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47)화 (47/303)

47화 #11 –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 (5)

“크으, 희성 씨, 연기력이 물이 올랐다니까?”

임 감독은 진희성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진희성은 활짝 웃으며 임 감독을 향해 허리를 접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강찬성은 아직 배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주먹을 불끈 쥔 채 진희성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런 강찬성의 어깨에 임 감독이 손을 올렸다.

“오늘 찬성 씨도 좋았어. 아이돌이 매니저에게 하는 갑질을 받고 분노하는 모습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찬성이 눈에 힘을 주고 답했다.

“오늘 촬영 끝났으면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어?”

당황한 임 감독을 향해 목례를 보내자, 그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하루 내내 촬영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내일 봅시다.”

그는 강찬성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저 예의 없는 놈.’

“찬성아, 오늘 고생했다.”

강찬성의 매니저 신태인 실장이 차에 타는 그를 반겼다.

“됐고, 얼른 출발해.”

“…그래.”

평소 기분이 좋을 때보다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많은 강찬성이었다.

오늘도 신 실장은 그런 강찬성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룸 미러로 그의 상태를 확인한 후 내비게이션 볼륨을 한껏 줄였다.

길 안내 음성에 시끄럽다고 짜증을 낼 게 뻔했으니까.

아무런 대화 없이 한참을 달리던 차 안.

눈을 감고 있던 강찬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생각을 하려 애를 써도 머릿속에는 진희성과의 마지막 신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이씨.”

그는 눈을 뜨고 옆 의자에 놓인 대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찍었던 마지막 신의 대사를 빠르게 읽어내렸다.

하지만 진희성의 대사는 토시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 자식 분명 애드리브도 하나 없었는데, 기분이 뭔가 더러워.’

강찬성의 분주한 모습에 신 실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찬성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의 질문에 강찬성이 룸 미러를 바라보며 답했다.

“형, 오늘 촬영 마지막 신, 현장에서 봤지?”

얼마 전, 신 실장은 현장에 있다가 급한 전화 용무로 강찬성의 연기를 보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날 강찬성에게 질리도록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고.

그는 그 기억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대답 후 룸 미러로 강찬성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 진희성이랑 한 마지막 신 때, 이상하다고 느꼈지?”

강찬성의 말에 신 실장은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그는 현장에서 대본을 보며 그들의 연기를 살폈고.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신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뭐가?”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나빠서.”

신 실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냥 서로 연기를 잘해서 찬성이 네가 그렇게 느낀 거 아닐까?”

그의 말에 강찬성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재차 입을 열었다.

“오늘 마지막 신 연기는 다 좋았는데.”

그러자 강찬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홱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니야. 진희성 그 자식, 뭔가 불쾌해….”

***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촬영장에 도착해 스태프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희성 씨, 왔어요?”

이제 스태프들은 무반응 대신 내 이름을 외쳐주었다.

그런 반응에 더 활기차게 인사를 보냈다.

“오늘도 파이팅입니다.”

그때, 저 멀리서 들어오는 차 한 대.

익숙한 번호판.

한소정을 태운 밴이었다.

예능 프로그램까지 합치면 벌써 세 번째 작품이었기에.

현장에서 가장 편하고 가까운 배우라고 할 수 있지.

“형, 소정 씨 온 거 같은데, 인사 좀 하고 올게.”

김 실장은 내 말에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같이 가자. 나도 소정 씨랑 박 실장한테 인사하지 뭐.”

“소정 씨 매니저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박 실장이 여기서 제일 많이 나랑 이야기 나누거든.”

김 실장 역시 한소정의 매니저 박철진 실장과 친분이 생긴 모양이다.

“그래.”

한소정의 차량은 주차장 가장자리에 주차했고.

우리는 빠르게 그 차로 걸어갔다.

“어, 안녕하세요.”

그녀는 차 문을 열며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박 실장이 빠르게 다가왔다.

“김 실장님, 오셨어요?”

박 실장은 살갑게 김 실장의 팔을 붙잡았다.

“어, 박 실장. 그날 일은 잘 해결됐어?”

“네, 김 실장님 덕분에 해결은 됐는데….”

그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자연스레 흡연 구역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한소정이 차에서 내리며 내게 말했다.

“희성 씨, 안 그래도 저 물어볼 거 있었는데.”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어떤 거요?”

한소정은 자신의 차에서 보던 대본을 내게 펼쳐보였다.

대본 위에 체크된 형광펜 자국과 빼곡하게 적힌 글씨들.

그리고 손에 묻은 펜이 그녀가 열심히 연습하던 증거라는 걸 보여주었다.

그녀는 펜이 묻은 손가락으로 대본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희성 씨랑 찍는 신이 있잖아요. 이 부분에서 제 캐릭터의 감정을 잘 모르겠더라고요.”

한소정이 보여준 부분은 그녀와 내가 독대하는 신.

일과 사랑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감정적으로 묘사하며 대사를 주고받는 중요한 장면이다.

나 역시 이 신을 연습할 때, 가장 오래 걸렸던 부분이었다.

“저도 매니저 형이랑 연습하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감정적인 부분이 어렵더라고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희성 씨는 남자분이랑 연습하니까, 더 어려우셨겠네요.”

“하하, 그럴 수 있겠네요. 저는 이때의 제 감정을….”

그녀와 함께 같은 대본을 바라보며 열띤 토론을 펼치듯 말을 주고받았다.

한소정은 내 말에 경청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뒤, 손가락을 튕기며 답했다.

“어, 그러네요. 저도 그게 가장 맞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짓자, 한소정이 재차 입을 열었다.

“희성 씨, 혹시 바쁘세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요. 왜요?”

“혹시 안 바쁘시면, 저랑 같이 이 신을 연습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한소정은 연신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너무나도 공손한 말투에 나는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당연히 되죠. 어차피 저랑 찍는 신인데, 저도 연습하면 좋죠.”

한소정은 헤실거리며 자신의 차에 몸을 기대었다.

“그럼 저희 여기서 연습 좀만 해봐요.”

“네.”

그녀는 대본을 차에 넣은 뒤,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빠르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비록 연습이지만, 단순히 대사만을 주고받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런 연습이라면 김 실장과도 충분했으니까.

우리는 현실처럼 서로를 아련하게 바라보았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잖아. 네 감정, 네 표정….”

내 말끝이 흐려졌고, 그녀는 맺히려는 눈물을 삼키며 겨우 입을 떼어냈다.

“아니요. 내 감정과 표정은….”

“희성아!”

들려온 커다란 목소리에 한소정과 나는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표정을 본 김 실장은 아차 싶었는지, 입을 벌리며 말했다.

“아, 연습 중이었어?”

그의 표정에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김 실장은 손을 모으며 눈썹을 내려트렸다.

“미안해. 몰랐네.”

“괜찮아.”

“그런데 저희 박 실장님은요?”

혼자 있는 모습에 한소정이 묻자, 김 실장은 수화기를 쥔 제스처를 취하며 답했다.

“통화하고 있는데, 길어질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한소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철커덕, 쾅.

들려오는 큰 소리에 우리 셋은 나란히 시선을 옮겼다.

한소정의 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설치하고 있는 커피차.

오늘도 누군가를 위해 간식차가 온 모양이다.

이제 막 도착한 커피차는 입간판을 세운 뒤,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김 실장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커피 가져다줄까?”

“아니야. 같이 가자.”

김 실장은 활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배우가 연습을 해야지.”

그는 한소정과 나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소정 씨랑 연기 맞추고 있었는데, 내가 끊었잖아.”

“괜찮은데….”

김 실장은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괜찮아. 가서 소정 씨 거까지 받아올게, 넌 연습하고 있어.”

그의 말에 한소정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실장님.”

“아이고, 아닙니다.”

김 실장은 우리의 인사를 뒤로한 채, 커피차를 향해 걸어갔다.

차 앞에 남은 우리 둘.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 다시 시작해 볼까요?”

“네, 좋아요.”

그녀와 나는 다시 배역에 몰입해 서로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찬성아, 도착했어.”

신 실장이 차 뒷자리에 앉은 강찬성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강찬성은 창밖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디론가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쟤네 뭐 하냐?”

그의 시선을 따라 신 실장의 눈길도 움직였다.

그 끝에는 진희성과 한소정이 서로를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들의 입 모양을 보며 강찬성이 눈꼴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성한 촬영장에서 무슨 연애질을 하는 거야?”

그의 불평스러운 말투에 신 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연기 연습하고 있는 거 같은데, 대사 주고받는 거 아니야?”

신태일이 고개를 돌려 강찬성을 바라보자, 어느새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신태일은 빠르게 태세 전환을 하듯 말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러네. 가서 한마디 할까?”

“…됐어.”

강찬성이 눈을 감았다 뜨며 시선을 돌리자, 한소정의 차 근처에 위치한 커피차가 눈에 들어왔다.

“형, 오늘 온다는 내 커피차가 저건가?”

신 실장은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생각보다 좀 일찍 왔나 봐.”

그의 말에 강찬성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지철이한테 고맙다고 연락해야겠네.”

“얼른 가보자.”

<연예계 엑스트라 촬영 파이팅!>

<우리 찬성이 형 잘 부탁드립니다~>

강찬성과 연예계 절친으로 소문난 배우 김지철이 보낸 커피차.

멀리 보이는 플래카드의 글씨를 읽으며 강찬성은 함박웃음을 보였다.

“지금 딱 오픈하고 있네. 빨리 가서 사진부터 찍어야겠다.”

그의 말에 신 실장이 카메라를 켜며 답했다.

“응, 이번에는 한 번에 잘 찍어볼게.”

커피차 앞으로 다가가자 앞에 서 있는 한 사람.

강찬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벌써 누가 왔네, 누구지?”

그의 말에 신 실장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저 사람, 진희성 매니저네.”

말이 끝나자마자 강찬성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작게 읊조렸다.

“진희성… 옳지, 잘 걸렸다.”

강찬성은 올라갔던 입꼬리를 내리며 김 실장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의 큰 소리에 김 실장이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았다.

“어, 안녕하세요. 저 희성이 매니저인데, 커피 받으러….”

그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강찬성은 데시벨을 높였다.

“왜 네 마음대로 가져다줘?”

황당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김 실장의 모습에 강찬성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직 주인이 개시도 안 했는데!”

현장이 울리도록 소리치는 바람에 진희성과 한소정이 움찔거렸다.

연기 연습을 하던 진희성은 바로 옆 커피차의 광경을 보았고.

곧바로 싸늘하게 얼굴이 굳어갔다.

“저기, 뭐야.”

진희성은 한소정을 뒤로한 채 재빨리 커피차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몇 초 만에 커피차 앞에 도착한 진희성.

그사이에도 강찬성은 계속해서 김 실장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당신이 뭔데, 지금 여기서 커피를 먼저 받고 있냐고!”

커피차에 다다른 진희성은 심각한 얼굴로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강찬성, 저 새끼가 뭔데 우리 형한테 소리를 질러?’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었다.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진희성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이런 X발… 저건 나를 개무시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진희성은 뜨거운 숨을 뿜어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몸은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고.

감았다 뜬 눈은 희번덕거리며 뒤집어졌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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