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46)화 (46/303)

46화 #11 –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 (4)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빡빡한 스케줄에 몸을 풀기 위해, 앉은 자리에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희성아, 오늘 촬영은 한 신 빼고 전부 강찬성이랑 찍는 거더라.”

김 실장이 룸 미러를 통해 나를 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 움직이던 몸을 멈추고 대본을 뒤적였다.

“뭐, 매니저랑 가수 역할이니까 강찬성이랑 거의 함께하지.”

“응, 근데 오늘은 붙어서 대사를 주고받는 신이 많더라고.”

그러고 보니 오늘 촬영분은 강찬성과 함께하는 대사가 굉장히 많은 편이었다.

무대에 올라가 있는 신보다 대사와 감정 연기를 하는 것이 많았고.

더욱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런 날은 첫 신부터 NG가 나면 말려버릴 테니까.

촬영장에 도착해 곧장 의상부터 갈아입기 시작했다.

첫 의상은 무대에 오르는 전형적인 화려한 아이돌의 옷.

항상 스타일리스트가 두세 벌 정도를 골라놓은 의상 중에서 현장에 맞춰 선택하고는 한다.

오늘 역시 그녀가 고심 끝에 골라온 옷들 중 하나를 정해 환복했다.

분주한 스태프들을 뒤로한 채, 나는 차에 기대어 대사를 복기했다.

언제든 스태프의 사인이 떨어지면 곧장 달려가야 했으니까.

그때, 강찬성과 그의 매니저가 지나갔다.

그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강찬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인사를 하지 않는 강찬성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굳이 잘할 필요도 없다.

그저 형식적인 후배 노릇만 하면 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 인사에 대답 없이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강찬성은 내 목소리에 발길을 멈춰 세웠다.

“어, 그래.”

뭐지?

인사를 받아주는 그의 태도에 오히려 당황한 건 나였다.

게다가 강찬성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기까지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묘하게 기분 나쁜 눈으로 내 몸을 훑어보는 것이었지만.

그의 눈빛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고.

강찬성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상이 그게 뭐냐?”

“…네?”

“머리는 그게 또 뭐고. 헤어를 좀 어울리게 하고 와.”

비아냥거림이 담겨 있는 그의 말투.

“배역이 가수잖아, 가수.”

“…….”

“아이돌 몰라?”

촬영 시작 전부터 그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시비를 거는 듯한 그의 말에 맞받아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현장에서 선배와, 게다가 주연을 맡은 강찬성과 언성을 높여서 내게 좋을 것이 하나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래, 드라마 퀄리티에 신경 좀 쓰자.”

강찬성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매니저에게 가자는 손짓을 보냈다.

그가 떠난 후.

나는 참았던 한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왜 저러지?”

옆에 있던 김 실장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평소에는 말도 안 걸던 사람이 왜 갑자기 와서 저러는 거야.”

“내 말이. 드라마를 위해서 저러는 거야, 아니면 그냥 꼬투리를 잡고 싶은 거야?”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너랑 대립신이 있잖아. 그것 때문에 감정 몰입하려고 굳이 와서 이러는 거 아닐까?”

김 실장의 추측에 나는 허공에 손을 저었다.

“말도 안 돼.”

“왜?”

“저번에 말했잖아. 대본 리딩 때, 내가 친해지자고 번호 따러 가니까 실전에만 몰입하면 된다고 무시하면서 거절했던 놈이야.”

김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그건 또 그러네. 그럼 대체 왜 저러는 거야?”

“강찬성은 이해를 하려야 할 수가 없다니까.”

우리를 향해 스태프가 소리쳤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네.”

강찬성으로 인한 화는 이곳에 버려둔 채 마음을 다잡고 현장으로 다가갔다.

***

“컷, 오케이!”

임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순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연달아 찍은 세 컷.

그 신들은 모두 쉴 새 없이 강찬성과 대화를 주고받는 촬영이었다.

차분하고 온화한 대사들이 아닌.

차갑고 날카로운 대사들의 향연이었지.

그 덕에 촬영이 마무리된 지금도 나와 강찬성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고생하셨습니다.”

허리를 접어 스태프들과 강찬성에게 인사를 보내자,

“어.”

강찬성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를 담은 얼굴로 나를 흘겼다.

오늘 그의 태도가 유독 심상치 않았다.

대체 종일 왜 저러는 거지?

진짜 김 실장 말대로 몰입 때문에 나한테 저러는 건가.

덕분에 그를 향한 내 감정은 의도치 않게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이 감정 이대로라면, 마지막 신에서는 애써 몰입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표출되겠는데?

긍정적인 회로를 돌리며 김 실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희성아, 고생했다.”

김 실장이 작은 선풍기를 건네며 말했다.

“고마워, 형.”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강찬성이 원래 싸가지 없기는 했는데, 오늘 좀 더 심한 것 같다?”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손뼉을 부딪쳤다.

“형도 느꼈지?”

“어, 이상해.”

“그러니까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니까.”

김 실장과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혀를 내둘렀다.

“뭘 모르겠는데요?”

불쑥 들어온 목소리에 우리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깜짝이야.”

한소정은 내 놀란 표정을 보며 헤실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소곤거리길래, 제가 온 것도 몰랐던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하.”

한소정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읊조렸다.

“강찬성 씨 때문에 궁금한 거 아니었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마른침을 삼켜냈다.

우리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모양이다.

“…….”

나와 김 실장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는 몸을 우리 쪽으로 기울였다.

“어제 희성 씨가 보조 출연자 어린이한테 핫도그를 줬다면서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맞아요.”

한소정이 더욱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거 때문에 강찬성 씨가 화난 거라던데요.”

“네?”

순간 놀라 큰 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데시벨을 낮췄다.

“쉿.”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핫도그 때문에 화가 났다고요?”

“네, 그렇대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왜요?”

“자기한테 온 간식차 핫도그를 희성 씨가 보조 출연자한테 줬다고. 자기 거로 생색내서 기분 나쁘다고 스태프한테 이야기를 했나 봐요.”

그녀의 말에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 나한테 그렇게 아니꼬운 태도를 보인 거다?”

한소정 역시 강찬성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어이가 없네요. 진짜 유치하게.”

그녀는 내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것 때문에 그런다고 하길래, 희성 씨한테 말해주러 온 거예요.”

“욕하라고 두죠.”

“좀… 그렇죠?”

한소정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강찬성의 생각에 연신 헛웃음이 나왔다.

어제로 돌아간다고 해도.

혹은 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나는 재차 어제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게 잘못된 행동이라고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런 강찬성의 유치한 생각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고작 그런 일 때문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생각할수록 열받네….

***

“하아.”

하루 내내 이어진 촬영에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친 촬영에 진이 빠졌지만.

가장 중요한 마지막 신이 하나 남아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손으로 양 볼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눈을 지그시 감고 심호흡을 했다.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길고 긴 대사에 격한 감정까지 요구되는 신이었다.

대사는 완벽히 숙지했으나, 속으로 다시 한번 대사를 천천히 읊조렸다.

“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스태프의 외침에 감았던 눈을 뜨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번 촬영은 매니저 역인 강찬성과 아이돌인 내가 팽팽하게 대립하는 신이다.

당대에 잘나가는 톱스타인 내가 매니저에게 불만을 토로하며.

감정의 끝으로 치닫는 중요한 신.

중요한 신인만큼 수없이 연습했기에,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후….

집중하자.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눈을 질끈 감았다.

꿈에서 봤던 기억.

내가 톱스타라면… 어떤 톤과 표정을 지을까.

생생한 꿈의 장면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고.

쿵쾅대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눈을 떴다.

눈앞에는 강찬성이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순간.

단숨에 배역에 몰입이 됐다.

주변에 있던 카메라와 스태프들이 점점 멀어져,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평소보다 더 깊은 몰입감에 눈을 희번덕거렸다.

아이돌 배역으로서의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레디, 액션!”

메가폰을 통해 들려오는 임 감독의 목소리에 내 표정은 순식간에 변했다.

무대를 마치고 마지막 계단을 내려온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미노야, 고생했다.”

강찬성은 영혼 없는 말투와 표정으로 형식상 인사를 건넸다.

“그게 다야?”

이마로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물었다.

“고생했다고.”

“하… 이제 모든 게 다 대충이지?”

내가 눈을 흘기며 말하자, 강찬성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만 좀 해라.”

“그만?”

나는 입을 벌린 채 얼굴 근육이 떨리도록 부르르 떨었다.

“지금 나랑 장난해?”

마이크가 터져라 소리쳤고.

내 소리에 주변이 순식간에 얼어붙은 듯했다.

가까이서 얼굴을 찍기 위해 다가오던 카메라가 멈춰 섰다.

순간 이어진 정적.

눈썹은 역팔자로 휘어진 채 촬영장이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형 하나만 믿고 왔는데!”

임 감독은 숨이 멎은 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고.

강찬성의 동공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다 들었어. 형이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가득 차오른 화에 주먹은 터질 듯 쥐어졌고.

그 탓에 얼굴은 물론이고 목까지 새빨개진 채 온몸이 가늘게 떨려왔다.

“나, 네 매니저야.”

강찬성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외쳤다.

“그리고 너보다 나이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쳤다.

“나이 많으면 형답게 행동해. 애같이 굴지 좀 말고.”

강찬성은 말문이 막힌 듯 벌린 입을 파르르 떨었다.

당황한 얼굴로 내 눈을 쏘아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너….”

“형, 좋은 말로 할 때, 그 입 다물어.”

가소롭다는 듯 강찬성을 흘려보고.

한쪽 입꼬리를 쓰윽 비틀어 올렸다.

“……!”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강찬성.

애드리브는 단 한 글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배역에 온전히 몰입해 그를 대했을 뿐.

강찬성은 아랫입술을 터질 듯 깨물었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소를 보냈다.

이글거리는 눈빛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강찬성에게 무시하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이내 임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컷, 오케이!”

임 감독의 오케이 사인에 몇몇 스태프는 제자리에서 손뼉을 부딪쳤다.

나는 긴 숨을 내쉬며 빳빳하게 굳어 있던 목을 풀어냈다.

그러나 강찬성은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양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이야! 희성 씨, 나 깜짝 놀랐네?”

임 감독은 차마 내려놓지 못한 메가폰을 쥔 채 내게 다가왔다.

“내가 딱 원했던… 아니, 그보다 더 연기를 잘했어.”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옆에 스태프는 진짜로 싸우는 것 같아서 손에 땀까지 났다니까?”

“그런가요?”

“그렇다니까! 싸가지 없는 연기 최고네!”

임 감독은 연신 감탄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대체 어디서 연기를 그렇게 배운 거야?”

“저요?”

임 감독은 궁금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의 물음에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눈썹을 들썩였다.

“주변에 귀감이 될 사람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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