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9 –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3)
“추우시죠?”
블라인드 미션의 마지막 게임.
추운 눈썰매장에서 주어진 미션을 완료한 뒤, 실내로 먼저 들어가는 게임이었다.
우리는 협찬이 들어온 롱 패딩을 하나씩 입은 채 입을 열었다.
“아니요. 패딩을 입으니까, 겨울인 줄도 모르겠어요.”
“맞아요. 밖에 더 있어도 되겠는걸요?”
광고인 패딩에 대해 극찬을 날리자, MC가 웃으며 내게 물었다.
“하하, 그럼 희성 씨는 조금 더 계시다가 들어오실래요?”
나는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멋쩍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하, 그렇지만 좋은 패딩을 입고 게임에서 1등을 하는 게 더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자, 모두 앞에 주어진 미션들을 보고 똑같이 만드시면 성공입니다.”
눈앞에 놓인 긴 테이블.
그 위에는 각각 다른 미션들이 놓여 있었다.
내 앞에는 형형색색의 블록들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
네모난 블록이 아닌, 대체 이걸 어떻게 쌓을 수 있는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와, 희성 씨한테 최고 난이도가 나왔는데요?”
함께 나온 게스트들이 내 미션을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저는 쉬운 거 나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내 미션을 보며 웃는 배우들.
가장 힘든 미션이 나온 덕에, 모든 카메라가 나를 향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MC는 손을 뻗으며 외쳤다.
“준비… 시작!”
사진 속에 나와 있는 탑 모형을 쌓기 위해 서둘러 손을 움직였다.
추운 날씨, 설상가상으로 내리기 시작한 하얀 눈.
정교하게 블록을 만져야 했는데, 얼어가는 손끝은 그걸 해낼 수가 없었다.
“하아….”
입김으로 손을 호호 불며 녹였고.
연신 떨어지는 블록 때문에 소리가 울리자,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독차지하고 말았다.
“저 했어요.”
“오오, 한소정 씨 성공!”
그때 들리는 MC의 목소리.
“꺄아.”
한소정은 운이 좋게도 가장 쉬운 미션이 나왔고.
그녀는 MC의 성공이라는 말에 소리쳤다.
“제가 1등인 거죠?”
“네, 소정 씨는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 준비된 뜨끈한 음식을 드시면 됩니다.”
한소정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 먼저 들어가서 즐기고 있겠습니다. 여러분, 파이팅!”
그녀가 내게 손을 흔들며 실내로 들어갔다.
이후 한 명의 게스트가 이어 성공했고.
남은 인원은 나와 민우현뿐.
시간이 계속해서 흐르자, 손과 양 볼이 점점 더 붉어졌다.
“여기서 희성 씨와 우현 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스태프 한 명씩 붙어 보겠습니다.”
MC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달려오는 스태프.
민우현의 옆에는 덩치가 좋은 카메라 감독이, 내 옆에는 어려 보이는 막내 작가가 다가왔다.
“직접 미션에 참여하실 수는 없고요. 옆에서 같은 미션을 수행하면서 말로 알려주시면 됩니다.”
그의 말에 막내 작가는 재빨리 내 옆에서 모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탑을 쌓아올렸다.
순간 넋을 놓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와아! 작가님, 어떻게 금방 하셨어요?”
그녀는 멋쩍은 미소로 말했다.
“이거 제가 만든 미션이거든요.”
“아… 그래서 빨리하셨구나.”
서둘러 정신을 차리곤 손을 여러 번 쥐었다 펴며 물었다.
“저도 알려주세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탑을 다시 쌓아올렸다.
“보세요. 이렇게….”
한껏 집중한 채 그녀를 따라 손을 움직였다.
어느새 손이 얼었다는 것도 잊은 채, 탑이 하나씩 올라갔다.
“오오, 우현 씨 이러다가 희성 씨한테 지겠는데요?”
MC는 나와 민우현 앞을 왔다 갔다 하며 멘트를 쉬지 않았다.
막내 작가 역시 자신의 일처럼 집중하며 내 옆에 밀착한 채 말했다.
“이렇게, 최대한…!”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따라 해보세요.”
그녀의 말에 침을 한번 삼킨 채 소리쳤다.
“최대한!”
“아니요.”
그녀는 숙이고 있던 허리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걸 따라 하시면 어떻게 해요. 최대한 올리는 행동을 따라 하라는 말이죠.”
“…아!”
내 말에 현장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심지어 나를 찍는 카메라 감독마저 웃는 바람에 카메라 화면이 마구 흔들렸다.
걷잡을 수 없이 퍼진 웃음은 민우현에게까지 퍼졌고.
하도 긴장한 탓에 뭘 틀린 줄도 몰랐던 나는 홀로 멀뚱히 서 있었다.
MC가 그런 내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하하! 여러분, 예능의 보물을 찾았습니다.”
그는 손뼉을 치며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 씨, 그동안 어디에 계셨던 거예요. 앞으로 저랑 예능합시다!”
앞에 앉아 있던 메인 PD는 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
드디어 ‘시계공과 무희’의 마지막 화 방영이 끝났다.
16화 시청률은 15.8%를 찍으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KTS의 드라마는 7.2%.
PBC의 드라마는 9.8%.
엄청난 숫자 차이로 당당히 동 시간대 1위를 차지했다.
요즘 드라마 시청률로 보자면, 15.8%는 아주 훌륭한 결과였다.
더군다나 1화에서는 10.3%로 시작했기에, 성공적인 마무리라고 할 수 있지.
지금 참석한 종방연 자리는 엄청난 파티 분위기였다.
물론, 나는 조연이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다.
그래도 간혹 신스틸러라는 극찬을 받았기에, 충분히 만족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시작된 종방연.
출연한 전 배우와 스태프가 함께한 자리.
많은 인원 탓에 고깃집을 통째로 빌린 모양이다.
연예인들이 가득한 곳이었지만 다 드라마 관계자들뿐이었기에 눈치를 볼 일도, 목소리를 낮출 필요도 없었다.
배 감독은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소리쳤다.
“다들 촬영하느라 고생 많았고, 어쨌든 좋은 결과로 마무리되어서 더더욱 좋습니다.”
그는 잔을 높이 들었다.
“그럼 한 잔 쭉 들이켜고, 오늘 밤새 마셔봅시다. 위하여!”
“위하여!”
축제 분위기에 누구 하나 술을 빼지 않고 들이켰다.
고기 불판이 여러 번 바뀌고, 술병이 테이블에 가득 올라올 무렵.
내 테이블에는 조연을 맡았던 신성현과 고아현.
그리고 최서빈이 함께 앉아 있게 되었다.
“저희 짠, 할까요?”
고아현이 소주잔을 들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찰랑-
술잔이 부딪치며 술이 흘러넘쳤다.
그만큼 테이블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크으.
연신 들이켠 소주에 속이 싸해지는 느낌.
“희성 씨.”
신성현이 내게 소주를 채워주며 말했다.
“이번 드라마가 첫 미니시리즈라고 했죠?”
“맞습니다.”
그는 내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미니시리즈 데뷔작이 MBS라니, 진짜 대단한 거예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에게 소주병을 건네받은 뒤, 술을 따라 부었다.
“게다가 그 작품이 ‘시계공과 무희’라서 더 영광이었죠.”
우리의 대화를 듣던 최서빈이 입을 열었다.
“성공적인 스타트지. 축하한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쳤고,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배우들이 모여 있는 자리인 만큼, 우리의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다음 드라마 스케줄로 옮겨졌다.
“아현 씨는 다음 작품으로 뭐 준비하고 있어요?”
신성현의 질문에 고아현은 수줍게 미소를 보였다.
“저는 이번에 영화 하나 들어가요.”
우리의 시선은 그녀에게 향했고, 연신 웃는 거로 보아 대단한 작품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무슨 영화요?”
“로맨틱 코미디 영화인데, 거기서도 주연 친구 역할이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쉬지 않고 바로 들어가신 거 보면 참 대단하네요.”
고아현은 몸을 테이블 안쪽으로 기울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근데 사실… 정빈 감독님 작품이에요.”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계의 보증 수표 감독 중 한 명.
그가 만든 작품 중 잘된 영화를 고르는 것보다, 망한 영화를 고르는 게 더 빠를 정도다.
게다가 다작 감독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녀의 말에 신성현이 입을 떡 벌렸다.
“우와! 흥행 보증 수표 영화인데, 진짜 잘됐네요.”
그녀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맞아요. 정빈 감독님 작품에 출연만 하면, 이후 작품들도 물밀듯이 밀려올 거잖아요. 축하드려요.”
우리의 축하에 고아현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그녀가 술을 마시며 대화의 흐름이 끊겼고.
그제야 최서빈이 입을 열었다.
“희성이는?”
그의 말에 놀라 최서빈을 바라보니, 그가 재차 물었다.
“너는 다음 작품 준비하는 거 있어?”
순식간에 시선들이 옮겨졌고, 내 대답을 기대하는 눈빛.
“아직 주연은 안 될 것 같아서, 조연 위주로 대본을 보는 중입니다.”
최서빈은 아랫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연은 못 하더라도 기왕이면 비중이 좀 있는 조연을 하고 싶어서요.”
내 말에 신성현이 답했다.
“그렇죠. 조연도 급이 여러 개잖아요.”
“예, 주연급 조연이어야 분량도 많으니까요.”
“맞아요. 얼른 다작해서 주연 한번 해보고 싶네요. 하하.”
신성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성현 씨는요?”
“저도 오디션 볼 작품을 고르는 중입니다.”
그의 말에 고아현이 물었다.
“성현 씨는 드라마로 가시는 거예요?”
“예, 부모님께서 항상 TV만 보시거든요. 영화관을 통 안 가셔서.”
“그래서 드라마만 하시는구나.”
신성현은 부모님 생각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고아현이 손가락을 튕기며, 나와 신성현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드라마 대본 중에 괜찮은 남자 조연 역할을 제가 몇 개 봤는데….”
그녀의 말에 신성현이 자세를 고쳐 앉아 경청하기 시작했다.
몇십 분이 흐르고, 고아현은 옆 테이블로 옮겨갔다.
“저 화장실 좀….”
새빨개진 얼굴의 신성현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떠난 후, 테이블에는 나와 최서빈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선배님, 술 드릴게요.”
내가 술을 건네자, 최서빈이 잔을 들었다.
“희성아, 이번 주 금요일에 뭐 해?”
그러곤 내게 술병을 받은 뒤, 내 빈 잔에도 술을 부었다.
“금요일이면… 아마 그냥 대본을 보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최서빈이 술을 홀짝이며 자신의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러면….”
그는 휴대 전화의 자판을 두드리며 말을 늘렸다.
나는 최서빈의 다음 말을 듣기 위해 빤히 바라보았고.
지이잉.
그때 테이블 아래 내려놓았던 휴대 전화에서 진동이 울렸다.
최서빈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시선을 휴대 전화로 옮기지는 않았다.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자, 최서빈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턱으로 테이블 밑의 내 휴대 전화를 가리켰다.
그의 제스처에 곧장 확인했고.
열어보니 한 통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더니, 내게 문자를 보낸 모양이다.
서둘러 문자함을 클릭했다.
-서울시 서초구….
그가 보낸 내용은 다름 아닌 주소지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최서빈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무심하게 남은 소주를 입에 털어 부으며 답했다.
“금요일 6시까지 그 주소로 와.”
“네?”
최서빈은 곁눈질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싫어?”
무슨 일인지, 저 주소지가 어디인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저 자신만을 믿고 오라는 듯한 저 눈빛과 말투.
워낙 대한민국 자타 공인이 인정하는 톱 배우이기에 이상한 의심이 들지는 않았지만.
아직 그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제안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최서빈은 내 대답을 듣자마자 입꼬리를 휘었다.
“그래, 그러면 그때 보자고.”
…어.
대체 뭐지?
나를 왜 따로 보자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