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9 –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4)
회사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집으로 달려왔다.
드디어 오늘.
지난번 찍은, 내 인생의 첫 예능인 블라인드 미션이 방영하는 날.
무조건 본방 사수를 해야 한다.
평소 모니터링을 할 때면 항상 김 실장과 함께하고는 했다.
각자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같이 보았겠지만, 오늘은 중요한 집안일 때문에 김 실장이 오지 못했다.
첫 예능 본방 모니터링만큼은 함께하고 싶어 한 그였기에.
김 실장은 회사에서부터 미안한 마음과 아쉬운 마음을 끊임없이 표출했다.
결국 홀로 하는 모니터링.
예능은 드라마와는 달리, 편집의 힘이 많이 실리는 방송이다.
대본도 없을뿐더러, 하루 내내 촬영한 영상이 1시간으로 편집되어 나온다는 점이 설레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방송에 보일지 감조차 잡히지 않기 때문.
그래도 큰 실수는 없었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직 방송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본방은 주말 저녁 시간에 방영된다.
본래 주말 예능은 저녁 식사와 함께해야 하는 것.
휴대 전화를 열어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클릭했다.
TV를 보며 먹기에 어울리는 것은 역시 치킨.
평소 좋아하는 튀김이 바삭한 치킨을 시키려다 떠오른 체중 관리.
시선을 내려 몸 상태를 확인한 뒤, 고개를 가로저으며 클릭하려던 손을 옮겼다.
그렇게 해서 타협한 건 구운 치킨과 맥주.
아니, 구운 치킨과 제로 콜라다.
이 정도면 훌륭한 다이어트 식단이 아니겠는가.
구운 치킨은 튀긴 것이 아닌, 구우면서 기름이 빠졌기에 살이 안 찔 것이고.
제로 콜라 역시 다이어트 음료니까.
오늘도 합리화를 통해 기분을 풀어냈다.
주문을 마친 뒤, 좌식 테이블을 TV 앞에 펼쳤다.
치킨이 배달 오고, 예능 방송까지.
완벽한 플랜.
지이잉.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 전화의 진동이 세차게 울렸다.
치킨이 취소된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뒤집어져 있는 휴대 전화를 조심스레 들었다.
전화가 아닌 톡 알람.
화면을 열어 확인하니, 바로 한소정에게서 온 톡이었다.
-바쁘세요?
그녀의 짧은 톡 내용.
무슨 일로 내게 연락을 한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장을 보냈다.
-아니요. 무슨 일이세요?
답장을 보내자마자 한소정은 기다렸다는 듯 톡 내용을 읽었다.
내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
급한 일인가?
무슨 일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들고 있던 휴대 전화의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희성 씨, 통화 가능하세요?
밝은 그녀의 목소리.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평소 나와 친분도, 연락을 주고받을 일도 없었기에 그녀의 연락에 놀랐던 마음이 먼저였기 때문이지.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한소정은 말끝을 흐리더니, 재차 활기찬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방송 보고 계세요?
“그럼요. 지금 틀어놓고 나오는 광고 보고 있었어요. 소정 씨는요?”
-저도 방금 틀어놨어요. 보고 계실 것 같아서 연락드렸어요.
“그러셨구나. 첫 예능이다 보니까, 종일 방송 생각밖에 안 나더라고요.”
-맞아요. 저도 지금 너무 떨려요.
한껏 긴장을 했는지 수화기 너머까지 한소정의 떠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그래도 저희 재밌게 찍었으니까, 잘 나오길 바라야죠.”
-그랬으면 좋겠어요. 방송 기다리는데, 그날 찍었던 게 생각나더라고요.
“그날 정말 추웠는데….”
그녀는 그날을 회상하는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곧장 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참, 희성 씨는 SNS하세요?
“아니요.”
-아… 그러시구나. 어쩐지 검색해도 안 나오더라.
“네?”
-맞팔하려고 찾아봤거든요.
그녀는 아쉽다는 말투로 말끝을 흐렸다.
“저는 회사에서 아직 만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하긴, 막 연예계에 발 들였을 때는 SNS를 천천히 시작하는 게 낫더라고요.
“나중에 만들게 되면 맞팔해요.”
-좋아요!
“오늘 방송 재밌게 보시고, 조만간 또 봬요.”
-네, 희성 씨도요.
그녀와의 전화를 끊은 뒤, 머지않아 치킨이 도착했다.
그렇게 세팅된 음식과 TV.
방송이 시작되자 긴장되는 마음으로 한 손에는 닭다리를 든 채 시선은 TV에 고정했다.
어느새 먹다 남은 치킨은 차갑게 식었고, 제로 콜라에 얼마 없는 탄산까지 모두 사라질 때쯤.
블라인드 미션은 마지막 게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역시나, 예능은 편집이 신의 한 수.
내가 한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기서 내가 저렇게 말했나?
진지하게 모니터링에 임하고 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시청자 모드가 되어 방송을 보고 있었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제로 콜라를 내려놓고, 휴대 전화를 열었다.
그리고 곧장 시청자의 실시간 반응을 클릭했다.
-앜ㅋㅋ 쟤 왜 저렇게 웃기냐ㅋㅋ
-진희성 엄청 골 때리네 ㅋㅋㅋ
-드라마에서 보고 잘생겼다고 했는데, 진희성 개그캐네. 아니지, 잘생겨서 다 재밌어 보이는 건가?ㅋㅋ
-└ 맞지ㅋㅋ 얼굴이 잘생겨서 뭐든 다 재밌어 보이는 것.
-한소정이 진희성 썰매 챙겨준 거 왜 저렇게 감동이냐ㅠㅠ
-민우현이랑 진희성 캐릭터 진짜 다른 거 같음.
-진희성 어리바리하지 않음?
-└ 어리바리 느낌보다는 때 묻지 않은 순진함? 순수함? 같음.
-└ 맞아, 엉뚱한 느낌.
-말투 은근히 꼰대 같아ㅋㅋㅋ
-└ 이 시대의 유교남인 듯ㅋㅋ
-└ 저런 꼰대라면 가서 교육받고 싶은데?><
댓글을 새로 고침하며 하나씩 모두 읽어 내려갔다.
생각보다 우호적인 반응이 많았고.
확실한 건, 이번 예능에서 실수가 없었다는 것.
게다가 내 분량이 꽤 많이 나왔다.
엉뚱하다, 어리바리하다, 웃기다 등등 여러 반응들이었다.
어쨌든, 예능에서 웃긴다는 건 칭찬이니까… 좋은 거겠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은 치킨을 입에 물었다.
***
“형, 여기에 올려 있던 대본은 다 읽었는데, 혹시 더 있어?”
테이블에 있던 대본을 가리키며 물었다.
김 실장은 눈이 휘둥그레진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벌써 다 읽었어?”
“응, 몇 개 괜찮은 거 찾기는 했는데, 조금 더 보고 싶어서.”
“잠시만….”
그는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대본 무더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기.”
김 실장은 대본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손가락을 튕겼다.
무언가가 생각난 모양이다.
“아, 희성아!”
들었던 바로 대본을 내려놓은 채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예능, 반응이 괜찮아서 섭외가 하나 더 들어왔어.”
“정말?”
나는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호흡이 가빠졌다.
예능 섭외가 들어왔다는 말에, 두 가지의 감정이 공존했다.
예능에서의 내 모습을 보고 섭외가 들어왔다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이기에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지난번 촬영 당시, 울렁증이 온 것처럼 그 추운 눈썰매장에서 땀을 흘렸던 기억이 선명했다.
내가 또다시 예능을 찍으면 잘해낼 수 있을까?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선 마음.
김 실장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근데 거절했어.”
“왜?”
“배우 이미지가 소모되면 안 되니까. 코믹 캐릭터가 굳어지면, 나중에 작품 하기도 힘들고 말이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능은 드라마나 영화 찍고 홍보 목적으로 출연하는 거면 충분해. 괜찮지?”
“좋지.”
이번 예능처럼 떠오르는 신예 특집도 좋았지만.
김 실장의 말처럼 내가 조금 더 이름을 알린 후에는 홍보 목적으로 한 번씩 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 더 열심히 달려야 한다.
***
금요일 오후.
최서빈과의 약속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가 찍어준 주소.
대체 거기는 뭐 하는 곳일까….
검색을 해봤지만, 그 건물에는 고급 식당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단둘이 밥을 먹기 위해 이렇게 약속을 잡은 건가?
그렇다면 굳이 비밀스럽게 만날 필요가 있는 건가.
무슨 일인지, 혹시 다른 사람도 함께 만나는 것인지.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었지만, 물어볼 타이밍을 놓치기도 했고.
게다가 최서빈의 스타일로 보아, 꼬치꼬치 캐묻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그가 나쁜 걸 권유할 리는 없을 테니까.
우선 그를 믿고 가보기로 한 것이지.
김 실장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그가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고.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어차피 내 개인 약속이었으니까.
김 실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스러운 말투로, 필요한 일이 생기면 몇 시든 상관없이 자신에게 호출하라고 했다.
나무 살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문.
입구부터 ‘프라이빗’이라는 느낌이 가득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장을 빼입은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누군지, 어디로 예약을 했는지도 듣지 않은 채.
곧장 안내를 해준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무전기 인이어를 통해 작게 읊조렸다.
“최선중 님의 예약 방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지금 안내해 드립니다.”
최선중?
그의 무전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금방 이해할 수가 있었다.
아마 최서빈이라는 연예인 이름을 예약자로 달아두면 티가 나기에 다른 이름으로 예약했을 터.
그를 따라 안쪽으로 한참을 걸어가니, 드디어 예약된 룸에 도착했다.
누가 왔는지 절대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프라이빗 룸.
똑똑.
직원이 문 앞에서 작게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자 안에 있던 최서빈이 나를 환하게 반겼다.
“희성아, 왔어?”
“네, 선배님.”
한 발짝 안으로 들어가 그에게 허리를 접었다.
미소를 짓는 최서빈 옆에는 인자한 얼굴을 한 사람이 있었다.
잠깐만.
저 얼굴, 익숙한데….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고, 곧장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바로 장호철 감독.
현대 판타지 영화인 ‘검사님 출세하신다’라는 작품의 감독.
최근 나온 그 영화는 500만이라는 숫자의 관객을 모을 정도로 중박을 터트렸다.
말이 중박이지, 함께 개봉한 영화들이 짱짱했기에 500만이라는 숫자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내가 접었던 허리를 펴자, 최서빈이 내게 말했다.
“여기는 장호철 감독님. 알지?”
“그럼요. 장호철 감독님을 모를 수가 있나요.”
장 감독은 내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최서빈이 미소를 지은 채 내게 말했다.
“소개해주고 싶어서 오늘 불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