서 톱 배우이기도 하고, 아량도 넓으니까….”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찬성은 신 실장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답했다.
“형은 누구 편이야, 대체!”
“당연히 네 편이지.”
“근데 왜 내가 이해를 해야 하는데….”
똑똑.
그때 강찬성이 타고 있는 차의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자 임 감독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신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했다.
“임 감독님이 여기까지 왜 오셨지?”
드르륵.
곧장 문이 열리고, 임 감독이 강찬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찬성 씨,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예, 뭐.”
강찬성이 차에서 내렸고.
임 감독은 아이를 타이르듯 부드러운 말투와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찬성 씨, 괜찮아?”
그의 말에 강찬성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감독님이 보기에도 진희성 그 새끼가….”
둘의 이야기는 한참이나 이어졌고.
임 감독은 지칠 대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촬영을 이어가야 했기에, 애써 미소 지으며 그를 달래기에 급급했다.
“그럼, 당연히 찬성 씨 말이 다 맞지.”
“감독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맞장구를 쳐주는 임 감독의 말에 강찬성은 더욱 열변을 토하듯 자신의 마음을 쏟아냈다.
“그렇고말고. 그래도 우리 프로답게 촬영도 이어가야 하잖아. 안 그래?”
강찬성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못 해요.”
그의 말에 임 감독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못 한다고?”
“네, 이 기분으로 대체 어떻게 몰입하고 연기를 할 수 있겠어요.”
프로답지 못한 그의 태도에 임 감독은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가 주연을 맡고 있다는 사실에 겨우 화와 함께 나오려는 한숨을 삼켜냈다.
“그래도 많은 스태프들이랑 배우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우리 찬성 씨가 조금만 양보해주면 어떨까 싶은데.”
강찬성은 그런 임 감독의 시선을 피해버렸고.
임 감독은 코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더니 헛기침을 하며 강찬성에게 재차 말을 내뱉었다.
“그럼 찬성 씨, 어떻게 하면 촬영을 이어갈 수… 아니, 기분이 풀릴 거 같아?”
그의 말에 강찬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임 감독은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재차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그 희성 씨 매니저보고 와서 사과라도 하라고 할까?”
“사과요?”
강찬성은 그제야 임 감독을 흘긋 바라보았고.
임 감독은 이거다 싶은 마음으로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어, 와서 사과하면 우리 마음 넓은 찬성 씨가 좀 받아줬으면 하는데. 어때?”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진희성이 직접 와서 사과하라고 하세요.”
그의 말에 임 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성 씨가?”
“네, 매니저가 잘못을 저질렀으면 담당 연예인이 사과해야죠. 게다가 선배한테 막말한 건 진희성 그 새끼니까.”
임 감독은 마른침을 삼켜냈다.
“그래, 내가 가서 따끔하게 한마디하고, 찬성 씨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아마 미안해하고 있을 거야.”
임 감독은 강찬성의 팔뚝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어갔다.
“역시 우리 찬성 씨가 아량이 넓다니까. 하하.”
순간.
강찬성이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임 감독을 향해 단호하게 말을 툭 던졌다.
“그냥 미안하다 이딴 거 말고, 와서 무릎 꿇고 정중하게 사과하라고 좀 전해주세요.”
“뭐?”
임 감독은 당황한 얼굴로 눈을 연신 깜빡였다.
“그 정도 사과는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아, 그렇지만….”
강찬성이 눈을 질끈 감으며 답했다.
“무릎 꿇을 각오 정도는 하고 선배한테 지랄한 거 아닌가?”
***
“희성아, 아까 왜 그랬어.”
김 실장은 애써 한숨을 참는 듯 입을 열었다.
그를 바라보자, 김 실장이 재차 말했다.
“나는 진짜 괜찮은데….”
착잡한 마음이 가득해 보이는 김 실장은 내 눈을 피하며 말을 흐렸다.
나는 눈을 치켜뜨며 그에게 답했다.
“내가 안 괜찮아.”
“그래도… 그렇게 강찬성한테 질러버리면 이제 어떻게 하려고.”
김 실장은 자신이 매니저로서 나를 케어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소란을 일으키게 만든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듯 보였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연신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때, 우리를 향해 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임 감독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 임 감독님 오시는데?”
나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임 감독은 내게 오자마자 강찬성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끝까지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니까 나는 희성 씨 마음 다 이해하지.”
“감사합니다, 감독님.”
내내 나를 바라보던 임 감독이 갑자기 내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그래서 말인데, 희성 씨.”
“네, 말씀하십시오.”
그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고.
나는 미간에 힘을 주고 그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찬성 씨가 잘못한 거 알아. 아는데….”
말끝을 흐리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그래도 찬성 씨가 주연이기도 하고, 연예계 생활도 선배이고, 또.”
나는 눈썹을 들썩였다.
“그리고 희성 씨가 화나서 소리친 건 알지만, 그래도 후배가 사람들 앞에서 선배한테 그러긴 하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뱅뱅 돌려 말하는 건가 싶은 마음에, 바로 임 감독에게 물었다.
“혹시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건가요?”
임 감독은 여전히 내 눈을 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찬성 씨한테 가서 무릎 꿇고 사과를 좀 했으면 하는데….”
“네?”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고.
잘못 들었나 싶어 그에게 재차 되물었다.
“제가 뭘 하라고요?”
“무릎을….”
말 같지도 않은 말이었다.
순간 분노에 가득 차올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임 감독은 눈을 질끈 감고 속사포로 말을 내뱉었다.
“희성 씨가 조연이고 후배니까, 이번에는 그냥 눈 딱 감고 사과 한번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