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42)화 (42/303)

42화 #10 – 둘 중 하나가 아닌 (4)

“형, 여기 끝부분 대사만 다시 맞춰볼 수 있나?”

김 실장은 내 말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 마지막 줄 말하는 거지?”

“응.”

“흠흠.”

김 실장은 대사에 앞서 목을 가다듬었다.

항상 국어책을 읽듯 대사를 맞춰주던 김 실장은 어느 순간부터 나를 위해 연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대사를 맞춰주는 상대역이 그저 글씨만을 읽는 것보다는 말하듯 읽어주는 편이 나았으니까.

그의 노력 덕분에 나 역시 연습임에도 더 쉽고 빠르게 몰입할 수 있었고.

김 실장 또한 늘어가는 내 실력에 뿌듯해하고 있었다.

“미노 씨가 거기서 팬들에게 소통을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김 실장은 나름 노력한 실력으로 열연을 펼쳤다.

“그럼 거기서 제가 뭘 할 수 있단 말이죠?”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화를 참아냈다.

“그러니까…!”

똑똑.

그때, 노트와 함께 열리는 문.

김 실장은 대본을 읽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김 실장.”

살짝 열린 문으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사람.

바로 이호열 실장이었다.

아직 일을 같이한 적은 없지만, 항상 회사에 출근했기에 사무실에서 자주 보고는 했다.

그 역시 김 실장과 같은 매니저다.

이 실장의 말에 김 실장이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답했다.

“무슨 일이야?”

그는 나와 김 실장 앞에 놓인 대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대본 연습 중이었구나. 미안.”

“괜찮아, 뭔데?”

괜찮다는 김 실장의 한마디에 이 실장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며 옆에 서 있던 남성을 손으로 끌었다.

“인사시켜 주려고, 잠깐 들렀어.”

앞머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스프레이로 올린, 깔끔한 인상의 얼굴.

그는 입술을 말아 넣으며 미소 짓고 있었다.

김 실장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반가운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백영훈 배우님이시죠?”

김 실장의 말에 백영훈이 아닌, 이 실장이 답했다.

“맞아. 오늘부터 우리 가족.”

그제야 백영훈은 입술을 뗐다.

“안녕하십니까. 백영훈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허리를 접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몸을 일으킨 그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뻗었다.

“진희성입니다. 저도 잘 부탁해요.”

우리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손을 맞잡았다.

뜨거운 백영훈의 손.

따로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의 얼굴과 눈빛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이 우리 HS 엔터에 입사한 첫날.

한창 열정이 불타오를 시기이지.

이 실장은 나와 김 실장을 번갈아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다른 곳도 인사 좀 하러 갈게.”

“그래.”

“희성 씨, 열심히 하세요.”

이 실장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경례를 했다.

“넵!”

나는 그의 제스처에 미소로 화답했다.

그들이 나간 뒤, 곧장 김 실장에게 물었다.

“형, 쟤 걔 맞지?”

김 실장은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 드라마 ‘전쟁 같은 사랑’에 나왔던 애.”

“어, 맞아.”

나 역시 백영훈을 알고 있었다.

많은 작품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개의 작품에서 조연으로 눈길을 끌었던 배우.

내 기억에 남았다는 건, 연기를 좀 한다는 뜻이다.

하도 많은 작품을 모니터링하다 보니 어중간한 연기 실력의 배우는 뇌리에 남지 않으니까.

“백영훈… 배우 전문 엔터에 있던 애 아닌가?”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쟤 한 3년째 유망주 소리를 듣고 있기는 한데, 이제 한번 올라갈 것 같다고 이번에 회사에서 계약했대.”

“전 회사랑도 계약 만료가 딱 맞았나 보네.”

“백영훈, 희성이 너랑 비슷한 급이야.”

그러곤 쓰읍, 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우리 회사로 배역이 들어오면, 둘이 경쟁해야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물론 배우 개인한테 캐스팅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기는 한데, 배역에 TO가 생길 때도 있으니까.”

김 실장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지난 시계공과 무희 작품에서 비공개로 남겨두었던 배역들.

그리고 최서빈과 같은 기획사에 있는 박민준이 그 자리에 들어오게 되었지.

회사에 그런 자리가 생겼을 때, 나와 백영훈이 경쟁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경쟁자이자, 친구로 지내야겠네.”

내 말에 김 실장이 한쪽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근데 너무 가까이는 지내지 마.”

“왜?”

그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쟤… 질투심이 좀 있다고 하더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배우로서 질투심이 나쁜 건 아니긴 해.”

“그렇지. 질투라는 게 곧 성취욕이기도 하니까.”

“적당히 거리 두고 친분만 있는 정도면 좋을 거 같다는 말이야.”

나는 김 실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럴게.”

“그럼 다시 연습 시작할까?”

“응.”

김 실장과 나는 내려놓았던 대본을 다시 집어 들었다.

***

드라마 ‘연예계 엑스트라’의 대본 리딩 현장.

문 앞에 서 있는 임상재 감독에게 달려가 허리를 접으며 인사했다.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그는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일으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 희성 배우님. 반가워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리딩 전에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면 좋았을 텐데, 내가 일정이 좀 바빠서 그러지를 못했네.”

“아닙니다. 저를 캐스팅해 주셔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가고 싶었는데….”

그는 내려간 내 눈썹을 바라보고는 말을 잘라냈다.

“아이고, 감사 인사는 무슨. 앞으로 드라마 잘 부탁해요.”

서글서글한 인상의 임 감독은 잡은 내 손을 툭툭 치며 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독님.”

“그래요. 이따가 안에서 봐요.”

“넵.”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넨 후, 나는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한소정이 밝은 얼굴로 내게 걸어왔다.

“희성 씨!”

그녀는 극 중 내 스타일리스트로 캐스팅이 되었다.

“소정 씨, 또 보네요.”

“그러게요. 캐스팅된 거 보고,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저도 소정 씨랑 같이하는 거 알고는 있었어요.”

“앞으로 거의 같이 찍던데, 이번에도 저희 호흡 잘 맞춰봐요.”

한소정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우리 이번에도 한번 잘해봅시다.”

그렇게 인사를 마무리해갈 때쯤.

시간 맞춰 도착한 배우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차례로 들어오는 조연 배우들.

극 중 배우 역할과 개그우먼 역할을 맡은 두 배우였다.

배우 역할을 맡은 박현영은 화려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쌍꺼풀이 짙은 커다란 눈망울.

오뚝한 콧날과 일자 눈썹.

긴 웨이브 머리를 찰랑거리며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뒤이어 들어오는 신설희는 극 중 개그우먼 역할을 맡았다.

원래 그녀는 개그우먼이 아닌, 배우였고.

극 중에서 맡은 역할은 허당기가 가득하고 어리바리한 캐릭터가 특징이다.

로우 포니테일로 단아하게 묶은 그녀의 헤어스타일 덕에, 첫인상은 굉장히 선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 그녀는 입을 열지 않은 채, 고개만 숙여 인사를 보내고는 자리에 앉았다.

새초롬한 얼굴로 자리에 있던 그녀는 앞에 놓인 이름표를 한참 뒤 확인했다.

“어… 여기 내 자리가 아니네?”

다른 배역의 자리에 앉았던 신설희는 벌떡 일어나 헤실거리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제작진들이 배역 섭외를 잘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이렇게나 캐스팅을 찰떡같이 해낸 덕분일 것이다.

이후로도 여러 명의 배우들이 끊임없이 도착했고.

어느새 벽시계는 대본 리딩 약속 시간인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유일하게 비어 있던 마지막 자리.

주연 자리의 주인공이 도착했다.

제일 끝에 등장했기에, 대본 리딩 장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강찬성은 그 어떤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듯한 표정임에도 그에게서는 포스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눈썹까지 덮은 앞머리.

무쌍꺼풀의 큰 눈으로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쏟아져 나오는 카리스마는 이곳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내 시선은 그에게 고정됐고.

그의 걸음을 따라 내 시선 역시 천천히 움직였다.

와아….

확실히 주연 배우의 아우라가 다르기는 다르구나.

같은 남자가 보아도 멋있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고 했으니 말이다.

강찬성은 최서빈처럼 톱스타 계열에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최서빈과 다른 점이 있었다.

최서빈은 드라마와 영화, 양쪽에서 모두 흥행하는 올라운더.

그에 반해 강찬성은 쉽게 말해 ‘드라마용 배우’라고 불렸다.

그가 드라마만 찍었던 것은 아니다.

한 세 작품 정도의 영화를 찍었는데, 전부 손익 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

그 뒤로는 영화 캐스팅 자체가 들어오지 않았고.

항상 드라마에만 전념하는 배우로 유명해진 것이지.

강찬성을 바라보며 감탄을 자아내던 그때.

김 실장이 나에게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강찬성의 성격.

엄청나게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로, 조심하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김 실장의 걱정과 달리, 실제로 보니 성격이 유해 보였다.

물론 아직 그의 실제 성격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자, 다 모인 것 같으니 먼저 인사를 나눌까요?”

임 감독은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며 들어왔다.

“앞으로 작품을 찍게 되면,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 붙어 있을 겁니다. 다들 아시죠?”

그의 말에 우리는 합창하듯 입을 열었다.

“네.”

“실제로 배우들끼리 친해져야, 연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다들 친분을 쌓았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끝낸 후, 임 감독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바로 옆에 앉은 강찬성을 손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인사는, 우리 작품의 주연인 강찬성 배우님부터 시작하죠.”

그의 말에 강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찬성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선하게 웃는 얼굴.

하지만 순간 보였던, 그의 눈빛에서는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김 실장의 말이 내 귓가에 맴돌았다.

뭔가….

위험하다.

대본 리딩실을 뜨겁게 비추던 햇빛이 점차 사라질 때까지.

우리의 대본 리딩은 이어졌다.

역시 주연을 맡은 강찬성의 연기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중간중간 임 감독과 작가의 요구에도 고분고분하게 연기 톤을 고쳐나갔고.

그들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호평이 쏟아졌다.

그때 임 감독이 굽은 등을 펴며 소리쳤다.

“자, 우리 잠깐만 쉬었다가 다시 합시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기지개를 켜며 몸을 움직였다.

테이블 끝에 앉았던 한소정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나 또한 오늘 처음 본 배우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있던 조연 배우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나눈 뒤.

저 멀리 앉아 있는 강찬성이 보였고.

그는 한소정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 역시 한소정과 친분이 있기에, 스스럼없이 그들에게 걸어갔다.

“진짜요? 하하.”

강찬성이 밝게 웃으며 한소정에게 말했고.

그들의 대화가 중단되었음을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내 인사에 강찬성은 앉은 채로 고개만을 들었다.

그러곤 아무런 대답 없이 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에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혹시 번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조심스레 묻는 내 말에 그의 얼굴이 돌변했다.

차가운 눈빛으로 내 얼굴을 쏘아보았고.

머쓱해진 나는 마른침을 한번 삼켜냈다.

“감독님께서 배우들끼리 서로 친해지는 게….”

“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찬성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왜?”

“…네?”

당황한 나는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고.

그는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입을 열었다.

“배우가 배역대로 연기하면 되지, 현실에서 몰입은 무슨… 그런 자신도 없으면서 배역을 수락한 건가?”

순간 옆에 있던 한소정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급변한 강찬성의 태도에 한소정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한껏 얼굴이 일그러졌다.

황당함에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눈길을 돌렸고.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허공에서 휘휘 저었다.

“그냥 가라고.”

…이 새끼, 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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