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39)화 (39/303)

39화 #10 – 둘 중 하나가 아닌 (1)

드라마와 영화가 동시에 들어왔기에, 한 가지를 거절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김 실장은 고민에 휩싸인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는 조금 달랐다.

애써 미소를 참으며, 속에서는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으니까.

항상 공개 오디션 대본만 수십 개를 읽었다.

그중에서 내가 하고 싶은 배역, 특히 뽑힐 수 있을 만한 배역과 작품 오디션을 보았지.

그 후에는 합격자 발표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먼저 제안이 왔다는 것.

무려 두 개의 작품을 놓고 내가 고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배우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어떤 작품이 더 뛰어나고, 드라마냐 영화냐를 고민하는 게 즐거운 것이 아닌.

내가 연기로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할 뿐이었다.

김 실장이 다이어리를 넘기며 입을 열었다.

“희성아, 드라마랑 영화 둘 중에 하나를 고르든, 둘 다 진행하든 결정부터 하자.”

“응, 언제까지 정하면 되는 거야?”

그는 턱을 어루만지며 답했다.

“한… 열흘 정도 안에는 대답해줘야 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생각해보고 나서 골라도 돼.”

“그럴게.”

김 실장이 회의실을 나간 후, 홀로 남은 이곳.

휴대 전화를 뒤적이며 장 감독의 번호를 찾았다.

최서빈을 통해 나를 알게 된 것이지만.

어쨌든 나를 캐스팅한 건 장 감독이니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함이었지.

잠시 통화 버튼 위에서 손을 움찔거리다, 결국 휴대 전화를 닫았다.

아직 캐스팅에 승낙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인사는 나중에 전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감사 인사는 캐스팅 수락 후에 해도 늦지 않기에.

대신 재차 휴대 전화를 열어 최서빈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연신 울리는 통화 연결음.

혹시 촬영 중이려나?

종료 버튼을 누르려 귀에서 전화기를 떼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여보세요.

서둘러 휴대 전화를 귀에 붙였다.

“선배님, 저 희성입니다.”

-어, 희성아.

“통화 가능하십니까?”

-가능해. 근데 내가 촬영 중이라 길게는 안 돼.

시끄럽게 울리는 주변의 소리.

그는 통화를 하기 위해 조용한 곳으로 걸어가는지, 주변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콜타임은 아까 지났는데, 앞선 촬영이 살짝 지연되어서 전체적으로 딜레이 중이거든.

“그럼 바로 들어가셔야 합니까?”

-아니, 슛 들어가기까지 한… 5분?

최서빈의 말에 나는 서둘러 답했다.

“네,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무슨 일 있는 거야?

“선배님 덕분에 섭외가 들어와서요.”

-섭외?

“예, 장호철 감독님의 영화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 캐스팅이 들어왔습니다.”

-잘됐네.

그는 내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아니야, 네 실력이지. 나한테 고마울 건 없어.

“그래도 선배님 덕분에 제가 섭외를 받은 거잖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들어오는 거야?

최서빈의 말에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 확정을 못 했습니다.”

-왜?

“너무 감사하고, 좋은 기회인 건 알고 있는데….”

최서빈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그럼 들어와야지.

“예, 그런데 상업 영화 조연은 워낙 대단한 자리이지 않습니까.”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사실 선배님 추천으로 된 거지, 제 실력은 아직 부족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는 내 말에 탄식을 내뱉었다.

-희성아.

“예, 선배님.”

-네가 못했으면 내가 추천했겠어?

“…….”

-네 실력으로 그 자리 따낸 거야.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추천해 줬다는 생각 말고, 영화만 보고 네가 잘 판단해봐.

“예, 선배님.”

-나 지금 스탠바이해야겠다. 다음 주에 밥이나 한 끼 먹자.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대본 두 개를 나란히 바라보았다.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

드넓은 무대.

화려하게 내리쬐는 찬란한 조명들.

그중 핀 조명은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를 밝게 비추고 있다.

그리고 앞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중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손바닥으로 눈부신 조명을 가로막던 나는, 손을 떼고 관중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 표정 하나에 관중석에서는 환성이 터져 나왔다.

아무 음악도 흐르고 있지 않았지만.

관중의 환호에 심장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심장 소리가 귀까지 들려왔고, 환호 소리와 겹쳐질 때쯤.

관중에서 외치는 소리만이 선명하게 귓가에 들려왔다.

“사랑해!”

그들의 목소리는 이 큰 공연장에 울려 퍼졌고.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이크에 대고 작게 읊조렸다.

“나도.”

내 짧은 한마디에 환호성은 두 배쯤 커졌다.

“꺄아아!”

“우리가 더 사랑해!”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빠짐없이 그들을 바라보며 눈빛을 보냈다.

야광봉을 나란히 흔들고 있는 그들에게 손을 뻗어 흔들자, 재차 탄성이 쏟아졌다.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현수막.

‘찬아, 사랑해’

‘찬이는 우리의 자부심’

각기 다른 애정 어린 멘트들은 내 입꼬리를 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관중석에서 몇몇 관객들이 피켓을 들고 흔들었다.

센 조명 탓에 손을 눈썹 가까이에 붙인 채 글씨들을 읽어 내렸다.

‘오빠 나랑 결혼해줘!’

‘권찬밖에 난 몰라’

‘빛나는 찬이. 영원히 그렇게 노래해줘.’

그때.

귓가에 들려오는 잔잔한 음악 소리.

“꺄아!”

사람들은 극도로 흥분하며 소리쳤고, 몇 개의 불이 꺼져 있던 야광봉도 다시 불을 밝혔다.

그리고 손을 하늘 높이 뻗어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이어 나는 손에 들린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토록 우리-♪”

“으아아!”

첫 소절에 터지는 관중들의 환호성.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입꼬리만을 올렸다.

팬들의 소리는 인이어를 통해 나온 음악을 눌러버렸고.

결국, 손을 인이어에 가져다 댄 채 꽉 눌러 음악 소리를 들으며 노래에 집중했다.

노래가 끝났지만 팬들의 환호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내려놓았던 마이크를 재차 입으로 가져다 댔다.

“잘 들었어요?”

“네!”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 여러분.”

“안 돼!”

“가지 마!”

나는 몸을 숙여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몇몇 팬들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수많은 가지각색의 카메라는 팬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커다란 검정 카메라, 흔히 대포 카메라라고 불리는 것들이 곳곳에 즐비했다.

“항상 아무런 대가 없이 좋아해줘서 고맙고, 다들 아프지 말고….”

팬들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를 질렀다.

“찬이도 아프지 마!”

“하하, 그럴게요. 여러분도 항상 아프지 말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마무리 멘트를 내뱉기 시작했지만,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팬들이 목 놓아 소리쳤다.

“안 돼!”

“앵콜! 앵콜!”

“앵콜해 주세요!”

이미 콘서트의 앵콜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허리를 접어 그들에게 인사를 한 뒤.

그대로 돌아 무대 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울부짖는 팬들의 우렁찬 소리.

“가지 마, 가지 마!”

탁-

내가 무대에서 사라지자 조명은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권찬, 권찬!”

관객석이 떠나가라 외치는 이름.

“권찬!”

“아아-”

불이 꺼진 무대.

마이크 테스트를 하듯 내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공연장.

관객들은 숨을 죽인 채 들려오는 내 목소리에 집중했다.

“여러분, 아쉬우시죠?”

“네에!”

“정말요?”

“네!”

떠나갈 듯 소리치는 목소리에 무대의 조명이 밝혀졌다.

쿵쾅대는 심장.

솟구치는 아드레날린.

떨리고 설레는 마음에 생수를 들이켰다.

그리고 마이크에 대고 나긋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지막 곡입니다. 제 노래 중에 유일하게 빠른 템포의 노래.”

무대 뒤까지 함성이 들려왔고.

“제 댄스곡이죠?”

팬들은 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자, 빠른 템포의… 발라드!”

무대로 저벅저벅 걸어 나오며 외쳤다.

“음악 주세요.”

곧바로 전주가 흘러나왔다.

“그대를 본 순간-♬”

“우리는!”

팬들은 노래 응원 구호를 한마음이 되어 외쳤다.

“운명처럼 함께-♪”

무대 끝까지 다가가 팬들과 눈을 맞췄고.

나를 찍기 위해 손을 쭉 뻗어 휴대 전화를 든 힘겨운 모습.

겨우 팔을 뻗은 그들을 보며,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은 무대.

무대 끝에 발을 맞춘 뒤.

무릎에 힘을 잔뜩 주고.

무대 아래로, 단 한걸음에 뛰어내렸다.

팟-

고요해진 공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던 조명은 온데간데없었다.

내 눈앞에는 새하얀 천장과 오래된 형광등뿐.

뭐야, 꿈인가?

눈을 질끈 감고 손으로 얼굴을 세차게 비볐다.

다시금 눈을 떴지만, 보이는 광경이 달라질 리 없었다.

확실한 꿈이었다.

하지만 귓가에 남아 있는 환호 소리.

너무나 생생한 꿈에 심장은 여전히 두근대고 있었다.

단순히 가수나 아이돌이었다는 것에 대한 게 아니라, 톱스타의 기분을 느껴본 것 같았다.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환호성을 지르고, 우는 모습.

더불어 한두 명의 관객이 아니었다.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메우고 있던 관객석.

꿈속에서의 장면을 다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게 스타의 삶인 건가?

톱스타….

간절히 그런 대상이 되고 싶어졌다.

어차피 노래는 젬병이라, 가수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그저 ‘톱스타’가 되고 싶다.

배우 중에서 톱이 된다면, 꿈에서 보았던 대우를 똑같이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떠오르는 한 인물.

바로 최서빈이었다.

자타 공인 톱스타 배우인 최서빈은 항상 저런 환호를 받고 있겠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저 모습이 최서빈에게는 일상일 터.

누워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움이 끓어올랐고.

그 의욕은 폭발할 듯 용솟음치고 있었다.

이렇게 기분 좋은 꿈이 또 있을까.

서둘러 준비를 하고, 이 의욕을 불태우기 위해 연습실로 향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화장실로 향하는 발걸음.

“흐으으응-♪”

콧노래를 부르며 가던 발길을 급히 멈춰 세웠다.

뭐지?

이상하다.

평소보다 허밍이 잘되는 것 같은데…?

지난번 꿨던 여러 가지의 꿈들.

그 꿈을 꾸고 나면 이상하리만큼 배역에 몰입이 잘됐다.

연기를 할 때, 마치 그 시절의 배역에 빨려 들어간 느낌.

그것처럼 노래도 잘하게 되는 건가?

홀로 지내는 자취방이었지만 고개를 돌려 쓰윽 집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 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민망한 마음에 서둘러 커튼을 쳤다.

그리고 휴대 전화로 아이돌 뮤직비디오를 틀었다.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자유자재로 흔들기 시작했다.

화장실 안 거울로 비쳐 보이는 내 춤 실력.

그 모습에 황급히 음악을 정지시켰다.

댄스, 아니 몸짓이라고도 하지 못할 만큼이었다.

유치원생의 ‘율동’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

하지 말자….

한숨을 푹 내쉬었고, 문득 떠오른 장면들.

맞다.

꿈에서도 댄스가 아니라, 발라드만 수십 곡을 주야장천 불렀던 것 같은데?

어?

분명 꿈에서는 마지막 곡과 앙코르곡만 보았는데.

꿈을 떠올리자, 머릿속에는 콘서트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처음 오프닝 무대부터 꿈에서 보았던 마지막 앙코르곡까지.

전부.

꿈으로 안 꾼 부분들이 얼기설기 수준이 아니라, 디테일하게 모든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관객들과 소통하고, 노래 중간에 멘트를 나눴던 장면까지 모두.

…잠깐만.

그때 분명 내 이름이 있었는데.

눈을 지그시 감고 기억을 되새김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떠오른 기억에 손가락을 튕겼다.

“권찬!”

재빨리 휴대 전화를 열어 ‘권찬’이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수십, 아니 수천 개의 자료가 쏟아졌다.

그리고 눈에 띄는 한 개의 마지막 기사.

‘2015년에 요절한 가수, 권찬. 데뷔한 지 10주년에 별이 되다.’

별이 되다?

빠르게 기사를 클릭했다.

인기 가수 권찬은 데뷔 10주년에 팬들의 가슴속에 묻히게 되었다.

……

사인은 교통사고.

그의 수많은 팬들은 소속사 앞으로 몰려와 애도의 물결을 보내고 있다.

…뭐지?

10주년에 교통사고로 사망이라니.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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