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9 –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6)
가슴이 벅차오르다 못해 터질 듯 요동치고 있었다.
드라마에 이어, 영화까지 섭외가 들어오다니.
한 손으로 반대 팔뚝을 세게 비틀어 보았지만.
“아야!”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거로 보아 절대 꿈은 아니었다.
열심히 살다보니 내 인생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그동안 드라마는 단역을 맡으며 꽤 여러 편을 찍었다.
거기에 단막극 주연.
그리고 이번 미니시리즈의 조연까지.
여러 작품을 촬영했지.
하지만 영화는 달랐다.
독립 영화의 조연까지는 해봤고.
사실 상업 영화도 단역 선이 최고 기록이기는 했다.
그리고 이후 찍는 영화는 이번 상업 영화의 조연이 되는 셈.
잠깐만.
그러면 두 작품이 동시에 들어왔다면, 촬영은 어떻게 되는 거지?
둘 중에 한 작품만을 선택해야 하는 건가?
아직 영화의 대본을 보지 못했지만, 장 감독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지난 금요일에 그와 함께 술자리를 했고, 제안을 거절하기가 조금은 어려운 느낌.
드라마 대본은 절반 이상을 읽어보았고.
내용과 역할이 너무 마음에 들어 꼭 연기하고 싶었다.
우선, 촬영 시기가 중요했고.
또 회사 입장에서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
소속사가 있기에, 모든 결정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형, 두 작품이나 제안이 왔으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김 실장은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우선… 섭외 온 영화 대본을 보내주기로 했거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본 보고 난 후에 한번 판단해보자.”
“응.”
대본을 읽고 난 뒤에 고민해야겠지만.
어쨌든 지금 기분은 하늘을 날 수 있을 정도로 붕 떠 있었다.
오디션을 보고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전전긍긍하던 마음을 갖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내게 온 배역이 있다니.
더군다나 한 작품도 아닌 두 작품이라는 사실에 심장이 두근댔다.
작품을 꼼꼼히 따져보고 내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
그 전과 입장이 180도 바뀐 상황에 짜릿했다.
***
“희성아, 일찍 왔네.”
김 실장은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반겼다.
“어, 시간 맞춰서 왔지.”
“대본은 다 읽어봤어?”
그를 향해 대본 두 권을 흔들어 보였다.
“나도 어제 다 읽기는 했어. 그래서 몇 시간 못 잤거든.”
대본을 모두 읽고 오느라 부족한 잠 탓에 얼굴이 부은 모양이다.
김 실장은 대본을 들고 내게 손짓을 하며 회의실로 걸어갔다.
회의실 불을 켜고 마주 앉은 우리.
김 실장이 대본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으며 물었다.
“대본 두 개 다 끝까지 읽어본 거 맞지?”
“응.”
“어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둘 다 좋던데.”
“그래?”
두 개 중 위에 올려둔 드라마 ‘연예계 엑스트라’ 대본을 집으며 말했다.
“우선 연예계 엑스트라 작품은 역할이 연예인이라, 연기하는 데 어려움이 비교적 적지 않을까 싶어.”
“어, 거기에 나오는 역할이 아이돌이잖아.”
김 실장은 자신의 다이어리를 꺼내 펜을 들었다.
그리고 페이지를 펼치니, 빼곡하게 적혀 있는 글씨들.
이미 캐릭터 분석과 함께 내가 그 배역을 맡았을 때의 시너지 효과들을 정리해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써둔 글을 읽어 내려갔다.
“우선 아이돌 역할이기 때문에, 희성이 네가 직접 노래를 하는 신이 많을 거야.”
순간 입을 다물고 한숨을 삼켜냈다.
예상한,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이었다.
평소 노래에 소질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저 가끔 홀로 동전 노래방에 가서 몇 곡을 부르는 정도.
그마저도 잘 부르는 것이 아닌 스트레스 해소용이었지만.
“응, 그게 걱정이 되기는 해.”
김 실장은 손을 허공에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촬영이다 보니까, 라이브로 하는 신은 하나도 없으니까.”
“다행이네.”
“물론 희성이 네 목소리로 노래를 해야 하지만, 음치만 아니면 충분히 보컬 연습해서 드라마는 찍을 수 있어.”
김 실장은 내 근심을 털어주려 노력했다.
그의 말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연예계 엑스트라에서 주연이 매니저 역할이고, 조연이 너가 맡을 아이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매니저랑 배우 역할이 투톱 주연 맞지?”
“맞아. 조연은 아이돌이랑….”
그는 다이어리를 확인하며 말을 이어갔다.
“개그맨 역할. 이 배역은 아이돌에 비해 비중이 조금 더 적은 조연이지.”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리 매니저가 주연 역할이라고 해도, 대부분 신에는 연예인 역할을 맡은 희성이 네가 자주 나올 수밖에 없을 거야.”
“응, 매니저 옆에는 항상 연예인이 붙어 있으니까.”
그는 펜대를 굴리며 말했다.
“그럼 투톱 조연으로 간다고 해도 주연만큼이나 비중도 있고, 드라마에 충분히 영향력이 있다고 봐.”
나는 눈썹을 들썩였다.
“게다가 이 아이돌 역할의 캐릭터도 마음에 들어.”
“그렇지?”
그는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나도 보면서 희성이 네가 연기하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거든.”
김 실장의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두근거렸다.
배역과 실제의 내 성격이 이렇게 맞아떨어지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이 역할을 연기해 낸다면, 잘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럼 다음 거 봐볼까?”
연예계 엑스트라 대본을 내려놓은 뒤, 옆에 있던 영화 대본을 펼쳤다.
장 감독의 상업 영화.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라는 작품이다.
평범한 의료 기기 회사원의 영업 이야기를 다룬 스토리.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낼 수 있을 만한 소재였다.
“여기서 나한테 온 배역이 최 대리, 맞지?”
극 중 주연은 한 명.
“맞아. 주연의 라이벌 같은 존재 역할이지.”
“우선 대본 내용이 너무 좋더라.”
내 말에 김 실장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어, 완전 현실감이 풍부해서 빠져들 수밖에 없더라.”
“나도 어제 읽다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나온 대본까지 다 읽었어.”
“그래서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는 어때?”
김 실장의 말에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물론 대본과 작품성은 꽤 훌륭한 편이었다.
내가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하지만 내게 주어져버린 배역이 있기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한 것이다.
장 감독이 캐스팅 제안을 한 역할은 최 대리.
이미 배역이 정해진 것에 대해 조금 마음이 쓰였다.
“좋은데, 근데 문제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뭔데, 악역 역할 맡기가 좀 힘들 것 같아?”
눈썹을 늘어뜨리며 걱정스레 묻는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전혀.”
“악역인 건 신경 안 쓰인다고?”
“오히려 좋아. 한 번도 악역을 맡아보지 않아서, 그게 메리트라고 생각해.”
김 실장은 내가 기특하다는 듯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리고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대체 무슨 문제?”
“배역을 소화하는 건 가능한데, 근데 사실… 탐나는 역할이 따로 있어서 말이야.”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탐나는 역할이라면 어떤 역할?”
“민지훈.”
“…그거 주연 역할 아니야?”
나는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맞아.”
그는 쓰읍, 소리를 내며 내 눈을 피했다.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김 실장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연을 맡는 게 힘들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냥 조금 탐이 난다는 거지.”
“주연이라는 게 탐이 나는 게 아니라, 배역이 마음에 드는구나?”
그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영업 사원인 주연 역할을 정말 맛깔나게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응, 내가 예전에 막 배우 생활을 시작할 때, 돈이 필요해서 일을 한 적이 있거든.”
김 실장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며 나를 바라보았다.
“영업직으로?”
“어, 제약 회사 영업직이었어.”
“우와, 대단하네. 희성이 별거 다 해봤구나?”
이에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대단한 건 아니고. 아주 잠깐 했거든.”
“얼마나?”
“대학교 졸업하고 1년 정도 지났을 때.”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경청하고 있었다.
“물론 6개월 정도 하고 때려치우기는 했지만.”
“어땠어, 일이 힘들기는 했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뭐, 그것도 그렇고. 나는 배우가 꿈이었고, 그건 생계를 위한 길이었잖아.”
“그렇지.”
“그런데 하다보니까 자꾸 배우 일이 뒷전이 되어버리는 것 같더라고.”
순간 그 시절이 떠올랐고.
허공을 바라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덩달아 센티해진 회의실 안.
나는 손뼉을 한번 부딪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아무튼, 그래서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였지. 무조건 주연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건 아니야.”
김 실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나는 코로 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형, 게다가 이 영화 주연이 무려 최서빈일걸?”
“아, 맞네!”
손가락을 튕긴 김 실장이 검지를 허공에 휘휘 저으며 이어 말했다.
“그때 장 감독님이랑 자리 만들어준 게 최서빈이랬지?”
“응, 그래서 언감생심, 그 역할 탐내지도 않아.”
김 실장은 대본 두 개를 나란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하튼, 시기적으로는 두 개가 살짝 겹치기는 해.”
나는 입술을 쌜쭉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개를 할 수가 없다는 건가?”
“아니. 네가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라서 병행은 가능해.”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진행이 되는 거야?”
“드라마는 제작 준비가 다 끝났대. 마지막 섭외 세팅만 진행 중이고.”
“그럼 곧 촬영 시작하겠네?”
김 실장은 다이어리의 스케줄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 드라마는 빠르면 다음 달 말에 바로 촬영 들어갈 거야.”
이번에는 영화 대본을 들며 물었다.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는?”
“그건 아직 프리프로덕션 단계야.”
“그 말은… 이제 대본만 됐다는 거네.”
김 실장은 손으로 맞다는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스태프와 섭외에 콘티까지 다 정리해야 하니까, 아직 먼 편이지.”
“그럼 언제쯤 촬영이 들어가는 건데?”
“영화는 3개월 뒤에 촬영이 시작될 거야.”
김 실장이 말해준 드라마와 영화 촬영 날짜를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딱 한 달 정도만 겹치네.”
“응, 근데 스케줄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 조정이 가능할 것 같아.”
나는 미간에 힘을 준 채 물었다.
“그럼… 둘 다 촬영할 수 있다는 말이지?”
김 실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네가 한 작품에만 집중을 할지, 아니면 두 작품 다 할지. 그건 고민 좀 해봐야 할 문제야.”
마음 같아서는 두 작품을 모두 하고 싶었다.
이런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었고.
그걸 떠나 두 작품 모두 훌륭하기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조심스레 김 실장에게 물었다.
“근데… 회사에서는 어때?”
아무리 내가 하고 싶다고 한들, 회사에서 한 작품에만 힘을 쏟으라고 한다면 그걸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둘 다 하는 걸 추천해. 대신에 일정이 강행군이야.”
“겹치는 건 한 달인데?”
“보통 작품 하나 하면 몇 달을 쉬잖아.”
김 실장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마는 막바지에 가면 비축분이 사라져서 바쁘게 찍어.”
“그렇긴 하지.”
“가장 정신없을 그 한 달에, 영화 촬영을 시작하면 좀 빡빡하긴 해.”
김 실장의 말을 들으며 동의를 했지만.
두 작품을 모두 하고 싶은 마음에 행복 회로를 열심히 굴렸다.
“형, 어쨌든 일정을 소화할 수 있기는 한 거 맞지?”
“가능하긴 하지. 그렇게 하는 배우들도 많으니까.”
나는 시선을 대본으로 돌렸다.
그리고 한 손에 한 작품씩 대본을 들고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음… 일단 고민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