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8 – 연기로 찍어 누른다면 (1)
덜컹덜컹….
차는 힘겹게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야, 진짜 산골이기는 한가 봐.”
운전대를 양손으로 꼭 쥐고 있는 김 실장은 운전에 집중하며 답했다.
“그러게. 진짜 가도 가도 끝이 없다.”
그가 굳은 목을 풀며 물었다.
“희성아, 드라마는 끝나가?”
“어, 10분 정도 남은 것 같아.”
내 손에 들린 태블릿 PC.
그 화면에서는 ‘시계공과 무희’ 3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형도 같이 봤어야 했는데….”
“괜찮아. 나는 도착해서 다시 보기로 보려고.”
지난주 1화의 시청률은 10.3%로 스타트를 끊었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요즘 TV 시청률 자체가 워낙 낮은 편이다 보니 나름 선방을 한 편.
하지만 시청률이 나온 후, 제작사에서는 만족하지 못한 듯했다.
최서빈과 송유나.
주연들이 특급 배우인 것을 감안하면, 첫 화 시청률이 저조하지 않냐는 것이지.
아쉬워하는 눈치를 보내며 드라마 촬영에서 모두 더 분발해 주기를 바랐다고 들었다.
더군다나 이번 지방 촬영은 중요한 신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배 감독이 특별히 신경 쓰고 있다고 했다.
이럴 때 촬영에서 NG가 난다면, 모든 눈치를 받을 게 분명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나는 드라마를 보며 의지를 다잡았다.
태블릿 PC를 앞 의자 거치대에 걸어 눈을 고정했고.
한 손에는 휴대 전화를 열어 시청자 실시간 게시판을 열었다.
방송을 통해 시청자가 느끼는 나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가.
피드백을 받고 느끼기 위함이지.
게시판은 글씨 대신 새하얀 화면으로 가득 찼고.
나는 찰나를 놓치기 아쉬워 새로 고침을 클릭했다.
“어… 왜 안 되지?”
연달아 화면을 누르던 그때.
드라마가 나오던 태블릿 PC의 화면 가운데 동그란 로딩 버튼이 돌아갔다.
그러더니 이내 꺼져버린 드라마.
‘인터넷에 연결할 수 없음.’
드라마가 거의 끝나가는 중이었기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그리고 다급하게 김 실장에게 외쳤다.
“나 데이터 다 써버렸나 봐. 별로 안 쓴 거 같은데….”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형 휴대 전화로 핫스팟 켜도 돼?”
김 실장은 룸미러로 나와 눈을 맞추며 답했다.
“희성아, 데이터 없는 거 아니고, 여기 산이라 안 터지나 봐.”
“뭐?”
그의 말에 다급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선도 없는 도로.
비포장길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초록색이 가득한 나무와 산뿐이었다.
핸들을 잘못 꺾기라도 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듯한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
산 아래에 멀리 보이는 주황색, 파란색의 집들.
근처에는 아무 집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오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계속해서 차는 오르고 있었고.
김 실장에게 물었다.
“형, 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야?”
그는 내비게이션을 힐끗 쳐다보며 답했다.
“이제 다 왔어.”
낯선 산길 운전에 긴장한 듯 김 실장은 허리를 세우고 얼어붙은 채 핸들을 쥐고 있었다.
차는 몇 번의 큰 덜컹거림을 끝으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내비게이션의 도착 안내 음성과 동시에 우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높은 곳에 자리한 산장.
이런 곳에 어떻게 이 큰 산장을 지었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주변에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편의점은 말도 되지 않았고.
작은 동네 슈퍼도 차를 타고 삼십 분은 나가야 하는 이곳.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지금껏 맡아보지 못한 상쾌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이야, 장난 아니다.”
곧장 차에서 내린 김 실장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와, 형. 공기 무슨 일이야?”
그는 내 말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캬아, 서울에서는 맡아볼 수도 없는 진짜 자연의 공기다.”
“그러니까. 진짜 산골이긴 하다.”
우리는 사면이 전부 푸르른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제자리에서 빙글 돌며 주변을 바라보니 자연스레 감탄이 터져 나왔다.
“진짜 멋있다.”
그리고 저 끝에 보이는 차량 한 대.
스태프의 차가 아닌 배우의 차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형, 저기 밴 한 대 주차되어 있는데?”
김 실장은 눈에 힘을 주고 차를 바라보았다.
“누가 먼저 왔으려나?”
그는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 차 번호판을 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송유나네 차야.”
“뭐, 송유나?”
나도 모르게 그에게 되물었다.
송유나가 평소에 지각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런 산골에 가장 먼저 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굳이 일찍 도착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줄은 예상도 못 했다.
놀란 얼굴로 묻자, 김 실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송유나가 시골을 그렇게 좋아한대.”
“헐.”
“생긴 거랑은 다르게 완전 시골 사랑이 진하다더라.”
그의 말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작품 쉴 때, 휴가로 해외여행 갈 것 같잖아?”
“왜, 아니래?”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아예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열 번 중에 한두 번은 해외여행. 그리고 나머지는 강원도나 어디 산골 오지로 가서 휴양한다더라.”
“신기하네.”
송유나는 흙, 산, 나무 등등 자연과는 멀다고 생각했다.
굳이 따지자면 도시를 더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었지.
의외였다.
그녀의 취향이 내 예상과 전혀 상반되는 곳이었기에.
반전이라고 생각했다.
잠깐 송유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김 실장이 트렁크 문을 열며 말했다.
“우리는 얼른 짐부터 풀자.”
“그래.”
“오후부터 촬영 있으니까, 지금 들어가서 한두 시간 정도 눈 좀 붙여둬. 컨디션 조절해야 해.”
그의 옆으로 다가가 양손 가득 짐을 들었다.
“알겠어. 들어가자.”
***
“컷, 오케이!”
지방에서의 첫 신이 깔끔하게 오케이를 받았다.
이번 촬영에 다들 힘을 주고 있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NG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으니까.
도착 후 잠깐 눈을 붙인 다음 일어나 연기 연습을 마친 덕에, 한 번의 NG도 없이 마무리를 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나자 함께 촬영한 배우들이 배 감독과 스태프들, 그리고 나에게 인사를 했다.
먼 길을 왔기에 쉬러 들어가려는 모양.
더군다나 날씨가 흐려지고 있었기에 서둘러 산장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다음 신을 보기 위해 자리에 남았다.
그때 김 실장이 내게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희성아, 오늘 촬영 끝났는데, 들어가서 좀 쉴까?”
“형 먼저 쉬고 있을래?”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남은 촬영 좀 보면서 배우고 싶어서. 내 촬영은 끝났으니까 형 먼저 들어가도 돼.”
“하여간.”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나 잠깐 회사랑 통화 좀 하고 올게. 보고 있어.”
“응.”
김 실장이 자리를 떠난 후, 나는 다음 촬영을 보기 위해 한쪽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레디, 액션!”
이내 시작된 촬영.
팔짱을 끼고 미간에 힘을 준 채 조용히 촬영에 집중했다.
“좀 볼만해요?”
그때 최서빈이 내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앗, 선배님.”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고.
그는 검지와 중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눈빛을 보냈다.
담배를 피우러 가자는 신호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작게 속삭였다.
“담배 태워요?”
하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아쉽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근데 라이터는 있습니다.”
내 말에 최서빈이 피식 웃음을 보이며 발길을 옮겼다.
그를 따라 한쪽에 마련된 흡연 구역에 도착했다.
최서빈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고, 나는 재빨리 라이터 불을 그에게 가져다 댔다.
“괜찮아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는 내 손에서 라이터를 빼냈다.
담배에 불을 붙인 그는 이내 하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 내게 다시 라이터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근데 라이터는 왜 가지고 다니는 거예요?”
“아, 일제 강점기 배경이니까요.”
“다들 담배를 많이 피우니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근데 희성 씨 배역은 비흡연자 아니었나?”
“예, 맞는데 시계 장인과 그 주변 선배들이 전부 담배를 피우니까, 실제로도 가지고 다니는 역할이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가 담배를 입에 물며 답했다.
“배역에 몰입한 건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몰입했다기보다… 그 배역을 100%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서빈은 내 말에 아무런 대답 없이 허공을 한참 바라보았다.
“내가 그 배역이었다면 뭘 했을까….”
그는 혼잣말로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 말이 맞네요.”
“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최서빈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감독님이 그러더라고, 희성 씨한테서 떡잎이 보인다고.”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
“나는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물론 노력에도 성과가 있어야 하겠지만.”
최서빈은 담배를 꺼트리며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촬영장에서 자주 보면 좋겠네.”
그의 말에 심장이 두근댔다.
배우 선배가, 그것도 톱스타인 최서빈이 내게 직접 저런 말을 했다.
이 말은 비단 이번 촬영뿐만 아니라, 다른 촬영까지도 포함하는 말일 터.
엄청난 극찬이다.
그를 향해 허리를 접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하, 이제 돌아가죠. 촬영 봐야지.”
“넵!”
최서빈과 나는 나란히 촬영장으로 다시 걸어갔다.
***
다음 날 오후.
오늘은 내 촬영분이 없는 날이다.
사실 내 분량은 어제 오후에 끝났기에, 서울로 돌아갔다가 하루 쉬고 내일 다시 복귀해도 되긴 하겠지만.
한 번 서울로 나가면 다시 오기엔 너무나도 멀기에 그대로 촬영 현장에 남아 있기로 했다.
내 촬영이 없는 것이지, 다른 배우들의 촬영 스케줄은 있으니 구경도 할 수 있고.
메이크업도 하지 않고 모자만 푹 눌러쓴 채 현장으로 나섰다.
이런 날은 누워서 쉬기보다는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공부하는 게 도움이 될 테니까.
오늘 촬영이 많지 않은 날이라, 오전 촬영이 여유롭게 마무리되었다.
자리를 이동하지 않고 여전히 현장에 있었고.
갑자기 머리 위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비.
‘어… 비 오는 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볼에 떨어지는 빗방울.
톡.
이내 빗방울이 굵어졌고, 현장은 곧장 정리에 돌입했다.
배우와 스태프, 감독을 비롯해 카메라와 장비들이 서둘러 비를 피했고.
나 역시 재촉하며 숙소 안으로 대피를 마쳤다.
“밖에 비 많이 와?”
숙소 안에 있던 김 실장이 내게 물었다.
“어, 갑자기 왕창 쏟아지더라고.”
“이거 쉽게 안 그칠 비 같은데?”
“그러게.”
추적추적 빗소리를 들으며 몇십 분이 흐를 때쯤.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스태프가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희성 님.”
“예, 무슨 일 있으세요?”
“비가 내일 오전까지 와서 촬영은 오후부터 시작된다고 말씀드리려고요.”
김 실장은 스태프의 뒤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춰서 준비하겠습니다.”
스태프는 방 안에 있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회식할 건데, 당기면 이따가 오세요.”
나는 그의 말에 힘찬 목소리로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