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27)화 (27/303)

27화 #7 – 방해가 된다면 (4)

시계공과 무희, 드라마 첫 화가 방영되는 날.

오늘 역시 함께 모니터링을 하기 위해 김 실장이 집으로 찾아왔다.

지난번 단막극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짧은 한 시간짜리가 아닌, 16부작이었기에.

음식도 없이 경건한 마음으로 김 실장과 함께 TV 앞에 자리를 잡았다.

1화에서의 내 연기를 보고, 빠르게 피드백을 해 다음 신을 촬영해야 하니까.

“형, 광고 끝나간다.”

바로 옆에 앉은 김 실장이지만, 긴장되는 마음에 그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나도 알지. 뒤에 광고 한 개만 더 나오면 시작이야.”

분명 시작하자마자 내가 나오는 장면이 아닌 것을 알지만.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김 실장이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말했다.

“우리 진희성 배우님의 첫 미니시리즈, 진짜 시작한다!”

곧 시작하자 김 실장과 함께 처음 보는 스토리인 것처럼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극 중 배우들에게 몰입해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며, 온전히 드라마를 즐겼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나온 내 연기하는 장면.

-김대한,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시계공은 극 중의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저는 여기에 있으라고 하신 줄 알고….

TV에 나오는 내 표정은 잔뜩 시무룩해져 눈꼬리를 //사정없이(느릿하게)// 아래로 내렸다.

동시에 그걸 바라보는 내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 실장은 내 첫 신을 보며 만족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몇 번의 대사를 주고받은 뒤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자, 그제야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크으, 첫 신 너무 잘 나왔는데?”

“다행이다.”

우리는 곧바로 휴대 전화를 열어 ‘시계공과 무희’를 검색했다.

실시간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드라마가 모두 끝나고 난 뒤에 확인을 하면, 조연인 내 역할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실시간으로 방금 내가 나왔던 장면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시계공 핵 어리바리하네ㅋㅋ

-그럼, 저 시절에도 사장이 시키면 하라는 대로 해야지.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일하기 싫은 저 시계공 표정ㅋㅋ

-순딩해 보이는 연기 왜 이렇게 잘함?ㅋㅋ

실시간 반응을 보며 김 실장과 웃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재차 내 장면이 나왔다.

송유나와 함께 호흡을 맞췄던 그 장면.

송유나를 바라보며 넋을 놓은 연기 장면이 TV에 나오자, 실시간 반응이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까 어리버리 시계공 아님? 송유나한테 빠졌네.

-하긴ㅋㅋ 저기서 갑자기 송유나 얼굴 보고 안 반하는 게 이상하지.

-송유나 왜 저 시대에도 예쁘냐?

-저 남자애 반응 찐이다, 찐이야ㅋㅋㅋㅋㅋ

-아니, 생각해봐. 하루 내내 사장한테 깨지다가 송유나 얼굴 보면 나라도 힐링되겠다ㅋㅋ

-송유나 왜 저렇게 예쁨?

첫 화에서 내가 나오는 분량이 적기는 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시작치곤 꽤 괜찮았다.

게다가 인터넷에 올라오는 실시간 반응들도 나쁘지 않았다.

…나 연기 잘한 것 같은데?

다음 화 예고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휘었다.

***

“컷, 오케이!”

배 감독의 사인과 함께 카메라의 불빛이 꺼졌다.

“다음 신은 30분만 쉬었다가 갈게요.”

“네.”

배 감독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이동했고.

송유나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기 위해 현장으로 걸어왔다.

저 멀리 보이는 진희성과 박민준의 모습.

그녀는 연기가 끝났음에도 대화를 주고받는 그들을 살펴보았다.

마치 연기를 하는 듯 계속되는 대화에 송유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희성아, 거기서 연기를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냐.”

“어?”

“무슨 일이야?”

그때 조감독이 그들에게 다가갔고, 박민준은 조감독에게 답했다.

“조감독님, 희성이가 아직 촬영을 많이 안 해봐서 그런가 봐요.”

“왜, 뭐가 잘 안 돼?”

“희성이가 구도를 잘 모르더라고요. 다음 찍을 신에서 제가 이쪽에 와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조감독은 눈썹을 들썩이며 박민준의 이야기를 들었다.

“딱히 중요한 건 아니지만, 민준 씨 생각이 그러면 그렇게 해도 돼.”

“네, 희성이가 잘 모르니까, 제가 좀 알려 주려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희성을 바라보았다.

“맞네. 둘이 친구라고 했지?”

진희성이 조감독의 말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예, 맞습니다.”

박민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희성에게 말했다.

“희성아, 친구니까 알려주는 거야. 이런 신에서는 네가 알아서 옮겨야지.”

조감독은 박민준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자리를 떠났고.

진희성은 무념무상의 표정으로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스태프가 보고 있기에 대꾸하지 않은 채 들어주는 얼굴.

어쨌든, 박민준이 진희성보다 경력이 많기에 적당히 들어주는 척하는 모습이었다.

“유나야.”

최 실장이 담요를 가지고 그녀에게 다가갔고.

송유나는 뒤를 돌아 최 실장에게 손짓했다.

“아니야. 잠깐 차로 가자.”

“왜 무슨 일 있어?”

최 실장은 송유나의 표정을 보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아니, 무슨 일은 아니고.”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최 실장에게 물었다.

“오빠. 근데 쟤는 뭔데 당하고만 있어?”

“누가?”

최 실장은 뒤를 돌아 박민준과 진희성을 바라보았다.

“아… 쟤네 친구라고 하던데?”

그녀는 최 실장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저게 친구야?”

여전히 박민준은 진희성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고 있었고.

그걸 본 최 실장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희성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송유나는 경멸하듯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나는 저런 애들이 제일 싫어. 한마디도 못 하고 듣고만 있는 거.”

“현장이잖아. 친구니까 민망할까 봐 들어주고 있는 거 아닐까?”

“모르지. 밤톨이같이 생긴 놈…. 원래 싫었는데 더 싫어졌어.”

송유나는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담요를 한 손으로 쓸 듯이 빼냈다.

“오빠는 저런 애를 대체 왜 데려온 거야?”

그는 송유나가 던지듯 밀어내는 담요를 받으며 멋쩍게 웃었다.

“차에 히터 켜놨어. 들어가자.”

“근데 오빠, 곧 지방으로 촬영 간다며?”

최 실장은 대화 주제가 바뀌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 한 일주일 정도 갈 거야.”

“일주일?”

송유나는 눈동자를 위로 치켜세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무슨 산속이라 호텔도 못 간다며.”

최 실장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답했다.

“걱정 마. 내가 말해서 너는 독실로 받아뒀어.”

그의 말이 무색하게 송유나는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독실이 문제야? 산골짜기가 싫은데….”

팔짱을 끼고 차에 올라타는 그녀에게 최 실장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럼 좀 바꾸자고 해볼까?”

“뭘 바꿔. 배우가 대본에 맞춰야지, 내 마음대로 하면 어떻게 해?”

비록 짜증은 내더라도 송유나는 직업에 대한 프로 정신이 투철했다.

최 실장이 재차 입을 열기 전, 그녀가 먼저 말했다.

“오빠, 거기에 필요한 거나 좀 잘 챙겨놔.”

“…그래.”

“나 쓰는 헤어트리트먼트랑 에센스, 그리고 아로마 오일 세럼. 전부 다 빼먹으면 안 돼.”

“당연하지. 따로 챙겨뒀어.”

그녀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매일 고데기 해서 지금 상태 장난 아니야. 머릿결 상한 거 좀 봐.”

그녀는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곧장 대본을 펼쳤다.

“오빠, 배 감독님이 조금 쉬었다 가신다고 했으니까, 나 대본 좀 볼게.”

“그래, 난 그럼 앞에 있을게.”

***

“아니, 누가 춤을 그런 식으로 추라고 했어!”

송유나의 짜증 내는 표정은 연기인지, 실제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완벽했다.

“다시 해볼게요.”

고아현은 송유나의 말에 잔뜩 풀이 죽은 채 말했다.

“아름이, 너는 다시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닌데?”

나는 송유나의 연기를 보며 감탄을 자아냈다.

짜증 내는 연기는 송유나를 따라올 자가 없을 듯했다.

아마 저런 건 타고나야겠지?

“오케이!”

배 감독이 사인을 주자, 송유나는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유나 씨 방금 연기 너무 좋았어.”

그녀는 배 감독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곧장 최 실장을 따라 자신의 차로 향했다.

나는 차에 올라타는 송유나를 보고.

옆에 서 있는 김 실장에게 물었다.

“형, 그나저나 송유나는 원래 촬영장에서도 차에서 잘 안 나와?”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본인 배역일 때 외에는 항상 차에 있더라고.”

“특이하네. 답답하지도 않나.”

김 실장이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톱스타니까 인사할 때랑 연기할 때만 나오는 게 가능한 거지.”

이에 나는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최서빈이랑은 너무 다르네.”

최서빈은 그렇게 유명한 톱스타임에도 항상 밖에 나와 있었다.

오히려 차에 타 있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없는 듯했다.

심지어 자신의 차례가 아니어도 늘 누군가의 연기를 보고 있었으니까.

최서빈과 송유나의 스타일은 진짜 정반대였다.

유일한 공통점은 둘 다 연기를 너무나도 잘한다는 것.

연기를 잘하는 건 그저 재능인가?

아니지, 이 바닥은 재능만으로 성공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재능과 노력.

이 두 가지가 완벽하게 이뤄져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

하긴….

송유나도 뒤에서 얼마나 노력하겠는가.

곧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대본을 펼쳐들었다.

그들과 같은 선상에 오르려면 지금보다 두 배, 세 배로 더 노력해야 하니까.

***

심호흡을 하며 현장으로 걸어갔다.

내가 기대하던 신.

더불어 긴장감이 가득한 신.

바로 최서빈과 함께 연기를 하는 장면이다.

최서빈과 호흡을 주고받는 장면이 처음은 아니지만.

항상 그와 연기를 주고받으러 가는 길에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배우고 싶은 점이 많은 배우라 그런가.

그리고 이번 장면에는 박민준도 함께 등장한다.

셋이 호흡을 맞추는 건 처음이었다.

박민준과 함께 연기를 하는 거라, 절대 NG를 내지 않기 위해 대사를 다시 복기했다.

늘 어떤 장면에서도 NG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특히나 박민준 앞에서는 더더욱 싫었다.

“자, 바로 갈게요. 레디, 액션!”

배 감독의 슛 사인이 떨어진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순식간에 몰입했다.

최서빈 역시 눈빛이 돌변했고, 나와 박민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이!”

그의 입꼬리는 잔뜩 휘어져 있었고.

나는 그의 표정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

나와 박민준은 손목을 풀며 그에게 다가갔다.

“지금 우리한테 하는 소리냐?”

금방이라도 주먹이 나갈 것처럼 차가운 공기.

최서빈이 싸늘한 표정으로 박민준에게 말했다.

“거기, 너. 아까 뒤에서 뭐라고 한 거냐?”

그의 말에 박민준은 눈을 파르르 떨며 천천히 감았다.

잔뜩 열이 받은 얼굴.

박민준이 입을 열기 전, 화를 삭이기 위해 한숨을 내쉬던 그때.

최서빈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장 내게 소리쳤다.

“옆에서 멀뚱거리지 말고, 네가 말해봐. 뒤에서 뭐라고 했냐고!”

최서빈의 애드리브였다.

분명 슛이 들어가기 전에 상의가 되지 않은 애드리브.

최서빈이 박민준에게 묻고, 그가 대답을 하며 장면이 끝나야 한다.

그런데 최서빈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잠깐만….

이거 나한테 일부러 대사를 넘긴 것 같은데?

최서빈이 숟가락으로 내게 밥을 떠준 이상, 밥상을 걷어찰 수가 있나!

박민준은 침을 삼키며 흠칫했다.

당황한 녀석을 뒤로하고 난 대사를 뱉기 위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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