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9 –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1)
섭외가 들어온 예능은 지상파가 아닌, 종편 JBC의 프로그램이다.
시청률은 3% 남짓으로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JBC의 간판급 예능은 아니지만, 꾸준한 시청률로 사랑받고 있는 프로그램.
나는 사무실에 출근해 연습실에 앉자마자 최근 방송부터 모니터링을 하기 시작했다.
[블라인드 미션]
방송이 시작됐고, 몇 번 본 적이 있는 프로그램이기에 시청자의 입장으로 방송에 몰입했다.
피식거리며 방송을 보던 중.
저 예능에 내가 나간다면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얼굴에 띠고 있던 미소를 지워냈다.
방송을 보고 웃고 즐길 때가 아니다.
마우스에 손을 올리고, 방송 맨 앞으로 커서를 옮겼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재생된 방송.
드라마 모니터링을 하듯 경건한 마음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한 장면마다 게스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공부하듯 다시 보기 시작했다.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났고.
내 노트에는 모니터링을 한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때 연습실 문을 열고 다가오는 사람.
바로 김 실장이었다.
“희성아, 잘 보고 있어?”
그의 말에 스페이스를 클릭해 영상을 멈췄다.
김 실장은 내 앞에 놓인 글씨가 꽉꽉, 촘촘하게 적힌 노트를 보며 말했다.
“이야, 열심히 모니터링하고 있었네.”
“근데 방송이 엄청 재밌어.”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내 옆 의자에 앉았다.
“블라인드 미션, 전에 본 적은 있어?”
“응, 평소에 몇 번 본 적은 있는데, 내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하긴, 예능은 처음이니까.”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 실장은 몸을 돌려 내가 보던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같이 좀 봐보자.”
그의 말에 나는 다시 펜과 노트를 집어 들었다.
김 실장과 함께 한 시간가량 방송을 본 후.
가만히 앉아 있느라 굳은 몸을 풀어냈다.
“형, 근데 이거 대본은 없는 거야?”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없어. 리얼리티 예능이라, 그나마 촬구는 있을 거야.”
“촬영구성안 말하는 거지?”
“어, 순서 나와 있는 그거.”
그의 말을 글씨로 끄적이며 답했다.
“그럼 그거라도 미리 볼 수는 없는 건가?”
“촬구랑 MC 오프닝 대본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야. 미리 받아서 넘겨줄게.”
그의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고마워, 형.”
김 실장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쉬었다가 더 봐. 다리에 쥐 나겠다.”
“한 편만 더 보고 쉴게.”
첫 예능이라 걱정되는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김 실장은 내 어깨를 양손으로 주물렀다.
“너무 걱정하지 마. 리얼리티라서 그냥 편하게 너 그대로를 보여주면 돼.”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이 사그라지지는 않았다.
김 실장이 연습실을 나갔고.
나는 쉴 새 없이 곧장 다음 화를 재생시켰다.
***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회사로 출발했다.
전날 밤늦게까지 블라인드 미션 모니터링을 했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쉴 수는 없는 노릇.
더군다나 예능을 보면 볼수록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담감만 더욱 심해졌다.
방송을 보며 웃을수록, 나는 저런 상황에서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내가 한마디를 내뱉었을 때 재미없으면 어떻게 하지?
여러 가지 걱정과 고민에 휩싸였고.
이대로 집에서 모니터링만 하고 있는 것보다 회사로 나가 김 실장과 이야기하며 고민을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일찍 왔네?”
김 실장이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겼다.
“응, 집보다는 회사에서 일하거나 연습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잘했어.”
그는 자신의 책상에서 서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게 뭐야?”
“블라인드 미션, 촬구랑 대본.”
촬영 구성안과 MC 대본을 구할 수 있을 거라더니, 벌써 자료를 얻은 모양이다.
그는 뿌듯한 얼굴로 서류를 바라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글씨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를 바라보니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모니터링을 할 때에도 물론 걱정이 됐지만, ‘블라인드 미션’이라는 글씨가 적힌 것을 보니 더욱 실감이 났기 때문이지.
내가 정말 예능을 찍는구나.
사실 예능 출연은 해본 적이 있기는 하다.
물론, 게스트로 출연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저 엑스트라로 나온 것일 뿐.
야외 예능 촬영 당시, 배경처럼 보이는 엑스트라를 맡았던 것.
배우로, 그리고 게스트로 출연하는 것은 처음이다.
더더욱 부담감이 더해졌고, 모니터링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드라마 오디션 볼 대본은 지금 안 봐도 괜찮은 거지?”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이제 막 드라마 끝났으니까, 천천히 시작해도 돼.”
새로운 드라마 대본은 일단 예능 촬영 뒤로 미뤄두고.
당분간은 예능 모니터링에만 집중해야 한다.
둘 다 잡으려다, 모두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
차근차근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
“그럼 시계공과 무희랑 예능 모니터링만 하면서 공부 좀 해야겠어.”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렇게 해. 그 뒤에 오디션 준비해도 충분하니까.”
나는 자리에 앉아 촬영 구성안을 읽기 시작했다.
***
-잠시 후, 시계공과 무희가 방송됩니다.
박민준은 거실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드라마 촬영 이후, 일정이 없는 박민준은 본방송을 사수했다.
냉장고에서 꺼내온 맥주 캔을 뜯고 한 모금을 들이켜자 드라마가 시작됐고.
그는 맥주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드라마에 집중했다.
-내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소.
화면 속에서는 배역을 연기하는 모습이 나왔고.
자신을 바라보는 박민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크으, 저기 좀 마음에 든단 말이지?”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깨를 움찔거리며 재차 드라마에 집중하자, 화면이 전환됐다.
그리고 나오는 진희성의 모습.
웃고 있던 박민준의 입꼬리가 쓰윽 내려갔다.
빨리 감기라든지 뒤로 돌리기가 있으면 넘겨버리고 싶은 마음.
하지만 본방송이기에 별다른 수는 없었다.
그는 눈길을 돌려 휴대 전화를 바라보았다.
인터넷을 열어 드라마 실시간 게시판에 들어가자 뜨는 시청자들의 반응.
-진희성 좀 더 잘생겨지는 것 같지 않음?ㅋㅋ
-조연이긴 한데, 진희성이랑 송유나 투 샷 나올 때 잘 어울리는 듯.
-둘 케미 인정이지ㅋㅋ
-박민준이랑 진희성 싸우는 장면 꿀잼이지ㅋㅋ
진희성이 화면에 나와서 그런지, 그에 대한 내용으로 게시판이 도배되고 있었다.
이에 박민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 전화 화면을 꺼버렸다.
한 시간가량의 드라마가 끝나자, 박민준은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 부었다.
TV에는 드라마 예고편이 나온 뒤 광고 화면이 뜬 상태.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뭔가 이상한데?”
항상 집에 혼자 있다 보니,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혼잣말.
박민준은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한 손으로는 대본을 펼쳤다.
대본을 아무리 보아도 진희성보다 자신의 분량이 월등히 많았다.
이전 화 대본을 보아도 분량 차이는 마찬가지.
하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들을 보면, 그 비중이 비등하거나 자신의 분량이 점점 적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편집에서 영향이 있었던 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본을 뒤적였다.
영화는 감독 놀음,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라는데….
분명 대본에는 박민준의 대사와 장면이 많이 보였고.
드라마 모니터링을 할 때는 진희성의 장면이 많은 느낌.
‘PD가 편집을 조금… 아니, 많이 힘쓴 거 같은데?’
박민준은 다시 보기로 드라마 이전 화를 재생시켰고.
자꾸만 나오는 진희성의 얼굴에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저놈의 진희성은 왜 자꾸 많이 나오는 거야!”
탁-
결국, 박민준은 TV 전원을 끄고 애꿎은 리모컨을 세차게 던졌다.
***
정수리까지 높게 질끈 묶은 일명, 똥 머리.
네이비 색의 교복을 입은 박순희가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시계공과 무희’.
-저는 모든 걸 버릴 수 없습니다.
드라마 속 진희성의 모습.
그는 아련한 눈빛으로 카메라와 눈을 맞췄다.
-당신이 함께 있어준다면, 더 바랄 게 없는 것처럼요.
카메라는 진희성의 얼굴을 줌인했고.
화면을 가득 메운 진희성의 눈, 코, 입.
박순희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스르르 열렸다.
‘뭐야, 진희성 잘생겼네.’
그녀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장면이 전환되고 진희성이 사라지자, 그녀는 화살표 키패드를 이용해 드라마를 뒤로 넘겼다.
그렇게 찾은 진희성의 신.
박순희는 다시금 넋을 놓은 것처럼 진희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제가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고요.
진희성은 당황한 얼굴로 허둥대며 바닥을 쓸었다.
-똑바로 하면 내가 이 난리를 쳤겠어?
박민준이 진희성에게 소리쳤고.
진희성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박순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귀엽잖아?”
그녀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하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거실에 있는 부모님이 들을세라 열린 문을 스르르 닫았다.
‘연기도 잘하고, 대사할 때는 몰입력도 장난이 아니란 말이야….’
박순희는 흡족한 얼굴로 눈썹을 들썩였다.
그렇게 한참을 드라마에 빠져 연속으로 몇 편을 내리 본 후.
그녀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박순희는 곧장 휴대 전화를 들어 인터넷 창을 열었다.
‘진희성’
진희성에 대해 검색하며, 그가 출연한 드라마와 사진들을 모두 캡처했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아기자기한 다이어리를 펼쳐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진희성의 프로필과 출연작.
한참을 써내려가던 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재차 진희성을 검색했다.
그러다 더 이상 찾아볼 게 없었는지, 검색어를 바꿔 서칭했다.
‘진희성 팬카페’
-‘진희성 팬카페’에 대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아직 팬카페도 없단 말이야?’
박순희는 놀랍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지며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자신이 팬 페이지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곧장 SNS를 열었다.
“어디 한번 개설해볼까?”
박순희는 손가락을 풀며, 프로필 사진을 진희성의 사진으로 변경했다.
그 후 자신이 저장한 진희성의 사진을 모조리 게시했다.
#진희성 #시계공과무희….
첫 번째 게시물이 올라가자 그녀는 흐뭇한 얼굴로 자신이 만든 SNS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