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11 –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 (1)
강찬성, 싸가지 없는 새끼.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길래, 면전에 대고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지?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그는 내 기분과 표정은 안중에도 없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돌렸다.
김 실장이 당부한 대로 강찬성이 까칠한 성격임을 예상했음에도.
그의 태도와 예의는 내 상상 그 이상이었다.
너무나 기분이 상했지만, 이 자리에서 그에게 뭐라고 쏘아붙일 수는 없었다.
사람들도 많았을뿐더러, 오늘 모두가 처음 만난 이 자리.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가슴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냉수를 부은 듯 차갑게 식혀냈다.
“아, 네.”
화를 겨우 삭이고 내뱉은 내 말과는 달리.
강찬성은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자기가 기분이 나쁘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뭐야, 아직도 있어?”
곁눈질로 나를 한번 쓰윽 훑어보고는 혼잣말로 구시렁거렸다.
“대본 리딩 연습해야 하는데, 좀 가라.”
“…죄송합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코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머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아주 뜨거운 스팀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듯했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에 굳은 뒷목을 주무르며 대본 리딩실을 빠져나왔다.
“희성아.”
문을 열고 나오자 환한 얼굴로 나를 반기는 김 실장이 서 있었다.
“형, 여기 있었어?”
“아니, 계속 밖에 있다가 잠깐 들어왔어.”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내게 물었다.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김 실장은 심각한 얼굴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역시.
종일 나와 붙어 있는 김 실장은 내 표정만 보아도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을 단숨에 알아낸 모양이다.
그의 질문에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형, 강찬성 말이야….”
주변에 있던 누가 들을세라 우리는 한쪽 모퉁이로 걸어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설마 강찬성이랑 무슨 일 있었어?”
김 실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걔 까칠하고 성격 좀 그렇다고 주의 줬잖아.”
김 실장에게 조금 전 대본 리딩실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자.
그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꽉 감았다.
그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내 이야기에 그도 화가 났을 터.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 거지?”
“그러게. 나 진짜 어이가 없었다니까.”
김 실장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답했다.
“걔랑 어지간하면 엮이지 마. 소문보다 더 심한 것 같네.”
“그래야겠어.”
그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 손목시계를 보며 김 실장에게 말했다.
“형, 나 들어가 봐야겠다.”
“어, 앞에서 기다릴게. 잘하고 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내주는 김 실장을 뒤로하고 다시 대본 리딩실로 향했다.
***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기나긴 대본 리딩도 마무리가 되었다.
다들 손을 뻗어 기지개를 켜며 몸을 움직였고.
펼쳐져 있던 대본을 하나둘 접으며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임 감독이 손뼉을 한 번 세게 부딪치며 외쳤다.
“오늘 수고했고, 다들 대본 리딩했던 감 잃지 말고 쉬었다가 첫 촬영 날 만납시다.”
“네!”
임 감독의 말에 다들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렇게 나갈 준비를 마쳤지만, 누구 하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회사에서 퇴근 시간이 됐음에도 상사가 먼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눈치 싸움처럼.
그때.
강찬성이 의자를 삐걱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모든 이들의 시선은 그를 향했다.
강찬성은 고민할 것도 없이 앞만 보고 임 감독에게로 걸어갔다.
“감독님,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찬성 씨 고생했어. 촬영 날 봅시다.”
그는 임 감독을 향해 고개를 숙인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본 리딩실을 빠져나갔다.
그 어떤 배우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아무리 톱 배우라지만 예의는 밥 말아 먹은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 아까 내게 그런 식으로 대했겠지.
그가 훌쩍 떠나버린 후.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나누며 자리를 비워나갔다.
“희성 씨.”
그때, 한소정이 내게 다가왔다.
“네, 소정 씨. 오늘 고생했어요.”
“아녜요.”
그녀는 주변을 쓰윽 살펴보며 내게 몸을 기울였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까 강찬성 씨 때문에 당황하셨죠?”
한소정도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봤기에 내가 신경 쓰인 듯했다.
애써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한데, 괜찮아요.”
그녀는 할 말이 더 남았는지, 내 옆자리 의자를 빼내며 말을 이어갔다.
“아까 희성 씨 나가셨을 때, 제 번호는 가져가더라고요.”
“정말요?”
그녀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뭐지, 싶은 마음이기는 했는데….”
내게는 현실에서까지 무슨 몰입이네, 어쩌네 하더니.
한소정의 번호는 굳이 받았다라….
대충 어떤 놈인지 사이즈가 나오는 거 같기도 하고….
여자인 한소정의 번호만을 저장했다는 사실에 기분 나쁜 실소가 지어졌다.
“뭐, 강찬성은 강찬성이고.”
일그러져 있던 표정을 풀어내며 미소를 장착했다.
“우리는 이번 드라마도 별 탈 없이 잘해봐요.”
한소정은 내 말에 빙그레 눈웃음을 지으며 얼굴 쪽으로 양 주먹을 쥐고 외쳤다.
“네, 파이팅!”
***
휘이익.
얼굴로 불어오는 거센 바람.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흙모래로 둘러싸인 이곳.
뭐야, 대체 여기는 어디….
깊게 생각하기도 전, 불어오는 바람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잠깐.
날숨에 나가는 코로 나가는 공기가 없다.
이건… 확실하다.
지금 나는 꿈속이다.
꿈인 것을 알아차렸지만, 강하게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에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열심히 걷고 있던 내 두 발걸음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메세우스 님, 이제 탑이 꽤 높은 곳까지 쌓아 올라갔습니다.”
뒤에서 따라오며 외치는 목소리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아직 멀었다.”
나는 거센 바람을 이겨내며 탑으로 향했고.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앞까지 걸어와 내 발길을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고개를 조아리며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물어보아도 된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탑은 어디까지 쌓아 올리시려는 겁니까?”
“음… 내가 묻지. 탑을 왜 쌓는지는 알고 있는가?”
그는 바닥을 향해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그 모습을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자,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신…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이라….”
“예, 지난 대홍수처럼 다시 신이 물을 휘몰아친다고 해도 높은 탑에 있다면 또다시 세상에 잠기지는 않을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노아의 대홍수.
신은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켰다.
그로 인해 온 세상이 물에 잠겼었지.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내가 탑을 쌓아 올린다고는 할 수 없었다.
“또?”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유가 더 있는 것입니까?”
“신의 심판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고개를 푹 숙였고.
나는 그의 턱을 손으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도시와 천국.”
그는 내 말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굳게 입을 닫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탑을 높이 쌓아 천국에 가까워질 것이다.”
내 말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연신 깜빡였다.
“그리고 재차 신의 심판이 열려도, 우리가 다시 흩어지는 일이 없게 만들 것이야.”
그는 내 말이 끝나자 서둘러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그대로 그를 지나쳐 쌓아 올라가는 탑을 향해 재차 걷기 시작했다.
탑을 쌓아 올리는 일.
탑을 하늘 높이 쌓아 올려야만, 재차 신이 우리를 심판한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반드시 저 탑은 신에게까지 다가가야 한다.
탑에 다다르자 모든 신하들이 탑을 올리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제자리에서 고개를 끝까지 들어, 높이 치솟은 탑을 바라보았다.
“정말 하늘에 닿을 것 같구나.”
“예, 이제 정말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더욱 속도를 내야 한다. 신에게 가는 길…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네, 모든 힘을 모아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내 곁을 떠나 탑을 짓는 곳으로 달려갔다.
오랜 고심 끝에 결심한 탑.
그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천국에 다다르는 그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가.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탑의 꼭대기가 천국에 닿는 순간.
비로소 나는 신과 같은 선상에 설 수 있는 것이다.
탑의 한 바퀴를 천천히 돌며 그동안의 각오를 되새김했다.
해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고.
홀로 남아 있는 이곳.
왜인지 모르게 스산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들었다.
싸아아-
또다시 부는 모래바람인가?
고개를 돌렸지만, 그 어디에도 모래바람이 일고 있지 않았다.
대체 무슨 소리지?
싸한 느낌에 주변을 바라보니, 온데간데없어진 탑.
그리고 모래가 아닌 새하얀 바닥.
잠깐만.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도 없어졌다.
그저 사방의 모든 면이 새하얀 곳.
뭐야, 대체 이게 무슨….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 수가 없구나.”
낮게 깔린 목소리.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누구냐!”
내 말에도 대꾸가 없었고.
울부짖듯이 목 놓아 외쳤다.
“무서운 것이냐. 당장 모습을 나타내라!”
순간.
내 눈앞에는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눈부신 아우라를 뿜으며 새하얀 옷을 입은 신이 나타났다.
신을 본 적은 없었으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신’이라는 것을.
“메세우스, 네가 감히 탑을 쌓아 올려, 신에게 닿으려고 했느냐.”
낮게 깔린 신의 목소리가 내 귀를 강타했다.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한참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신과 동등해지기를 원한다니, 교만하기 짝이 없구나.”
화가 난 그의 얼굴을 보았지만, 굴복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가 비록 ‘신’일지라도.
나는 가슴을 쭉 펴고 소리쳤다.
“당신들도 인간들과 다를 바 없잖아.”
내 말에도 그의 굳은 표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업신여기는 저 얼굴.
분노에 가득 차 붉어진 얼굴로 더 크게 외쳤다.
“신은 그저 선택받은 존재들 아니야?”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아우라의 색이 점차 변해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오묘한 색에서 서서히 검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고.
신이 소리쳤다.
“감히 오만하게 신에게 닿으려 한 죄. 너에게 벌을 주마.”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움직였고.
동시에 내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압도적인 강한 무언가.
다리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무릎 꿇려졌고.
나는 그에게 굽히지 않기 위해 온 힘을 쏟아냈다.
신의 힘을 거스르기 위해 발버둥을 치자 내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턱을 한번 쳐들자, 곧장 내 머리가 바닥을 향해 숙여졌다.
젠장.
아무리 머리를 들려 해도, 꿇린 무릎을 펴내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을 향해 울부짖었다.
“내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는 결코 굴복하지 않겠….”
순간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읍읍…!”
누군가가 단단하게 꿰맨 듯 입술이 닫혀버렸다.
입을 열고 싶었지만, 아무 소리도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그저 굳게 닫혀버린 입 안에서만 소리를 외치고 있을 뿐.
아무런 대꾸도 전달되지 않았다.
“살고 싶으냐.”
신은 내게 물었고.
나는 굳어버린 몸과 닫힌 입을 풀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끌어냈다.
하지만 그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았고.
신은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나를 보며 소리쳤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다는 걸 느끼게 해주마.”
알 수 없는 그의 말.
어찌 사는 게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울 수가 있단 말인가.
“10년씩 1천 번의 생.”
생이 1천 번이라고?
말을 내뱉지 못한 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저게 대체 무슨.
그의 말을 해석하기도 전에, 신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렇게 너는 1만 년을 살게 될 것이다.”
역팔자로 세워진 눈썹과는 반대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신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지.”
그 말을 끝으로 신은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손을 휘휘 저어봤지만, 앞에 있던 신은 온데간데없었다.
거짓말처럼 다시 입이 열렸고.
목 놓아 소리쳤지만, 신은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벌을 내린 ‘10년씩 1천 번의 생, 1만 년 삶’이라는 말만 머릿속에서 뱅뱅 맴돌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