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28)화 (28/303)

28화 #7 – 방해가 된다면 (5)

“옆에서 멀뚱거리지 말고, 네가 말해봐. 뒤에서 뭐라고 했냐고!”

최서빈은 박민준이 아닌, 진희성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의 갑작스러운 애드리브.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던 배 감독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는 대본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거 대본에 있는 게 아니잖아?’

배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가폰을 쥐었다.

곧이어 NG를 외치려고 입을 벌리려는 순간.

“그쪽이 무희와 무슨 상관이라도 있소?”

진희성은 자신의 대사가 아님에도, 전혀 놀란 기색 하나 없었다.

마치 자신이 원래 내뱉으려던 대사인 듯 미간을 찌푸려낸 표정까지 완벽했다.

그의 날카로운 대사에 배 감독은 눈을 찡긋거렸다.

‘괜찮은데?’

배 감독은 들었던 메가폰을 조심스레 다리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모니터 화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희성의 대사에 당황한 사람은 박민준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최서빈을 바라보았다.

노려보는 것이 아닌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을 봐달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나, 최서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최서빈은 박민준의 시선을 온전히 느끼고 있지만 굳이 대꾸할 생각은 없었다.

아예 몸을 돌려버린 그는 진희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무희와 상관이 있는 자라면, 어찌할 것이오.”

최서빈의 눈에서는 레이저가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무희, 송유나를 떠올리는 그의 얼굴.

그리고 다른 이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외치는 강단 있는 목소리.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진희성이 답했다.

“그렇게 못 하겠다면…?”

그의 말에 최서빈과의 팽팽한 기 싸움이 펼쳐졌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타오를 듯 뜨거웠고.

어느새 카메라는 최서빈과 진희성의 투 샷을 비추고 있었다.

“컷!”

배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메가폰을 잡고 외쳤다.

“오케이!”

그는 흡족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현장을 향해 곧장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서빈 씨, 희성 씨.”

배 감독의 부름에 두 사람은 물론이고 박민준까지 그를 바라보았다.

“예, 감독님.”

“이야….”

배 감독은 감탄스럽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쩜 그렇게 둘이 대사가 딱딱 맞아?”

다가오던 조감독 역시 배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배 감독은 최서빈과 진희성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둘이 미리 준비한 거야?”

그의 말에 최서빈이 입을 열었다.

“아니요. 문득 떠올라서 대사를 쳤는데, 저 친구가 잘 받았네요.”

최서빈의 말에 온 시선이 진희성에게 향했다.

“그래?”

배 감독은 놀랍다는 듯 진희성을 향해 물었다.

“희성 씨는 어떻게 알고 다음 대사를 친 거야?”

“제가 배역에 몰입된 상태에서 저 말을 들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말했습니다.”

조심스런 진희성의 말에 배 감독은 입꼬리를 올렸다.

“서빈 씨가 던지고, 희성 씨가 아주 잘 받아쳤네.”

쑥스럽다는 듯 진희성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배 감독은 진희성에게 눈빛을 한번 보내고는 손뼉을 부딪쳤다.

“자, 오늘은 이쯤 하고 철수하자고!”

그리고 뒤를 돌아 스태프들에게 걸어갔다.

스태프들은 배 감독의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서빈은 진희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기, 잘하네요.”

그의 말에 진희성은 머리를 숙였다.

“아… 선배님, 감사합니다.”

최서빈은 그런 진희성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늘 고생했어요.”

탁.

그는 진희성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는 현장 밖으로 걸어갔다.

“고생하셨습니다!”

최서빈을 향해 외치는 진희성.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박민준은 이를 어찌나 꽉 깨물었는지, 볼이 부들거리고 있었다.

진희성은 그런 박민준을 흘겨보고는 매니저에게 손을 뻗으며 다가갔다.

“하아….”

홀로 남은 박민준은 애꿎은 바닥의 흙을 발로 걷어찼다.

***

“민준아, 안전벨트 맸어?”

매니저는 뒤를 돌아 박민준을 보며 물었다.

그러나 박민준은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 없는 그를 대신해 매니저는 안전벨트를 눈으로 확인했다.

“했으면, 바로 출발할게.”

매니저가 액셀을 밟아 차가 출발하자 박민준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차는 금세 촬영장 세트를 빠져나왔고, 고속도로에 올라타자 박민준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형.”

그의 부름에 매니저는 룸미러를 통해 박민준을 바라보았다.

“왜, 필요한 거 있어?”

“아니.”

박민준은 기댔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최서빈 말이야.”

“서빈 씨는 왜?”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서빈이 그 새끼한테 대사 챙겨주는 거 봤어?”

“그 새끼라니?”

매니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희성, 그 새끼.”

“서빈 씨가 진희성을 챙겨줬어?”

매니저의 말에 박민준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완전. 진희성한테 대사를 챙겨줬어.”

“에이, 대사를 어떻게 챙겨줘.”

그의 말에 매니저는 못 믿겠다는 듯 답했다.

“그냥 애드리브 친 건데, 운이 좋았던 거겠지.”

“아니라니까?”

박민준은 열변을 토하듯 외쳤다.

“내 대사 못 치게, 그 자식한테 대사를 던졌다니까?”

그의 얼굴을 빨갛게 달아올랐고, 소리치듯 말을 이어갔다.

“아예 나를 외면해 버리고!”

박민준의 말에도 매니저는 평정심을 유지한 채 답했다.

“민준이 네 기분 탓 아니야?”

“아니야. 형이 현장에 없어서 그래.”

현장에서 매일 최서빈을 보았던 매니저는 박민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박민준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강하게 외쳤다.

“아니라니까. 그러게 형은 왜 하필 그때 현장에 없었어!”

매니저는 손으로 전화기를 쥔 제스처를 취했다.

“아까 회사에서 팀장님 전화 받느라 그랬지.”

박민준은 매니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박민준은 거친 심호흡을 하며 몸까지 들썩거렸다.

이내 다시 매니저를 향하는 눈빛.

“형, 솔직히 말해서 최서빈, 우리 소속사 선배잖아. 너무한 거 아니야?”

박민준은 매니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차 입을 열었다.

“회사 차원에서 아래에 있는 나를 좀 끌어줘야 하는 거잖아.”

매니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팀장님한테 말 좀 해줘. 그러면 윗선으로 올라가서 이야기 들어가겠지.”

어느새 박민준의 몸은 운전석에 앉은 매니저의 옆까지 다가가 있었다.

그는 박민준의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팀장님이 아니라 서빈 씨는 우리 본부장도 못 건드려. 알잖아.”

박민준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대표님한테라도 형이 어떻게 하면 안 돼?”

“서빈 씨랑 대표님은 형, 동생 하는 사이잖아.”

“하아.”

그의 말에 박민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매니저는 미간에 주름이 지어진 채로 입을 열었다.

“애초에 대표님도 서빈 씨한테 아부 떠는데….”

박민준은 매니저의 말에 몸을 제자리로 옮겼다.

그러자 매니저가 룸미러로 그를 확인한 뒤에 다시 말했다.

“이 바닥은 잘나가는 연예인이 압도적 갑이야. 윗선이라 해도 아무것도 못 해.”

그의 말에 박민준은 대답 없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민준아, 잘못하다간 본부장님한테 우리 둘 다 깨져.”

자신의 말을 못 들은 체하는 박민준.

결국 매니저는 고개를 돌려 운전에 집중했다.

이내 박민준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화를 삭였다.

***

“고생하셨습니다!”

“오늘도 고생했어, 희성 씨.”

“아닙니다. 감독님께서 힘드셨죠.”

배 감독과 스태프들을 향해 인사하자, 배 감독이 흐뭇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다음 촬영 때 봅시다.”

“네!”

그를 향해 허리를 접어보였다.

“희성아, 가자.”

그때, 김 실장이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

그를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가 차에 올라탔다.

“오늘 고생했어.”

김 실장은 할 말이 있다는 듯 출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뒤를 돌아 나를 보며 물었다.

“희성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마지막에 찍었던 신 있잖아.”

마지막 신이라면, 최서빈과 박민준까지 셋이서 찍었던 걸 묻는 것일 터.

“응.”

“그거 애드리브, 진짜 안 짠 거야?”

그는 진지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정말 궁금했던 모양이다.

“당연하지.”

김 실장은 입을 벌리고 감탄을 자아냈다.

“와아….”

그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어떻게 알고 딱 치고 들어간 거야?”

김 실장의 말에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미리 말한 건 아닌데, 나한테 대사를 토스해주는 느낌이었어.”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형도 보고 있었지?”

“그럼, 네 신은 빠지지 않고 모두 보고 있지.”

그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말했다.

“근데 나는 최서빈이 대사하는 거 봐도, 희성이 너한테 토스를 해주는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거든.”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현장에 딱 들어가 카메라 앞에 서서 그런지, 느껴지더라고.”

“오, 그래?”

“네가 한번 해봐라, 하는 느낌.”

김 실장은 뿌듯한 미소를 보냈다.

“잘됐네.”

“감사하다고 말하기도 조금 애매한 것 같아서, 따로 인사는 안 했어.”

그는 미간을 찡긋거리며 답했다.

“그래, 굳이 그런 인사하면 더 부담스러워할 거야.”

그러더니 김 실장은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차라리 다음 주에 싹싹하게 챙겨.”

“다음 주?”

“응, 지방 촬영이잖아.”

“맞네.”

그는 스케줄표를 확인했다.

“한 일주일 정도 있을 거야. 산장에서만 있을 거거든?”

나는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 정도 기간이면 100% 회식이야.”

“그래?”

“술 마시고 이것저것 할 텐데. 송유나는 몰라도 최서빈은 회식 잘 안 빼거든.”

김 실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때 최서빈을 싹싹하게 잘 챙겨, 그러면 돼.”

아무도 없는 차 안이었지만, 김 실장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리고 최서빈은 이런 거에 엄청 예민하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 실장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술자리에서 싹싹하고 잘 챙기면서, 정신 똑바로 부여잡고 있으면 돼.”

“예의 바른 사람은 다들 좋아하니까.”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술 마시고 실수하고 그러면, 그 뒤로 완전 사람 취급도 안 한다더라.”

“술버릇 심한 사람을 싫어하나 보네.”

“응, 실수는 안 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해.”

나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겠다.”

최서빈이 평소에도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더니.

모든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예의 바르지 않고 술자리에서 진상 짓을 부리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근데 형, 우리 지방 촬영 어디로 가?”

“전라남도 해남, 하월산.”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들어보는데?”

“완전 두메산골이래.”

그는 피식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전화는 되는데, 데이터는 안 터진다더라.”

“와… 장난 아니겠는데?”

“대신 그런 데 한번 가면 배우들이랑 금방 친해질 거야.”

“할 게 없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다.”

나는 그곳을 상상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여러 배우들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

설레는 마음으로 미소를 유지한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방 촬영, 꽤 기대되는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