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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31)화 (31/303)

31화 #8 – 연기로 찍어 누른다면 (3)

해가 떴지만, 전날 마신 술로 인해 일어난 사람이 하나 없는 것 같았다.

모두 느지막이 깼고, 나 역시 햇볕이 방을 내리쬘 무렵 눈을 떴다.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며 준비를 하던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무시하고 로션을 바르고 있는 와중에 그 목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산이라 더 크게 울리며 들리는 건가.

목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큰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굳이 마주쳐봤자 좋은 일은 아닐 터.

최대한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작게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시선 끝에는 송유나와 그녀의 매니저가 마주 보고 서 있었고.

송유나는 한껏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를 치고 있었다.

“오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미안, 내가….”

“하아.”

매니저가 송유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외쳤고.

송유나는 그런 매니저의 사과를 받아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거지?

상황이 알고 싶은 마음에 문에 기댄 채 그들을 지켜보았다.

“아니, 내가 린스 챙기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나 린스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아, 몰라?”

“알지. 유나 너 린스 안 쓰면 정전기 때문에 꼭 필요한 거.”

“알면서!”

송유나는 팔짱을 낀 채 매니저를 쏘아보았다.

이렇게까지 열을 내는 이유가 고작 ‘린스’ 때문이었다니.

“봐봐. 나 오늘 안 그래도 털저고리 의상이잖아.”

그녀는 자신의 옷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하필 정전기가 많이 일어날 법한 털이 가득한 옷이었다.

오늘 그녀의 신을 생각했을 때, 저 옷을 다른 옷으로 대체할 수도 없는 상황.

대사에도 털저고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파직!

“아야!”

하필 그 순간 그녀의 손이 치마에 닿자 정전기가 일어났다.

“이거 봐. 어떻게 할 거야. 그리고 이 치마도.”

그녀는 치마도 거슬리는지 연신 짜증을 내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나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

쭈뼛거리며 다가가자, 송유나는 곁눈질로 나를 쏘아보았다.

“뭐예요?”

신경질이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

“이거 좀 드리려고요.”

“예?”

그녀는 내가 뻗은 손을 미간이 찌푸려진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거 헤어크림이랑 보디로션인데요.”

송유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물건이 아닌 내 얼굴을 보았고.

그에 나는 제품을 그녀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헤어크림을 머리에 바르면 정전기가 좀 나아질 거예요.”

그리고 보디로션을 열고 바르는 시늉을 보였다.

“그리고 옷에 달라붙는 건, 피부에 로션 좀 바르면 정전기가 조금 덜 나요.”

그녀의 매니저는 구세주를 본 것처럼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하지만 송유나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남 일인 양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사 인사를 한 건 그녀의 매니저였다.

그는 고개를 꾸벅이며 내 손에 있는 헤어크림과 보디로션을 받아들며 인사했다.

그리고 최후의 수단으로 주머니에 들어 있던 열쇠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문고리처럼 접지 안 된 쇠붙이 같은 거 잡을 때는 이런 열쇠를 슬쩍 댄 다음에 열면 좋아요.”

그녀는 그제야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제 방 열쇠인데, 어차피 저는 방 안 잠그거든요. 이거 쓰시고 가시기 전에만 돌려주세요.”

송유나는 팔짱을 풀며 내게 물었다.

“진짜 정전기가 안 일어나요?”

의심 가득한 그녀의 눈빛.

“예, 이온이 이동….”

“아, 설명은 괜찮고요.”

송유나는 내 손에 있던 열쇠를 쏙 빼냈다.

그러고는 열쇠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이거 진짜 되는 거냐고요.”

“믿기 싫으면 안 믿어도 되고요.”

나는 입꼬리를 올리고 내 방 쪽으로 가기 위해 뒤돌았다.

발소리를 들어보니 그녀도 방으로 걸어가는 듯했다.

나는 슬쩍 뒤돌아 송유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문 앞에 멈춰 서더니, 문고리에 내가 준 열쇠를 슬쩍 대보고 있었다.

되냐고 짜증 내듯 말하더니 궁금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곧 송유나는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고.

나를 흘긋 보려고 하기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쿵.

이어 문 닫히는 소리가 났고, 나 역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휴.

송유나의 성격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더 장난이 아닌 것 같다.

그녀의 매니저가 안쓰러워지는 날이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저 준비를 시작했다.

***

“대표님, 오셨습니까?”

강 본부장은 HS 엔터 임종주 대표를 향해 허리를 접었다.

“응, 앉게.”

“네.”

회의실에 앉은 두 사람.

강 본부장이 임 대표에게 보고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말씀하셨던 Citizen(시티즌) 자료입니다.”

임 대표는 서류를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Citizen 플랫폼에 꽤 많은 곳에서 드라마를 제공 계약했습니다.”

강 본부장은 임 대표를 향해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설명했다.

“뒷장을 보시면 이번에 플랫폼과 계약한 곳을 목록으로 정리해 뒀습니다.”

임 대표는 차분히 목록을 훑어보았다.

서류를 보던 임 대표는 한곳에 손을 올려놓았다.

“이번에 들어온 업체들이 꽤 많네?”

“네, Citizen이 크게 급부상할 것 같습니다.”

임 대표는 자신이 투자한 플랫폼에 흡족해하며 서류를 마저 살펴보았다.

“gen 스튜디오, 여기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

그의 말에 강 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gen 스튜디오는 이번에 감독들이 대거 이직한 곳입니다.”

“그래?”

“예, 최근에는 박승현 감독이라고, 드라마 스페셜로 유명한 감독 있지 않습니까?”

임 대표도 그를 아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박 감독이 최근에 ‘별을 보지 않아’ 단막극을 찍은 후 바로 이직했습니다.”

“그거 들어본 적 있는데?”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강 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네, 저희 소속 배우 중에 진희성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작품입니다.”

“아… 그 단막극.”

임 대표는 그의 말에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목록을 모두 훑어본 그는 강 본부장을 향해 말했다.

“이번에 우리가 Citizen에 투자를 많이 했으니까, 여기에서도 우리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거야.”

“네, 드라마랑 영화가 잘되고 있어서 OTT 플랫폼 쪽으로 가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한번 추진시켜 보자고.”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강 본부장에게 서류를 건넸다.

***

해남 촬영의 마지막 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 촬영할 내 분량은 단 한 신.

그 신은 나를 포함해 총 4명이 나오는 장면이다.

바로 최서빈과 송유나, 그리고 박민준까지 모두 등장하는 중요한 신이었기에.

일찍부터 일어나 다시 한번 대본을 검토했다.

절대 실수를 해서는 안 되니까.

박민준과의 촬영이 있을 때면 특히나 더 꼼꼼하게 준비하는 편이다.

NG를 내서 그가 짓는 비웃음 섞인 표정을 보기는 싫으니까.

항상 박민준보다 내가 낫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특히 연기에서는 더더욱.

“다음 신 준비하겠습니다!”

조감독의 사인으로 촬영 현장으로 다가갔다.

4명이 합을 맞춰야 하는 신이었기에, 카메라가 돌기 전에 간단하게 대사를 맞추기로 했다.

오늘 장면은 무희 역 송유나를 앞에 두고 말싸움을 하는 신.

첫 부분은 나와 송유나의 스킨십으로 시작된다.

스킨십이라고 해봤자 서로의 손등이 부딪치는 정도.

하지만 사인이 맞지 않으면 화면에 예쁘게 비춰지지 않기 때문에 사전 연습은 필수다.

조감독이 나와 송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희성 씨랑 유나 씨가 이 앞을 지나면서 손이 부딪치고, 서로 뒤돌아 마주 보면 됩니다.”

“네.”

그녀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동선을 맞춰보기로 했다.

“제가 이쪽으로 걸어갈게요.”

나는 송유나 쪽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녀는 눈썹을 들썩였다.

“그래요.”

연습이지만 실전과 다름없이 배역에 몰입했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던 나는 송유나를 스쳐 지나가며 손을 부딪쳤다.

하지만 실전과 다르게 한 점은 바로, 스킨십 부분이었다.

평소 송유나가 짜증이 많은 것을 알기에 연습 때에는 굳이 손을 부딪치지 않았던 것.

며칠 전 회식 때도 넘어질 뻔한 그녀를 잡아 주었지만.

고마워하기는커녕 자신의 팔을 잡은 것만으로도 내게 짜증을 냈었다.

그렇기에 연습하는 지금, 손등을 스치는 모션만을 취했다.

그러자 송유나가 다시 발길을 돌리며 말했다.

“다시 해봐요.”

“네.”

이 정도로 손등이 스치는 것조차 싫다는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장 연습을 재개했고, 조금 전보다 더 손등을 멀리 떨어트렸다.

그러자 송유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냥 손등을 가져다 대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반응에 절로 눈이 커졌다.

그녀는 내 손을 덥석 잡아끌더니 자신의 손등에 붙였다.

“자, 이렇게!”

“…네.”

“됐죠?”

그녀는 마주친 우리의 손을 바라보고, 곧장 고개를 돌려 조감독에게 향했다.

“저희 준비됐어요.”

“좋아요. 감독님, 슛 들어가시죠!”

해남에서의 마지막 촬영이라 그런가, 송유나는 평소와 달리 짜증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의아했지만, 훨씬 보기 좋았다.

배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메가폰을 집어 들었다.

“자, 한 번에 갑시다.”

그는 우리를 쓰윽 훑어본 뒤 소리쳤다.

“레디, 액션!”

시작은 나와 박민준의 대립으로 시작하는 대사였다.

평소 우리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기에 금세 몰입할 수 있었다.

짧은 심호흡으로 배역에 몰입한 뒤, 눈을 부릅뜨고 박민준을 바라보았다.

박민준 역시 내 눈빛에 질세라 도끼눈을 뜬 채 나를 쏘아보았다.

“네가 그러면 그렇지.”

그의 말에 눈을 질끈 감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기대한 내가 바보다, 바보.”

박민준은 팔짱을 끼고 한숨을 푹 내쉬었고.

이에 나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

대사를 하기 위해 입을 열어 대사를 내뱉는 순간.

“그러니….”

박민준이 재차 입을 벌렸다.

그의 입 모양에 순간 대사를 멈췄다.

하지만 박민준은 아무 말 없이 입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곧장 들려오는 배 감독의 목소리.

“NG!”

배 감독의 사인에 나는 탄식을 삼켜냈다.

“희성 씨, 왜 말을 하다가 멈춰.”

나는 곧장 박민준을 바라보았고,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부러 NG를 내게 하려고 한 것이 눈에 선명히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박민준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봤자 달라질 것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해 보겠습니다.”

“그래, 바로 다시 갈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뱉었다.

“레디, 액션!”

박민준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이내 굳은 표정으로 대사를 던졌다.

“네가 그러면 그렇지.”

조금 전의 분노를 그대로 극 중에 녹여냈다.

박민준을 쏘아보자, 그는 갑자기 비웃는 얼굴로 대사를 내뱉었다.

“기대한 내가 바보다, 바보.”

저기서는 분명 화가 잔뜩 난 얼굴이어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박민준이 실수했다는 듯 아차 싶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NG가 날 거라는 생각에 나는 다음 대사를 내뱉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배 감독의 목소리로 고요함이 깨졌다.

“NG!”

또다시 NG가 나버렸다.

배 감독은 메가폰을 쥐고 소리쳤다.

“희성 씨, 오늘 갑자기 왜 그래?”

젠장.

박민준의 어쭙잖은 저 대사와 표정들.

그로 인해 내 실수처럼 비치며 여러 차례 NG가 나고 말았다.

하필 최서빈, 송유나와 함께하는 중요한 신에서 NG가 이렇게 나다니.

나는 한숨을 삼켜내며, 배 감독과 스태프들을 향해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다시 가겠습니다.”

배 감독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희성 씨, 대본 한 번 다시 보고 들어가자. 또 NG 안 나게.”

“…네.”

배 감독은 메가폰을 툭 내려놓았고.

박민준은 나를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저 자식….

내게 엿을 먹이기 위해 하는 행동이다.

대본을 다시 볼 필요는 없었다.

대사를 잊은 것은 전혀 아니었기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뒤를 돌아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때, 최서빈이 슬며시 내 옆으로 걸어왔다.

“잡아먹어 버려.”

그의 목소리에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네?”

“네가 연기로 잡아먹어 버리라고.”

최서빈은 그 말을 끝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귓가에 맴도는 최서빈의 말.

머릿속에 감이 잡혔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는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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