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37)화 (37/303)

37화 #9 –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5)

“감독님, 이 친구가 연기를 그렇게 잘합니다.”

최서빈이 장 감독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 미소를 보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래, 서빈이 네가 소개해줄 배우라길래,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었어.”

“감사합니다.”

내 인사에 최서빈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어갔다.

“감독님,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뭐랄까. 같이 연기를 하고 있으면 그 상황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최서빈은 눈동자를 굴리며 나와 연기를 했던 장면을 회상하는 듯했다.

“기분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에 찍었던 ‘시계공과 무희’ 있지 않습니까?”

장 감독도 드라마를 보았는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어, 봤지. 거기서 희성 씨 연기하는 것도 봤고.”

“거기서 이상하게 이 친구랑 같이 촬영에 들어가면 연기가 더 잘되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이건 엄청난 극찬이었다.

누군가가 이런 칭찬을 해주어도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기뻤을 텐데.

그 모두가 인정하는 연기 천재인 최서빈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내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올 듯이 세차게 쿵쾅거렸고.

곧게 세우고 있는 등줄기에서는 땀이 한 방울 흘렀다.

나와 많은 작품을 찍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평가해주고 있는 최서빈에게 엄청난 고마운 마음이 가득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사할 건 없지. 네가 연기를 잘한 건데.”

“맞지. 서빈이가 이렇게 남 칭찬을 잘하는 편은 아닌데, 앞으로가 기대되네요.”

장 감독은 흐뭇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아, 감독님.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그럴까?”

“네.”

나무로 만들어진 배 모형에 켜켜이 놓인 줄돔.

고급스러운 도자기의 술 주전자 안에는 사케가 담겨 있었다.

나는 장 감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감독님, 저 검사님 출세하신다, 정말 잘 봤습니다.”

“그래?”

“네, 거기서 주인공이 큰물로 올라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검은돈을 받았던 장면.”

나는 침을 한 번 삼킨 뒤, 그 장면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로 인해 재벌 세력을 무너트리고….”

자신의 작품 이야기에 장 감독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경청하고 있었다.

“그런 현실이라는 것에 대해 오히려 씁쓸해하고 안타까워하는 감정이 느껴졌는데, 이런 메시지를 담으신 거 맞죠?”

“어, 맞아!”

장 감독은 내 말에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걸 표현하고 싶었는데, 요즘 정치적으로 민감하잖아.”

“그렇죠. 그걸 그 묘사 하나로 불편함 없이 보여 주셨다는 게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관객들이 그걸 알아봐 줬으면 된 거네.”

“감독님께서 말하고자 하신 부분이 잘 표현됐기에, 모든 관객이 알아차렸을 거라 확신합니다.”

“아, 이 친구 말도 잘하네.”

장 감독은 입꼬리를 올리며 잔을 들었다.

“자, 한 잔 들지.”

사케를 넘긴 후 안주를 먹기도 전에 장 감독이 내게 물었다.

“자네, 그럼 ‘피의 세계’ 작품도 보았나?”

“당연하죠, 감독님. 그 명작을 제가 어떻게 안 봤을 수가 있겠습니까.”

최서빈은 내 말에 동조하며 입을 열었다.

“와아, 희성이 ‘피의 세계’도 봤으면, 우리 장 감독님 찐팬이네!”

나는 엄지를 치켜들며 답했다.

“그럼요. 그래서 오늘 자리가 너무 영광입니다, 감독님.”

“하하, 나도 좋은 배우를 알게 돼서 영광이네.”

장 감독은 빈 사케 주전자를 보며 말했다.

“우리 사케 말고, 소맥으로 한 잔 마실까?”

“좋습니다.”

잠시 뒤, 소주와 맥주가 테이블에 도착했고.

맥주잔 3개를 내 앞으로 나란히 깔았다.

소주와 맥주를 한 입에 털어 마시기 좋게 2.5 대 7.5 비율로 말아, 장 감독과 최서빈에게 건넸다.

“여기 황금 비율로 소맥 말았습니다.”

장 감독은 내가 건넨 소맥을 한 입에 털어 마셨다.

“크으, 기가 막히네.”

“하하, 감사합니다. 한 잔 더 올리겠습니다.”

“좋지.”

대화가 끊이지 않았던 두 시간.

“그래, 요즘 이런 젊은 배우들이 없어요.”

장 감독은 술이 살짝 올라온 듯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띠리리-

그때, 장 감독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어, 좋지. 그럼.”

그는 손바닥을 뻗으며 통화를 이어갔다.

“응, 기억나네. 알겠어, 곧 가겠네.”

전화를 끊은 그는 최서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서빈아, 둘이 마무리하고 가야겠다.”

최서빈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집 근처에 현만이가 와 있다고 하네.”

“아, 봉현만 감독님 말씀이십니까?”

장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봉현만 감독 역시 내로라하는 유명한 영화감독.

“현만이가 급하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오늘은 먼저 일어나야겠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투를 집어 들었다.

그를 따라 최서빈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허리를 접었다.

“오늘 좋은 배우 하나 더 알게 됐네. 둘이 이야기 좀 더 하고 가.”

“네, 들어가십시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감독님!”

“그래, 나오지들 마.”

우리의 인사에 그는 손 인사로 답한 뒤, 밖으로 나갔다.

자리에는 최서빈과 나, 둘만이 남았다.

그렇게 우리 둘은 남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몇 분의 시간이 흘렀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선배님,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최서빈에게 진심으로 궁금했다.

나에게만 말을 놓은 것도.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서 굳이 나를 불러 장 감독에게 소개를 시켜준 것도.

너무나도 고마운 마음이 컸기에, 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지가 알고 싶어졌다.

“음… 글쎄.”

그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진짜 직감이 뛰어나거든?”

최서빈은 허공에서 시선을 돌려 내 눈을 바라봤다.

“근데 네 연기가 좀 남다른 마력이 있어.”

“그런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까 말했지 않나?”

최서빈은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너랑 같이 출연하는 신에서는 연기가 꽤 잘된다고.”

그의 말에 입을 벌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간혹 상대 배우들을 경쟁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건 잘못된 거야.”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게 흥행해서 대박작이 되면, 자신도 낙수 효과를 보는 게 이 바닥이거든.”

최서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같이 출연하는 배우가 뛰어난 덕에 드라마가 대박이 나게 되면, 자연스레 같이 연기하는 배우들이 얼굴을 알릴 수 있을 터.

함께하는 배우를 굳이 시기, 질투할 일이 없는 것이지.

“너도 누구 보고 시기심, 경쟁심 그런 거 가질 필요 전혀 없어.”

“맞습니다. 오히려 자기 계발에만 힘쓰기에도 시간은 모자라니까요.”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답했다.

“그렇지. 난 그런 쓸데없는 심리 품는 새끼들이 세상에서 제일 한심해 보이더라.”

최서빈의 말에 순간 머릿속에 단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바로 박민준.

그리고 최서빈은 그 대상을 떠올리는 것인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

“안녕하십니까.”

“어, 희성 씨 왔어요?”

“예, 좋은 아침입니다. 실장님.”

회사에 출근하자 한 실장이 나를 반겼다.

그는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김 실장은 잠깐 앞에 나간 거 같던데, 자리에서 기다리면 곧 올 거예요.”

“넵, 감사합니다.”

어제까지 보던 대본을 모두 읽은 나는, 김 실장의 자리에 앉아 그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김 실장의 자리에 앉으니, 그의 책상 위에는 대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새로 가져온 대본인가?

의자에 몸을 기대어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십 분 동안 대본의 절반을 읽었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음 장을 넘겼다.

이 대본, 뭐지… 엄청 괜찮은데?

“희성아, 왔어?”

그때 김 실장이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집중한 터라 그의 부름에 놀란 나는 대본을 책상 위로 떨어트렸다.

“어, 형.”

“올려둔 대본을 읽고 있었어?”

“응, 이번에 가져온 대본인가 보네.”

김 실장이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물었다.

“그거 어때?”

“완전 괜찮아.”

나는 쓰읍 소리를 내며, 이 대본의 역할을 가지고 싶다는 것을 표출했다.

“배역도 괜찮지?”

“응, 여기 나오는 조연 역할이면 충분히 좋을 것 같아.”

메인 투톱에 서브 서사가 있는 정도의 조연 역할이었다.

이 정도의 조연이라면 비중이 꽤 높은 편에 속하지.

대본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그에게 눈길을 보냈다.

“형, 나 이거 오디션 보면 안 돼?”

“아니.”

그는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설마 이 배역 벌써 캐스팅 끝난 거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일 탐나는 배역에 도전조차 해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때, 김 실장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대답했다.

“아니, 너한테 들어온 거거든.”

“…어?”

“너한테 배역 제안이 들어왔다고.”

…미친.

그의 말에 나는 침을 한번 삼켜냈다.

“그냥 대본 뿌린 게 아니라?”

“그래, 진희성 너한테 직접 배역 섭외가 들어왔다고!”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눈을 깜빡이며 계속해서 대본을 바라보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디션이 아닌, 배역이 직접 내게 들어왔다니.

온 시신경이 곤두서는 기분.

정수리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몸에 힘을 잔뜩 주었다.

예스!

기쁨에 젖어 있는 것도 잠시.

갑자기 김 실장의 휴대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탑원 영화사?”

김 실장은 검지로 자신의 입과 코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희성아, 잠깐만.”

전화를 받겠다는 김 실장의 말에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여보세요. 아, 네, 맞습니다. 예, 그럼요.”

주체할 수 없는 설렘을 속으로 느끼던 그때.

김 실장의 심오한 표정에 나는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내렸다.

심각한 내용을 주고받는 모양이다.

“네, 들었습니다. 장호철 감독님 만나신 거.”

내가 최서빈과 함께 만났던 이야기를 하는 건가?

“아… 정말요?”

점점 더 굳어가는 김 실장의 얼굴.

덩달아 심각해진 나는 의자에서 등을 떼며 그의 곁으로 밀착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김 실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뭔데?”

내 물음에 김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성아, 너 또 섭외 들어왔어.”

“…뭐?”

내 눈은 튀어나올 듯 커졌고.

김 실장은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장 감독이 널 조연으로 쓰고 싶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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