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32)화 (32/303)

32화 #8 – 연기로 찍어 누른다면 (4)

배 감독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메가폰을 쥐었다.

“희성 씨, 준비됐어?”

진희성은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준비됐습니다!”

“좋아. 다시 가봅시다.”

배 감독이 의자에 앉으며 소리쳤다.

“레디, 액션!”

“네가 그러면 그렇지.”

박민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진희성을 바라보았다.

“기대한 내가 바보다, 바보.”

진희성은 그런 박민준을 째려봤고.

박민준은 한쪽 입꼬리를 찢어질 듯 올렸다.

대본과는 다른 감정 표현.

한번 중단된 촬영에도 불구하고, 박민준은 재차 진희성에게 장난질을 쳤다.

바로 진희성에게 곤란함을 안겨주기 위함이었다.

분명 자신의 뜬금없는 표정 연기에 NG를 낼 거라고 확신하는 박민준은 기괴한 표정으로 얼굴 전체에 미소를 보였다.

그때.

진희성이 눈썹을 역팔자로 휘며 소리쳤다.

“웃음이 나오냐?”

그의 말에 박민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본에 없는 대사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진희성이 의뭉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지금 나랑 장난하냐고!”

진짜로 싸움이 난 듯한 진희성의 목소리와 표정.

그 모습에 스태프들의 눈이 빠르게 굴러갔다.

살얼음을 걷는 듯 차디찬 현장의 공기.

당황했던 박민준은 진희성의 애드리브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배 감독이 진희성의 애드리브에 촬영을 끊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연속 세 번이나 NG를 낼 거라는 생각에 박민준은 곁눈질로 슬쩍 배 감독을 바라보았다.

‘진희성, 결국 못 참고 화내네. 배 감독님한테 털려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런 박민준의 예상과는 달리,

배 감독의 메가폰은 그의 손이 아닌 바닥에 내려져 있었다.

그는 NG를 외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배 감독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진희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희성의 눈빛은 박민준을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고.

박민준은 그 표정을 맞받아치지 못하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카메라는 그들의 얼굴과 눈동자의 흔들림까지 모두 선명히 잡아냈고.

이내 배 감독은 메가폰을 들었다.

“좋았어, 오케이!”

NG가 아닌 오케이라는 말에 박민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제야 자신의 기괴했던 표정이 떠올랐고.

이후 진희성에게 당하는 멘트와 눈빛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는 사실에 그는 서둘러 배 감독을 향해 외쳤다.

“감독님!”

배 감독은 무슨 일이냐는 듯 턱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찍으면 이번에는 제대로….”

“다시?”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 감독이 말했다.

“아니야, 됐어.”

배 감독은 현장으로 다가오며 손뼉을 부딪쳤다.

“희성 씨, 방금 그 애드리브 뭐야, 완전 괜찮은데?”

대본과는 전혀 다른 내용.

진희성과 박민준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서로 대사를 주고받는 상황에서.

진희성의 애드리브로 인해 박민준이 당하는 신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배 감독은 굉장히 흡족해하며 진희성에게 감탄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진희성은 배 감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는 무슨. 대사는 좀 다르긴 했지만, 어차피 흐름은 같고, 이게 더 나아.”

박민준은 굳은 얼굴로 배 감독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배 감독은 진희성을 향해 말했다.

“잘했어.”

배 감독은 미소를 가득 품으며 진희성의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

그가 스태프들 쪽으로 다시 걸어갔고.

박민준은 분노에 차오른 듯 얼굴을 붉혔다.

“자, 다음 신 바로 가겠습니다!”

조감독은 이들을 향해 외쳤다.

“민준 씨는 이번 신에 대사 없이 표정으로만 가니까, 옆으로 조금 빠지면 돼요.”

“…네.”

동선을 옮기며 눈이 마주친 진희성과 최서빈, 두 사람.

보는 눈이 많아 대놓고 인사하기는 애매하기에 진희성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입 모양을 바로 알아챈 최서빈이 씨익,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혼잣말로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잘하네.”

***

10%를 겨우 넘긴 시청률의 1, 2화.

이후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의 노력이 시청자들에게 전달됐는지.

시청률이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는 중이다.

이에 걸맞게 내 인지도도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매 화마다 모니터링을 하면서 느끼는 점이지만, 내 분량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았다.

대본을 통해 박민준과 내 분량을 비교해봤을 때 확연하게 비중의 차이가 난다.

당연히 주연급 조연인 박민준의 분량이 많은 편이지.

하지만 방송으로 보면 엄청나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내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처음 박민준과 대립하는 장면을 찍을 때 흔들리는 감이 있기는 했다.

박민준과 대사를 주고받을 때면, 나도 모르게 평소와 달리 몰입이 조금 깨지는 것을 느꼈기에.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그 느낌과 태도가 확 변했다.

언제부터인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와 대립하는 장면을 촬영해도 안정감 높게 몰입하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예전에 비해 박민준과의 투 샷에서 내 몰입감이 더 좋아졌다는 시청자의 반응과 칭찬도 들려왔다.

실제로 김 실장도 회사의 연기 트레이너가 모니터링을 하고 이 이야기를 해줬다고 했다.

점차 발전해 나가고 있지만, 절대 안주해서는 안 된다.

오랜만에 촬영이 없는 날.

물 들어올 때 세차게 노를 저어야 한다.

다음 작품 준비를 위해 오늘도 회사로 향했다.

대본을 보며 차기작을 골라 오디션을 봐야 하기 때문이지.

미니시리즈의 주연 섭외를 받기 전까지는 항상 같은 패턴의 반복이다.

못해도 서너 개의 조연 역할을 하며 인지도를 쌓아야 주연 섭외가 들어오니까.

김 실장은 출근하는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희성아, 왔어?”

그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제 오나 했어. 줄 거 있는데, 잠시만!”

김 실장이 서랍을 뒤적여 편지 봉투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야?”

갈색 서류 봉투가 아닌, 연분홍색의 아기자기한 봉투.

“너한테 온 거야.”

그는 뿌듯한 얼굴로 눈썹을 들썩였다.

“그러니까, 이게 뭔데?”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팬레터.”

“뭐, 팬레터?”

눈이 휘둥그레져 손에 들린 봉투를 다시 바라보았다.

두툼한 촉감.

그럼 이 안에 내게 쓴 편지가 들어 있다고?

봉투를 열기 전부터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배우를 하고 있지만, 팬레터는 그저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내게 팬이 있고, 그 팬이 편지를 써줬다니.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처음 읽는 편지였기에, 흥분하지 않고 한 글자, 한 글자를 꼼꼼하게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은 스티커로 동봉한 편지 봉투를 조심스레 열었다.

-내 인생의 역대급 배우, 희성 오빠에게.

안녕하세요.

경기도에 살고 있는 희성 오빠의 찐팬이에요.

힘든 고등학교 생활에 오빠는 제 ‘빛’이자 ‘희망’이에요.

오빠를 꼭 보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할게요.

그래서 서울로 대학 가서 오빠 실물을 꼭 영접하고 싶어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오빠를 응원하는 제가, 그리고 팬들이 있다는 거 잊지 마시고.

오빠는 그 자리에서 하던 대로 열심히 해주세요.

-희성 오빠를 응원하는 1호 팬-

“그렇게 좋아?”

편지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김 실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나 태어나서 팬레터 처음 받아봐.”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에,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이 느낌.

온몸이 따뜻해지고 절로 미소가 새어나와 연신 헤실거렸다.

누군가를 이렇게 응원하고 좋아해서 편지까지 써줄 수 있다니.

편지를 보내준 여고생에게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다 못해 넘칠 정도였다.

더불어 의욕이 더욱 샘솟았다.

나를 이렇게 좋아해주는 팬이 있다면.

내가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TV에 더 자주 나오는 것뿐.

편지를 한 번 더 정독한 뒤, 고개를 들어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형, 나 이번에도 미니시리즈 들어갈래.”

김 실장은 내 말에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러자.”

“대본 온 것 중에 괜찮은 거 있어?”

그는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대본 뭉치를 꺼내들었다.

“안 그래도 너 촬영하는 동안 내가 틈틈이 읽으면서 괜찮은 거 추려뒀어.”

나는 쌍 엄지를 치켜 보였다.

“역시 형이야.”

“그럼, 이 중에서 골라봐.”

“어. 얼른 읽어볼게.”

나는 곧장 자리에 앉아 맨 위에 올라온 대본부터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서둘러 첫 장을 펼쳤다.

***

몇 시간 내내 앉은 자리 그대로 대본을 보던 중.

지이잉.

세차게 울리는 전화.

[발신인: 어머니]

읽던 대본을 뒤집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아들. 바빠?

“아니야, 괜찮아.”

-시계공과 무희, 드라마 봤다.

일부러 이번 ‘시계공과 무희’ 드라마에 대해서는 부모님께 이야기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반대가 심하신데, 괜히 드라마를 보고 비중이 적은 내 역할에 실망하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는 꽤 밝았다.

-우리 아들, 연기 잘하더라.

그 어떤 화려한 말들보다 어머니의 짧은 한마디가 심금을 울렸다.

아들이 배우하는 것을 너무 싫어하셨기에, 이 한마디에 뭉클해졌다.

침을 한번 삼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빠도 보셨어?”

-그럼. 네 아빠도 같이 봤지.

사실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반대가 더욱 심했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반응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지.

-네 아빠는 뭐 낯 뜨겁다고 통화는 안 한다고는 하던데….

수화기 너머 들리는 어머니의 옅은 웃음소리.

-TV에서 더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아들.

어머니의 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무나도 잘하고 싶다.

더 많은 드라마에 출연하고, 채널을 돌리면 곳곳에서 내 얼굴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

그게 부모님을 위한 일이자, 내 소망일 테니까.

최서빈 급 배우가 되어서 힘들게 키워준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졌다.

아주 간절하게 말이다.

“더 열심히 할게, 엄마.”

***

“컷, 마지막 신까지 깔끔하게 오케이입니다!”

배 감독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다들 고생했어요.”

‘시계공과 무희’의 촬영이 끝났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얼싸안았다.

기쁨과 헤어짐의 아쉬움을 느끼며 인사하던 그때.

조감독이 다가왔다.

“여러분, 다들 고생 많이 하셨어요.”

그는 모두가 듣도록 소리쳤다.

“오늘부터 푹 쉬셨다가, 종방연은 마지막 회 방송 날. 다 같이 모여서 하기로 했습니다.”

현재 10회가 방영 중이었고, 마지막 회는 3주 뒤.

그날을 기약하며 다들 박수를 치며 마무리했다.

현장에 장비들이 하나둘 정리됐고, 배우와 스태프들은 인사를 나누며 하나씩 현장을 빠져나갔다.

차에 올라타기 전, 저 멀리 보이는 최서빈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저….”

가까이 다가가자 최서빈이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고생했다, 희성아.”

“아닙니다. 선배님이 고생하셨죠.”

그에게 조심스레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혹시 선배님 전화번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묻는 내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휴대 전화를 받아들었다.

“당연하지.”

그는 곧장 전화번호를 찍었고, 우리는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우리는 금방 현장을 벗어났다.

“희성아, 고생 많았다.”

김 실장이 룸미러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야, 형도 고생 많았지. 지방 촬영에, 세트장에 왔다 갔다 하느라.”

뻐근한 몸을 스트레칭하며 그에게 물었다.

“형, 근데 이제 며칠 정도 쉴 수 있나?”

그는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하나 더 할 거 있어.”

“촬영 끝났잖아?”

종방연까지 3주라는 시간이 남았음에도 촬영이 더 있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빨간불 신호에 걸리자, 김 실장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너, 예능 섭외 들어왔다.”

“…어?”

그의 말에 내 심장 박동 수가 빨라지기 시작했고.

김 실장이 확신에 찬 얼굴로 답했다.

“한번 출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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