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11 –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 (3)
임 감독의 부름에 우리의 시선은 일제히 강찬성을 향했다.
패딩 소매를 잡으며 짜증을 내던 강찬성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임 감독의 부름에 그나마 표정을 풀었다.
“예, 감독님.”
임 감독이 곧장 답하지 않자 정적이 이어졌다.
찰나의 1초, 1초에 촬영장의 기온은 1도씩 내려가는 듯했다.
다른 곳도 아닌 현장에서 짜증 섞인 말투로 소리를 질렀으니.
임 감독도 화가 났을 터.
그런 예상과 달리.
임 감독은 강찬성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날씨가 너무 덥죠?”
그 모습에 미간이 자동적으로 찌푸려졌다.
꾸지람을 할 줄 알았는데, 온화한 말투라니.
강찬성은 임 감독의 태도에 눈썹을 들썩였다.
“찬성 씨, 더워도 조금만 참아요. 크롬볼 신은 또 빨리 찍잖아.”
임 감독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고.
그의 얼굴에는 땀 한 방울과 애써 미소를 짓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강찬성은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날씨에 패딩 두 겹을 입으니까…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는 손으로 패딩을 흔들거리며 더움을 표출했고.
임 감독은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래요. 금방 할게.”
역시 연예계 바닥은 인기가 모든 척도의 기준이다.
강찬성의 저런 예의 없는 행동에도 화는커녕 타이르고 감싸주는 모습이라니.
심지어 이 현장의 가장 높은 감독조차 강찬성에게 쩔쩔매는 태도에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인기가 많으면 자신이 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런 모습을 보면 나도 꼭 톱스타가 되고 싶었다.
내가 하루빨리 톱이 되어 저런 행동을 따라 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저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정상에 올라 갑질 따위는 하지 않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이 더욱더 간절해졌다.
이런 꼴사나운 일을 수도 없이 많이 봐왔으니까.
“자… 레디, 액션!”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임 감독은 손으로 햇살을 막으며 외쳤다.
“컷, 오케이!”
크롬볼 촬영은 몇 번의 시도 만에 오케이를 받았다.
10초면 끝날 촬영이었지만.
강찬성의 불같은 화로 스태프들이 긴장한 탓에 거의 1분 가까이 촬영을 이어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신이 마무리되자마자 나는 허리를 접으며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보냈다.
함께 신을 찍은 단역 배우와 눈을 맞추며 인사하던 순간.
강찬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의 매니저를 찾았다.
그의 눈빛에서는 폭발하기 직전의 언짢음이 가득 차 있었고.
얼굴을 보았는지 강찬성의 매니저가 급히 달려왔다.
“찬성아, 고생했다.”
매니저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던 강찬성은 재빨리 패딩 두 개를 연달아 벗더니,
“어우, 더워!”
화를 내듯 매니저에게 패딩을 휙- 던지며 촬영장을 벗어났다.
공손히 준 것도 아니고 내팽개치듯 던진 패딩은 당연히 매니저의 손에 잡히지 않았고.
떨어지려는 패딩을 매니저가 겨우 잡아냈다.
강찬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신의 땀을 닦으며 차로 유유히 걸어갔다.
***
뜨겁던 해는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었고.
촬영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컷, 오케이!”
한 신이 끝나고 찾아온 쉬는 시간.
환복을 위해 차로 돌아가자 김 실장이 나를 반겼다.
“희성아, 다음 신은 한 시간 정도 쉬었다가 간대.”
“그래?”
나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으며 답했다.
“잘됐네. 출출했는데 간식 좀 먹고 연습하면 되겠다.”
연달아 이어진 촬영에 굶주린 배를 손으로 쓸었다.
“아, 맞다!”
배를 만지는 나를 보며 김 실장이 손가락을 튕겼다.
“왜?”
“오늘 간식차 왔더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김 실장은 입꼬리를 올렸다.
“오오, 정말?”
“응, 핫도그 간식차 왔던데, 먹을래?”
촬영장에는 커피차, 간식차 등 생각보다 자주 이런 이벤트가 일어난다.
촬영하는 배우들이 직접 현장에 동료나 스태프를 위해 보내는 일도 있지만.
주로 배우의 팬들이나, 혹은 배우의 지인들이 현장에 간식차를 보내는 일이 많은 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가자.”
김 실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야, 쉬고 있으면 가져다줄게.”
“괜찮아. 같이 가지, 뭐.”
“그럴래?”
김 실장과 나는 동시에 차에서 내렸다.
저 멀리 보이는 간식차.
“형, 오늘은 어디서 누구한테 보낸 거야?”
“강찬성 팬클럽에서 보내준 거래.”
어쩐지.
연신 역정을 내던 강찬성이 방금 찍은 마지막 신에서는 달랐다.
갑자기 짜증을 한 번도 안 내길래, 무슨 좋은 일이 있나 했더니만.
바로 팬들이 보내준 간식차 덕분이었던 걸까?
강찬성이 짓던 미소를 회상하며 조소를 머금었다.
하긴, 팬들이 자신을 위해 간식차까지 보내줬는데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겠지.
걸어갈수록 코를 찌르는 핫도그 냄새.
김 실장이 감탄사를 뿜어내며 말했다.
“이야, 강찬성은 기분 좋겠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코를 찡긋거렸다.
“냄새 죽인다.”
“나도 너 오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하하.”
김 실장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전 스태프가 쉬는 시간이라 그런지 간식차 앞에는 대기 줄이 어마어마했다.
나와 김 실장이 마지막 줄 뒤로 섰고.
그때 강찬성이 매니저와 함께 간식차를 향해 걸어왔다.
웃음을 머금으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그를 흘긋 확인하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강찬성은 내 뒤가 아닌.
나를 당당하게 지나쳐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길게 뻗어 있는 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맨 앞으로 다가가 자연스레 핫도그를 받아들었다.
강찬성을 응원하기 위해 온 간식차인 것은 알지만.
한참을 기다린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쓰읍- 소리를 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강찬성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입간판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러곤 멀리서도 치아가 보이도록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그의 양손에는 핫도그가 여러 개 쥐어져 있었고, 그걸 모두 양 볼에 가져다 대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카메라를 손에 든 매니저가 강찬성을 쉴 새 없이 찍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연이어 눌리는 셔터.
강찬성은 핫도그를 접시에 올려두고 손짓으로 매니저를 불렀다.
“형, 찍은 거 봐보자.”
“응, 여기.”
매니저는 강찬성에게 달려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고.
사진을 본 강찬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에이… 나 눈 감았잖아. 그리고 이건 왜 이렇게 또 짧아 보이게 찍었어!”
손으로 사진을 넘기던 강찬성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좀 아래서 찍어. 배우 매니저가 이런 거 하나도 제대로 못 해서 어떻게 해.”
“아… 미안.”
강찬성은 눈을 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꼴랑 두세 장만 찍으면 되는 건데. 한 번에 잘 좀 찍자, 형.”
“…다시 찍을게. 미안하다.”
“빨리 다시 찍어.”
매니저는 다시 뒤로 달려가 카메라를 들었고.
강찬성은 내려놓았던 핫도그를 들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런 강찬성의 태도에 절로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옆에 있던 김 실장 역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서로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각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형, 이제 영상으로 찍어.”
“응, 바로 찍을게!”
강찬성은 자신의 이름이 크게 적힌 플래카드와 입간판 옆에 섰다.
“오늘도 여러분 덕분에 촬영장에서 기가 팍팍 살았어요. 벌써 핫도그도 열 개는 먹은 거 같은데, 하하.”
그는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눈웃음을 지었다.
“제가 핫도그 좋아하는 거 딱 알고 보내준 우리 팬분들! 고맙고, 사랑해요.”
강찬성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손으로 하트를 마구 뿜어냈다.
팬들의 사랑 덕분에 한껏 올라간 강찬성의 어깨.
이내 눈짓을 보내자 매니저가 카메라를 내렸고.
올라가 있던 강찬성의 입꼬리도 동시에 내려갔다.
덧붙여지는 그의 메마른 목소리.
“끝났지?”
“응.”
“어휴, 귀찮다.”
그때.
“저… 희성 님, 먼저 핫도그 받으세요.”
내 앞에 서 있던 단역 배우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그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어우, 괜찮습니다. 먼저 받으세요.”
단역 배우는 목례로 화답했고, 강찬성과 매니저는 우리의 옆을 지나갔다.
그와 마주친 스태프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찬성 씨, 잘 먹을게요.”
“네, 많이 드세요. 하하.”
한참을 기다린 끝에 받은 핫도그.
김 실장과 나는 핫도그를 하나씩 손에 들고, 간식차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
“우리, 촬영까지 시간 좀 있나?”
내 물음에 김 실장은 손목시계를 보며 답했다.
“어, 한참 남았어. 왜?”
“그럼 우리 차 말고, 주변에 산책 좀 하면서 먹을까?”
“좋지.”
하루 내내 촬영 아니면 차에 앉아 있기에 이럴 때라도 걸으며 쉬고 싶은 마음이었고.
그 마음을 알았는지 김 실장 역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웅성거리던 간식차 쪽에서 멀어지자, 한구석에 무리가 모여 있었다.
촬영 쉬는 시간인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식차 쪽에 있는데, 왜 저기에 저렇게 모여 있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무리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들려오는 목소리.
“자, 여러분! 오늘 저녁까지 촬영하고 다 같이 서울로 가면 되니까 조금 쉬실게요.”
몇 마디를 듣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엑스트라 배우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소리치고 있는 저 사람은 보조 출연 반장이라는 것.
나 또한 연기의 시작은 엑스트라부터였다.
그 시절이 떠올라 아련하게 그들을 바라보던 그때.
한 배우가 질문을 던졌다.
“저기 간식차에 있는 핫도그는 언제 받으러 가면 되나요?”
그의 질문에 반장이 입을 열었다.
“저건 먹으면 안 됩니다.”
“네?”
“저기 있는 간식차는 배우들이랑 스태프들 숫자에 맞춰서 온 거라고 하네요. 그러니 여러분은 먹지 마세요.”
반장의 말에 질문을 던졌던 배우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었다.
원래 밥차를 제외하고 간식차나 커피차 같은 경우엔 최소 단역 배우 이상만 가능하니까.
보조 출연 반장은 손가락으로 테이블 하나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저쪽에 보면 단팥빵이랑 크림빵 사놨으니, 배고프면 저거 하나씩만 가져다 드시면 됩니다.”
반장은 손뼉을 한 번 부딪치며 말을 이어갔다.
“그럼 자유롭게 쉬시다가 촬영 전까지 다시 여기로 모이세요!”
반장이 자리를 떠나자 몇몇 배우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저 단팥빵이랑 크림빵은 맨날 똑같아.”
“그러게요. 핫도그 냄새가 이렇게 진동하는데, 먹을 거 가지고 참….”
“별수 있나요. 저 빵이라도 드시죠. 촬영하려면 배고플 텐데.”
“맞아요.”
배우들은 먼지가 가득 묻은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애써 한숨을 삼켜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혹시나 내가 현장에 간식차를 보내게 되면, 꼭 수량을 넉넉하게 보내야겠네.
시선을 겨우 돌려 앞을 향해 걸어갔다.
쿵.
코너를 돌자마자 달려 나온 어린 꼬마 아이가 내 다리와 살짝 부딪쳤다.
깜짝 놀라 허리를 접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괜찮니?”
“…네.”
꼬마는 놀란 마음보다 내게 혼날 거라고 생각했는지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안 다쳤어?”
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게 부딪치지는 않았으니, 그저 놀랐을 거라는 생각에 아이를 살폈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 바라보는 도중.
꿀꺽.
아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내 귓가에까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시선 끝에는 내 손에 들린 핫도그가 있었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핫도그를 꼬마 아이에게 내밀었다.
“이거 먹을래?”
그제야 활짝 미소를 짓는 아이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아직 입도 대지 않은 상태의 핫도그를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자, 맛있게 먹어.”
“고맙습니당. 헤헤.”
헤실거리며 핫도그를 받아든 아이는 바로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
강찬성은 금색 자수로 ‘강찬성’이라는 글씨가 박힌 의자에 앉아 휴대 전화를 열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매니저가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 이 사진이랑 이 사진 중에 어떤 게 더 나아?”
“나는 두 번째 사진이 더 나은 것 같아.”
“그래?”
그의 말에 강찬성이 입술을 내밀며 답했다.
“나는 첫 번째 거가 더 잘 나온 것 같은데?”
“듣고 보니까, 그게 더 잘생기게 나왔네.”
매니저의 말에 강찬성은 눈을 흘기며 다시 휴대 전화를 바라보았다.
“뭐야, 이랬다저랬다.”
강찬성은 SNS에 접속해 게시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팬들이 보내준 간식차는.
타이핑을 하던 강찬성의 귓가에 들려오는 아이의 웃음소리.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이내 그의 시선에 아이가 들어왔고.
매니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쟤 아까 나랑 촬영했던 보출들 아니야?”
“맞네. 옆에 사람들도 다 보조 출연자야.”
강찬성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매니저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쟤가 왜 핫도그를 먹고 있어?”
그의 말에 매니저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그러게. 보출 반장한테 핫도그 먹지 말라고 전달했는데….”
강찬성의 옷을 매만지던 스타일리스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저거 진희성 씨가 줬을걸요?”
곧 강찬성의 미간에 주름이 지어졌다.
“진희성이 왜?”
“뭐 대충 들어보니까, 들고 가다가 애가 먹고 싶어 하길래 줬다고 하던데요?”
강찬성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뭔데 내 거로 지가 인심을 써?”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화를 삭이듯 한숨을 내쉬었다.
‘진희성 저 새끼… 좀 불쾌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