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11 –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 (2)
팟-
꿈이었다.
혹여나 눈을 감으면 꿈이 이어질까 봐 재차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의 기억.
탑을 쌓아 올렸던 것도.
그 탑을 쌓아 올릴 때 함께 지내던 신하들도.
그리고 결국 신과 만났을 당시의 기억과 내게 내려진 벌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신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는 고통스러움이 극에 달했다.
잠깐만.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계속해서 꿨던 꿈들이 전부…?
…미친.
이 모든 게 그때 신에게 받은 벌 때문이라는 거잖아.
차분히 하나씩 퍼즐 조각을 맞추듯 기억들을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신에게 벌을 받았을 때부터, 일제 강점기의 기억.
대학교수로 있던 것.
아이돌로 지냈던 것.
영업 사원의 모습까지 모두.
그 꿈들은 허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긴.
무려 1만 년 가까이나 살아왔으니….
10년마다 새로운 생을 살게 되는 것이고, 그런 일을 무려 천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 벌.
천 번 동안 같은 삶, 같은 직업으로 살지는 않았을 터.
즉, 겪어보지 않은 시대와 직업이 없었을 거란 말이지.
모든 기억이 촤르르 머릿속에 그려졌고.
이제 내 생, 내 삶이 모두 이해가 됐다.
“아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지만,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벌 받은 천 번의 생 중.
무려 999번의 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진희성’이라는 생이 내 마지막 천 번째의 생인 것.
그동안 꿈을 꾸며 의문을 가졌던 그 모든 질문의 해답이 쏟아졌다.
일제 강점기를 더불어 그런 꿈들을 꾸고 나면, 이상하리만큼 그 배역에 몰입이 되었다.
마치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처럼.
혹은 그 시대의 사람으로 빙의가 된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그게 내가 겪어온, 그러니까 내 삶이었던 것이지.
살았던 경험을 몸으로 기억하기에, 그 시대 사람처럼 연기가 가능할 수밖에 없었겠지.
게다가 저번에 꾸었던 아이돌 꿈에서 보았던 권찬이라는 아이돌도 나라는 뜻일 터.
권찬.
그 잘나가던 가수가 10년 만에 갑자기 요절했다.
그것 역시 신이 내린 벌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 게지.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계속 생각을 이어갔다.
꿈에서 보았던 내 모든 기억들이 전생인 걸 알았고.
현재 내가 벌을 받고 있는 과정이라는 것도 충분히 알았다.
이번 생이 마지막 생이라….
하나 머릿속에 정리가 됐을 뿐.
사실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저 배우로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앞섰다.
솔직히 말해서 앞선 999번의 삶에서 지금처럼 삶 자체가 벌이라는 걸 알아챘을지, 아닐지는 모르겠다.
이번 삶이 천 번째라서 알게 된 건지.
매번 알았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
알아냈다고 한들, 그때마다 나는 현실을 열심히 살았을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 많은 걸 고려하기보다는 지금의 삶에 충실하고 싶을 뿐.
지금의 나는 메세우스가 아니라, ‘진희성’으로 살아가고 싶으니까.
그래, 정신 차리자.
***
드라마 ‘연예계 엑스트라’의 촬영 크랭크인 날이 밝아왔다.
집에서 내려오자마자 보이는 김 실장의 차.
김 실장은 차로 걸어오는 나를 발견했는지 밴의 뒷문을 열어주었다.
“희성아, 왔어?”
“응, 오래 기다렸어?”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방금 도착했는데, 딱 맞춰서 나왔네.”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채우자마자 차는 현장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김 실장은 룸 미러를 통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컨디션은 좀 어때?”
“좋아.”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항상 첫 촬영이라는 말에 긴장이 되었지만.
수없이 연습한 뒤에는 그 마음이 설렘으로 바뀌게 된다.
오늘 역시 불안함을 동반한 긴장이 아닌, 새로움이라는 떨림과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달리는 창밖을 바라보니 앙상하던 나뭇가지에 이제 하나둘 푸르른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에 걸맞게 날씨도 따뜻해지고 있었다.
입고 있던 두꺼운 패딩을 벗으며 혼잣말하듯 입을 열었다.
“이제 날씨가 진짜 따뜻해졌다.”
김 실장은 운전에 집중하며 답했다.
“어, 어제까지는 진짜 추웠는데, 오늘 갑자기 날씨가 풀렸더라.”
“그러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패딩은 필수였는데, 오늘부터는 안 입어도 되겠어.”
김 실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첫 촬영이라고 날씨도 도와주나 보네. 하하.”
“그러게.”
창밖의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왠지 기운이 좋은 날이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촬영 현장.
뭉그적거릴 것 없이 곧장 차에서 내렸다.
“안녕하십니까.”
가장 먼저 저 멀리에 보이는 임 감독을 향해 달려가 허리를 접었다.
“어, 희성 씨 왔어?”
임 감독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오늘 잘 찍어보자고.”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할 일이 많은 임 감독은 인사 후 곧장 자리를 떠났다.
이후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하기 위해 한참을 돌았다.
현장에 도착하고 이십여 분을 인사만 하던 중.
차 앞에서 손을 뻗어 흔드는 김 실장의 모습.
한 손에는 의상이 들려 있었다.
촬영 의상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모션에 나는 손을 크게 들고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오늘 단체로 나오는 촬영인가?”
“그러게요. 아까 들어보니까….”
김 실장에게 걸어가던 와중에 웅성거리는 소리.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자마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단역 배우들이라는 것을.
나 역시 얼마 전까지 매니저 없이 저 무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으니까.
그들 앞을 지나가며 생각에 잠겼고, 그러다 한 명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고.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안녕하세요.”
그러자 나머지 단역 배우들도 몸을 돌리며 내게 인사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예, 반갑습니다.”
몇십 분간 인사를 하기 위해 돌아다녔지만.
이 인사를 가장 밝고 환한 얼굴로 답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을 때, 지나가는 배우들을 바라보며 인사하고는 했으니까.
그때 지나가며 따뜻하게 인사해주는 선배와 차가운 선배들의 태도가 모두 선명하다.
그런데 세상도 그걸 알아주는지, 따뜻하게 맞이해주던 선배 배우들은 대부분 성공해 현재 잘나가고 있고.
내게도 여전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도 그런 좋은 선배가 되고 싶었기에, 이들에게 누구보다 따뜻하고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환복을 한 뒤, 다시 나온 현장.
곧바로 강찬성을 태운 커다란 밴이 도착했다.
강찬성은 미소조차 없는, 굳은 얼굴로 주변을 살피지도 않은 채, 곧장 임 감독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임 감독에게 인사를 한 뒤, 매니저와 다시 차로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나는 현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뒤쪽으로 빠져 있었고.
강찬성은 매니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앞을 바라보며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형, 어제 갔던 그 식당에서….”
그때, 단역 배우 무리가 고개를 숙이며 강찬성을 향해 소리쳤다.
“안녕하십니까!”
그들의 목소리는 옆에 서 있던 내 귀에까지 정확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강찬성은 그들을 흘긋 보기만 할 뿐, 다시 매니저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거기서 봤던 그 사람….”
인사를 받아주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꾸조차 해주지 않은 채였다.
매니저 역시 그런 모습이 익숙한지 함께 앞만 보며 걸어갔다.
그 모습에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본 리딩 때 봤던 그 인성 그대로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길래 인사 하나 못 받아주는 거지?
아니, 그걸 떠나서 인사를 받아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강찬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때.
“와아! 강찬성 진짜 싸가지 없네.”
인사를 무시당한 단역 배우 한 명이 내 쪽으로 걸어오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고.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헉, 죄송합니다.”
놀란 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내게 사과를 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는 당황한 눈으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고.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내 대답에도 그는 진정이 되지 않는지 지진이 난 듯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단역 배우 시절에는 작은 것 하나하나가 연기로 이어진다.
지금 상태로 촬영에 들어간다면, 이 배우는 바로 실수할 수밖에 없을 터.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방금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제 욕은 하시면 안 돼요. 하하.”
내 말에 떨리던 그의 몸이 어느 정도 진정되는 듯 보였다.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뒤를 돌았고, 단역 배우는 나를 향해 허리를 접었다.
***
“희성아, 오늘 찍는 신에 크롬볼 있어.”
김 실장이 대본에 적은 내용을 보여주며 말했다.
“바로 다음 신에서?”
“응, 맞아.”
“저 신에서 CG가 어디에 들어가는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 실장은 손으로 대본에 적힌 내용을 가리켰다.
“원래 대본에는 없던 건데, 추가된 거라고 하더라.”
“아, 어쩐지. 내가 대본 볼 때는 없었거든.”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크롬볼 몸 가운데로 들고 있으면, 거기에 CG로 물체를 삽입할 거라고 하니까 체크해둬.”
“그럴게.”
김 실장이 건네준 추가 대본을 읽기 시작했고, 그는 쓰읍 소리를 내며 내게 물었다.
“근데 희성이 너 크롬볼은 어떻게 하는 건지 알지?”
그의 말에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럼, 예전에 단역 촬영할 때 한번 해봤어.”
“그래도… 혹시 모를 수도 있으니까.”
김 실장은 내 말에도 걱정이 됐는지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딱 이 자세로 최소 5초에서 10초 동안 가만히 서 있어야 해.”
“하하, 알았어, 형.”
김 실장은 크롬볼을 든 모습 그대로 10초 동안 모션을 취했다.
그러더니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하아, 오늘 왜 이렇게 덥냐.”
“맞아. 이제 봄이 시작된 건데 이렇게 더워졌어.”
“희성이 너는 다음 신에서 두꺼운 패딩 입고 촬영하니까 더 덥겠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이 날씨에 롱 패딩을 꽉 껴입고 찍으려니까 벌써 땀난다.”
그때,
“슛 들어가겠습니다!”
조 감독이 현장에서 외치는 소리에 나는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하니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서 있는 강찬성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신에서는 한겨울임을 보여주기 위해 모두 경량 패딩에 롱 패딩까지 껴입은 모습.
강찬성은 누가 봐도 덥다는 얼굴을 보여주듯 짜증이 가득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상대방의 기분까지 덩달아 안 좋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임 감독은 의자에 앉은 채 메가폰을 쥐고 외쳤다.
“레디, 액션!”
촬영이 시작되자, 강찬성의 얼굴은 급변했다.
“미노야, 오늘 무대 진짜로 중요한 거 알지?”
강찬성은 우수에 찬 눈빛으로 내게 부탁하듯 말했다.
“알아, 대체 몇 번이나 말하는 거야.”
나는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귀를 비비며 답하자, 앞에 있는 단역 배우가 입을 열었다.
“다음 무대 준비해야… 하셔야 합니다.”
“컷, NG!”
단역 배우의 대사 실수였다.
한 줄의 짧은 대사였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임 감독은 메가폰에 대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자, 다시 바로 가볼게요.”
나는 어깨를 풀며 다시 시작될 촬영 준비를 했고.
강찬성은 낮은 목소리로 작게 읊조렸다.
“더운데, 제대로 좀 합시다.”
그의 말에 단역 배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네, 죄송합니다.”
“다시 레디, 액션!”
연기는 재차 시작됐고,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등줄기에는 땀이 흥건하게 흘렀다.
“컷, 오케이!”
단역 배우의 연이은 실수로 신은 세 번 만에 겨우 오케이를 받아냈다.
임 감독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 감독이 소리쳤다.
“바로 크롬볼 찍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롬볼을 받았고.
그때.
강찬성이 짜증 가득한 얼굴과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씨, 덥다고!”
뜨겁던 현장은 그의 한마디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임 감독은 메가폰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저기, 강찬성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