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30)화 (30/303)

30화 #8 – 연기로 찍어 누른다면 (2)

산속이라 저녁이 되기 전인데도 주변은 암막 커튼을 쳐둔 것처럼 깜깜해졌다.

그리고 모두가 모인 이곳.

첫 회식 현장이다.

다음 날 오전 촬영도 없겠다, 모두가 한 산장에 머물고 있기에 빠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배 감독이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산 날씨라 그런가, 비가 이렇게 말끔하게 그칠 줄이야.”

조감독은 그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바닥도 말랐던데, 저녁 촬영 다시 준비할까요?”

그의 말에 배 감독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라이, 어차피 회식하려고 다 모인 거, 오늘 거하게 마십시다!”

배 감독의 말에 스태프를 포함한 배우들까지 모두 박수를 보냈다.

“여기 큰 TV도 있고, 마침 오늘 4화 방영하는 날이니까. 다 같이 모니터링하고, 내일부터 열심히 촬영하자고.”

“네!”

배 감독은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배달 음식도 안 되는 산골이라 스태프들이 준비한 간편 음식들이 세팅되었고.

금세 술판이 벌어졌다.

잠시 어색하던 술자리.

배 감독은 술잔을 채우고 외쳤다.

“우리 시계공과 무희의 완벽한 촬영과 대박을 위해서 건배합시다. 위하여!”

“위하여!”

스태프와 배우들이 엉켜 있는 자리.

술을 마시다보니, 화장실을 오가거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자리가 몇 번이고 바뀌었다.

“짠!”

우리 테이블에는 스태프 두 명과 나, 그리고 시계공 장인 역을 맡은 나이가 지긋한 조연 배우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술을 들이켠 후, 스태프 한 명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이렇게 비가 살짝만 오고 그치면, 산에서는 엄청 건조해진다면서요?”

그의 말에 내 옆에 있던 조연 배우가 입을 열었다.

“맞아요. 산 기후라는 게 그래요. 건조해지기 시작하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경청하던 그때.

저 멀리서 스태프가 큰 소리로 외쳤다.

“시계공과 무희 4화 시작합니다!”

그 한마디에 이곳은 음 소거 버튼을 누른 듯 고요해졌다.

“자자, 빨리 봅시다!”

모두 들고 있던 음식과 술잔을 내려놓으며 몸을 돌려 TV를 바라보았다.

항상 작은 원룸에서 김 실장과 모니터하던 것이 전부였던 내게, 이런 자리는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함께 출연한 배우들과 같이 보는 방송이라니.

더군다나 같이 고생하는 스태프와 감독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드라마를 본다는 게, 걱정스러우면서도 짜릿했다.

모니터링을 위해 맥주를 간단하게 마셨지만, 조금이라도 술기운을 떨쳐내고 싶은 마음에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마지막 광고 후.

화면이 전환되며 4화 방영이 시작됐다.

시끄럽던 회식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래.

들리는 소리라고는 TV에서 나오는 대사 소리와 우리의 숨소리뿐이었다.

몇십 분의 드라마 시청이 계속됐고.

초반에 집중하던 사람들은 하나둘 술도 한 모금 마시고, 안주를 먹으며 편한 분위기로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정자세로 TV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때 서서히 배경이 바뀌며 다음 장면으로 전환되었다.

어두운 무대.

무대 위에서 화려한 모습으로 춤을 추는 한 사람.

송유나였다.

그녀의 머리에 내리꽂는 핀 조명.

흘러나오는 노래와 무대를 힐끔거리며 열중한 그녀의 연기에 우리는 모두 감탄을 자아냈다.

아름다웠다.

무희를 연기한 것이지만, 실제로 무희라는 직업을 가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어울렸다.

TV 속에 나오는 송유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

지금 내 표정과 같은 얼굴로 송유나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또 한 사람.

바로 극 중 김대한 역을 맡은 나였다.

내 표정이 나오자 옆에 있던 스태프들은 곧장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와, 희성 씨 표정 뭐야?”

“그러게. 희성 씨, 저기서 유나 씨한테 진짜 반한 표정인데?”

스태프들의 말에 배 감독은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희1 역을 맡은 고아현이 휴대 전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하, 시청자 실시간 게시판에 희성 씨의 어리바리 연기가 최고라고 도배가 됐어요.”

그녀의 말에 이곳은 온통 웃음바다가 넘실거렸다.

나 역시 웃음을 터트렸고.

고아현은 재차 이어 말했다.

“대체 저런 역할 배우는 어떻게 구한 거냐고 난리예요. 칭찬이 자자한데요?”

그녀의 말에 다른 배우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들의 반응에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연기로써 인정받는 것.

이것보다 짜릿한 게 또 있을까?

심장 박동 수는 주체할 수 없이 빨라졌고.

‘진희성’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연기 잘하는 배우, 라는 말을 듣고 싶어졌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노력만이 살길이었다.

그들에게 미소로 화답한 뒤, 다시 TV로 시선을 옮겼다.

한 시간의 시간이 흘렀고.

감정이 극에 치닫는 마지막 신.

최서빈과 송유나, 두 주연의 감정 신이었다.

역시는 역시였다.

그들은 아무 대사도 없이 서로를 마주 본 채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고.

그 눈빛에 좌중이 압도되었다.

숨 막히는 분위기.

둘 중 누구도 전혀 입을 열지 않았지만, 대사가 들리는 듯 서로에 대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팟-

OST가 깔리며 그렇게 4화 방영이 끝났다.

우리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가 터져 나왔다.

“크으! 이번 화도 잘 나온 것 같습니다.”

배 감독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시작이니까, 다들 열심히 해줬으면 좋겠어요. 나도 열심히 찍을 테니까.”

그의 말에 모두 비장한 얼굴로 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배 감독은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나저나 서빈 씨는 연기를 참 잘해.”

“하하, 아닙니다. 감독님께서 잘 찍어주셔서 그렇죠.”

옆에 앉아 있던 최서빈은 배 감독이 들고 있는 술병을 받아들었다.

술을 받은 배 감독은 잔을 내려놓고 다시 술병을 들었다.

이번에는 송유나에게 술을 권했다.

그의 눈빛을 받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 감독에게 다가가 잔을 내밀었다.

“유나 씨는 감정이 또 어떻고!”

“감사합니다, 감독님.”

“눈빛만으로도 마지막 신을 잡아먹었잖아. 앞으로도 열심히 해줘요.”

“네, 열심히 할게요.”

그녀는 배 감독에게 받은 술을 모조리 입에 털어 부었다.

드라마 방영이 끝난 후.

TV는 꺼졌지만, 이곳의 소리는 더욱 데시벨이 높아져갔다.

배 감독을 포함해 여러 스태프들은 이미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갔고.

배우들도 일부만이 남았다.

“저 여기 앉아도 되죠?”

담배를 피우고 온 건지, 밖에서 들어오던 최서빈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당겼다.

“당연하죠. 앉으세요, 선배님.”

그가 자리에 앉자, 나는 그에게 잔을 건네며 말했다.

“선배님, 소주로 드시죠?”

“네, 소주로 마실게요.”

옆에 있던 소주잔을 그에게 건넨 후, 술을 따랐다.

그는 잔을 받자마자 내 술잔에도 곧장 채웠다.

“오늘도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선배님도 고생하셨습니다.”

그와 나는 서로에게 한마디씩을 한 뒤, 술잔을 입에 털었다.

“아까 방송 보니까 연기 좋던데요?”

“하하, 아닙니다. 선배님 따라가려면 너무 멀었습니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죠.”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리고 선배님,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최서빈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내 손에 있던 술병을 집어갔다.

그리고 내게 소주를 부으며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그럴까?”

“예, 그렇게 하시면 저도 편할 것 같습니다.”

“그래. 자, 술 한 잔 받아.”

“넵, 선배님!”

HS 엔터 테라스에서 맞은편 전광판에 있던 최서빈의 얼굴.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쳤던 최서빈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아우라.

그런 최서빈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저 톱 배우와 친분이 쌓여 자랑거리가 됐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톱 배우와 가까워질 만큼 성장하고 있고, 배우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 뿌듯할 뿐.

김 실장에게 듣기로, 최서빈은 술자리에서의 예의를 굉장히 중요시한다고 했다.

얼마 전 촬영에서 나를 도와줬던 그이기에, 감사한 마음이 있어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중이었다.

앞으로 촬영을 함께해야 하는데, 굳이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셔 실수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희성이, 너는 미니시리즈 처음이야?”

“네, 바로 전에는 단막극 찍었습니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입술을 모았다.

“오, 그래?”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KTS에서 별을….”

“선배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서빈 앞으로 달려와 앉는 사람.

바로 박민준이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가 굳이 내가 말하고 있는 이 타이밍에 다가왔다.

기분이 언짢았지만 그걸 이 자리에서 이야기해 분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짧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박민준을 바라보았다.

최서빈 역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이야기 중이었어요.”

짧고 간결한 그의 한마디.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미간을 풀며 내게 말했다.

“그래서 단막극 제목이 뭐였다고?”

“아… KTS의 ‘별을 보지 않아’라는 단막극이었어요.”

“그래?”

최서빈은 언제 박민준에게 기분이 나빴었냐는 듯 미소를 품은 얼굴로 답했다.

“여기서 할 것도 없는데, 심심할 때 한번 봐야겠다.”

“하하, 봐주시면 감사하죠.”

그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주고받던 중.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

그 시선 끝에는 박민준이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에게 조소를 날렸다.

나와 눈을 마주친 박민준이 입을 열려던 순간.

“뭐 할 말이 있어서 온 건가요?”

최서빈이 박민준을 향해 물었다.

박민준은 허리를 곧게 세우며 답했다.

“아, 선배님과 함께 술 마시고 싶어서 왔습니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박민준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듯한 공손한 말투.

최서빈에게 잘 보이고 싶은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앉은 거 같은데요?”

최서빈의 차가운 말투에 박민준이 살가운 표정으로 술을 건넸다.

“술 한 잔 드리겠습니다.”

최서빈은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받았고.

박민준이 재차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 WG 엔터 같은 식구인데, 저한테도 말씀 편하게 하셔도….”

술을 받은 최서빈은 박민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잔을 내려놓았다.

“글쎄요?”

“네?”

박민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최서빈을 바라보았다.

“제가 말을 쉽게 안 놓는 성격이라서요.”

최서빈은 그대로 술을 들이켰고.

거절당한 박민준은 그 얼굴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동시에 나와 눈이 마주친 박민준에게 나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

쌓여가는 술병들.

취해가는 사람들.

그리고 또다시 내리는 빗줄기.

술을 마시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던 그때.

팟-!

번개가 치지 않았는데, 머릿속이 번쩍하며 한 장면이 잔상처럼 앞에 그려졌다.

그날 꿨던 꿈, 그 장소.

내가 갔던 단골 술집에서 무희와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

그녀와 내 앞에 놓인 잔에 술이 찰랑이고.

테이블 위의 촛불 조명이 어슴푸레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촉촉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

그 장면이 순식간에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지금까지 마시던 술이 모두 깨는 느낌.

곰곰이 생각해도 대본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었다.

조연인 내가 송유나와 술잔을 부딪치는 일이 드라마에 나올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생생히 떠오르는 무희와 마주 앉은 장면.

그리고 나를 바라보고 생긋 웃는 송유나의 얼굴.

이전의 꿈들과 달리 작은 것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보이는 느낌.

대체 뭐지?

이렇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점점 더 잦아지는 느낌….

“어어?”

그때 걸어오던 송유나가 휘청이며 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렇게 술을 연달아 원샷하더니,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모양이다.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눈썹을 움찔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내 손을 뿌리쳤다.

“뭐야, 함부로 잡지 마요!”

“아니, 유나 씨. 넘어질 뻔했어요.”

“흥, 아닌데?”

나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성격이 이상하기 짝이 없다.

송유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도도한 얼굴로 자기 자리로 걸어가며 외쳤다.

“자자, 다들 술 마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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