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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34)화 (34/303)

34화 #9 –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2)

헤어와 메이크업을 마치고 차에 올라타자, 김 실장이 반겼다.

“출발할까?”

“응.”

김 실장은 액셀을 밟았고, 덜컹거리는 차만큼이나 내 심장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하며 굳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자 김 실장이 물었다.

“괜찮아?”

룸 미러로 보이는 걱정스러운 그의 표정.

그러나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성아, 오늘 블라인드 미션은 떠오르는 신예 특집이래.”

“또 누구 나오는데?”

그의 말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박선후랑 민우현.”

친분은 없지만, 요즘 드라마 미니시리즈와 영화에 조연으로 나오는 신예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신예 특집에 나가게 됐다는 사실에, 내심 흐뭇했다.

나 역시도 그들을 인터넷이나 매체를 통해 자주 봤기 때문이지.

김 실장은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이었다.

“아, 한소정도 나온다.”

“단막극 같이 찍었던 한소정?”

그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별을 보지 않아’ 출연 이후로는 처음 보겠네.”

“…그렇지.”

“한소정은 이후에 별다른 활동은 없던데, 신예 특집에 나오네.”

“그러게. 그래도 한소정도 나오고, 잘됐네.”

내 말에 김 실장이 눈썹을 들썩였다.

한소정과는 단막극 이후에 짧은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녀도 ‘시계공과 무희’에 관심이 있어 오디션을 봤지만 떨어졌다는 대화였다.

이후 따로 연락을 하거나 만난 적은 없었다.

그저 서로 응원을 할 뿐.

단막극에서 한소정과 호흡을 맞추며 그녀의 신인답지 않은 연기에 감탄했었다.

그래서 그녀가 금방 뜰 거라 생각했지.

결국 신예 특집에 함께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김 실장이 룸 미러로 나를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포맷, 지금 설명해줘도 돼?”

“그럼.”

운전석 쪽으로 몸을 당겨 그의 말에 집중했다.

“희성이 너도 이미 알고는 있을 테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알려줄게.”

“응.”

그는 한 손을 허공에 저으며 말했다.

“포맷은 간단하더라고. 랜덤 미션을 줄 거고, 그걸 깨면 보상을 해주는 거지.”

“무슨 미션인지는 아예 모르는 거지?”

김 실장은 코를 찡긋거렸다.

“어, 매니저들한테도 안 알려준다고 하더라.”

“하긴, 그래야 리얼리티가 살겠네.”

“엄청나게 곤란하거나 힘든 건 없지 않을까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달리는 창문을 바라보자 김 실장이 내게 말했다.

“희성아, 가려면 한참 걸려. 한숨 자.”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눈을 스르르 감았다.

차는 촬영장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렸고.

조용한 차 안이었지만, 끝내 잠이 들지는 않았다.

체력 보충을 위해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긴장되는 마음 때문인지 결국 눈을 뜨고 말았다.

그때, 룸 미러로 김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희성아, 표정이 안 좋은데 왜 그래. 괜찮은 거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 별거 아니야.”

평소 멀미조차 없는 나였기에, 이런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어지럽고 심장 박동 수가 미친 듯이 오르는 이 기분.

흔들리는 차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예전 드라마 촬영 때 겪었던 카메라 울렁증.

딱 그 느낌이다.

사라진 줄만 알았던 카메라 울렁증이, 첫 예능을 찍으러 가는 차 안에서 나타나다니.

이거 예능 울렁증이 오는 것 같은데….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항상 드라마 대본을 보고 나면 관련 꿈을 꾸고는 했다.

그리고 그 꿈을 꾸고 난 이후부터는 거짓말처럼 카메라 울렁증도 사라졌고.

몰입 또한 배역의 그 사람이 된 것처럼 이상하리만큼 잘됐지.

물론 연습도 미친 듯이 하기는 했지만, 분명 꿈 덕도 있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김 실장에게 예능 촬영 구성안과 대본을 받은 날.

그것들을 모두 읽고 낮잠을 청했다.

혹시나 꿈을 꿀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지.

하지만 꿈에는 그 무엇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밤에 잠을 청하기 전에도 대본을 외울 정도로 달달 읽고 또 읽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고.

그러나 그날 밤 역시 꿈에는 그 무엇도 나오지 않았다.

꿈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는 못했지만, 그만큼 모니터링을 했으니 예능 장면들이 머릿속에는 각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첫 예능이다 보니, 긴장되는 마음에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예능에서 내가 잘못 비추어져서 조금이라도 얻은 인지도가 사라지지는 않을까?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고.

그 생각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잘할 수 있으려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적막이 흐르던 차 안.

내비게이션의 소리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김 실장은 기나긴 운전에 뻐근하던 목을 돌리며 말했다.

“희성아, 도착했다.”

“고생했어, 형.”

그는 몸을 뒤로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준비됐어?”

이에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내려보자.”

문을 열고 내리자, 세상은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오늘 촬영지는 다름 아닌 눈썰매장.

새하얀 눈들로 덮인 이곳에는 수십 대의 카메라와 스태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미친 듯 뛰기 시작한 심장.

젠장.

울렁증이라도 온 건가.

뒤를 돌아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짧게 여러 번 내쉬었다.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은 후, 천천히 현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추운데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옷 갈아입으시고, 바로 첫 번째 미션 들어갈게요.”

스태프들이 우르르 다가와 몸에 달린 마이크를 떼어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었던 오프닝.

하얀 눈밭을 배경으로 오프닝을 찍었기에 영하의 온도였지만.

내 등줄기에는 땀이 한 바가지나 쏟아졌다.

열심히 준비한 덕에 오프닝 인사는 대사를 내뱉듯 술술 나왔다.

그래도 여전히 떨리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 멀리서 담요를 들고 기다리는 김 실장에게 달려갔다.

“형, 나 괜찮았어?”

그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좀 얼어 있는 것 같기는 했는데. 신예 특집이라 그런지, 다들 긴장했더라.”

“정신이 하나도 없네.”

“원래 처음에는 그렇지. 이제 게임도 하고 그러면, 금방 적응할 거야.”

그가 건네주는 담요와 핫 팩으로 손을 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바로 썰매 타러 올라가는 건가?”

“아니, 실내에서 짧게 찍고 다음에 썰매를 탈 거라고 하더라.”

김 실장이 차에서 옷을 꺼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자.”

“응.”

옷을 갈아입은 뒤에 주어진 짧은 휴식 시간.

하지만 차에서 쉬는 대신에 현장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에 멀뚱히 서 있는 한 사람.

바로 한소정이었다.

드라마 촬영 때도 그러더니, 오늘도 구석에 홀로 있는 모습.

혼자 서 있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소정 씨, 여기서 뭐 해요?”

“아… 저 옷 다 갈아입어서, 촬영 시작 기다리고 있어요.”

현장에서 나눠준 트레이닝복 세트.

얇은 맨투맨만 입고 있기에, 옷 끝으로 나온 그녀의 손은 새빨개져 있었다.

“추우시죠?”

재빨리 바지 주머니 속에 있는 핫 팩을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거라도 좀 하세요.”

그녀는 내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아… 감사해요.”

추웠었는지 한소정은 얼어버린 입으로 겨우 대답한 뒤, 재빨리 핫 팩을 집어 들었다.

“소정 씨도 예능 첫 촬영이죠?”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처음이라 하도 긴장해서 오프닝이 어떻게 지나간 줄 모르겠어요.”

“저도요.”

한소정은 상황이 어색한 것인지, 여전히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소정 씨는 예능을 잘하실 것 같던데요?”

내 너스레에 한소정이 그제야 옅은 미소를 보였다.

“희성 씨도요.”

“하하, 감사해요. 신예 특집인데, 오늘 저희 잘해봐요.”

한소정은 수줍게 입술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핫 팩을 양손으로 쥐고 얼굴과 손을 녹이던 그녀는 내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오늘 서로 도와주는 거 어때요?”

“네?”

작은 그녀의 목소리에 내가 되묻자, 한소정이 내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 촬영에서 서로 도와주자고요.”

단막극을 함께 찍을 때, 한소정은 늘 촬영이 끝나면 재빨리 사라지거나 홀로 있는 것을 좋아했던 터라.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녀의 제안이 놀라웠다.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게.

나 역시 첫 예능 촬영이라 떨리는 마음이 가득했기에, 그녀의 말이 고맙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좋아요.”

활짝 웃으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

“그럼 오늘 서로 멘트도 받아주고, 도와주면서 잘해봐요.”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스태프의 외침에 우리는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

“다음은 각자 물건을 쥐고,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거예요.”

MC의 말에 민우현이 질문을 던졌다.

“무슨 물건이요?”

“그건 복불복, 뽑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종이가 가득 담긴 뽑기 통을 흔들며 말했다.

“이 안에 뭐가 들었을지는 모르지만,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깨트리거나 놓치지 않도록 잘 지키셔야겠죠?”

MC는 뽑기 통을 들고 내게 걸어왔고, 그에게 물었다.

“그럼 천천히, 조심히 내려와야겠네요.”

내 말에 그는 검지를 뻗었다.

“아니죠. 선착순이니까,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오셔야 합니다.”

나는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신 있습니다!”

모니터링을 하며 얻은 것 중 하나인 리액션.

예능에서의 리액션은 선택이 아닌 필수.

두 손을 모으고 뽑기 통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뽑은 종이.

“자, 희성 씨. 쫙 펴서 카메라에 보여주세요!”

“제가 뽑은 건….”

나는 종이를 한 번에 펼쳐들었다.

“메추리알?”

옆에 있던 한소정이 내 종이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메추리알은 너무 어려운 거 아니에요?”

“맞아요. 조금만 힘을 주면 깨져 버리잖아요.”

MC는 실소를 터트리며 답했다.

“계란보다 약하니까, 아주 고난이도로 예상되네요.”

당황한 내 얼굴과 흔들리는 동공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모두 뽑기를 마친 뒤, 물건을 들었고.

MC가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준비하시고.”

삑-

호루라기 소리가 눈썰매장에 울려 퍼졌고.

조심스럽게 메추리알을 손에 쥔 채 위로 뛰기 시작했다.

설렁설렁한 모습이 아닌,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뒤에서 소리치는 것도 듣지 않은 채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렸다.

그 덕에 꼭대기에 가장 먼저 올라갔다.

가쁜 숨을 몰아 내쉬곤 썰매에 올라타려는 그때.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럴 수가!

달리기 전, 급한 마음에 썰매도 없이 내달리고 만 것이다.

나를 찍는 카메라 감독과 정상에 올라와 있는 MC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희성 씨, 아까부터 아래에서 썰매 가져가라고 소리쳤는데 뛰느라 못 들으셨죠? 하하.”

“아… 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시작했다.

그때, 헥헥거리며 썰매를 끌고 오는 사람.

바로 한소정이었다.

그녀는 날아가거나 찢어질 가능성이 높은 티슈 한 장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 비하면 미션 난이도가 낮은 편이었다.

그 덕이었는지, 아니면 서로를 돕기로 한 탓이었는지.

그녀는 양손에 하나씩 썰매를 들고 있었다.

“희성 씨… 하아, 여기요.”

한소정이 썰매 하나를 내게 건넸다.

그 모습을 찍기 위해 카메라가 우르르 다가왔다.

“크으, 두 분이 함께 드라마를 찍으셔서 그런지, 챙겨주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습니다!”

MC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희성 씨는 소정 씨 덕분에 바로 썰매 타고 아래로 내려갈 수 있겠네요. 어서 서두르세요!”

“고마워요.”

그녀가 건네는 썰매를 받아들었고.

마주 본 그녀는 나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동시에 썰매에 몸을 맡긴 채 눈길을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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