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7 – 방해가 된다면 (3)
몇 주 동안이나 쉬지 않고 촬영이 이어졌다.
8화까지 사전 제작이 진행된 뒤에 바로 방영이 시작될 예정이었기에, 최대한 빠르게 제작에 착수했다.
덕분에 집에서 잠자는 것은 사치였다.
물론 촬영 철수를 하는 날은 집에 갈 수 있지만.
서울에서 세트장까지의 거리가 조금 있었기에, 잠은 차에서 쪽잠으로 대체했다.
곧 촬영이 들어간다는 말에 서둘러 차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곧장 스태프 옆으로 다가가 현장을 바라보았다.
사실 내 촬영 신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급하게 나온 이유는, 바로 최서빈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다.
최서빈이라 특별히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지난 몇 주 내내 현장의 모든 분위기와 배우들의 연기를 쭉 보았다.
덕분에 현장을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고.
여러 배우들의 장점을 파악해 배울 수 있었다.
배 감독은 몇 주간 밀지 않은 수염 탓에 덥수룩한 느낌이 가득했다.
모자를 푹 눌러쓴 그는 오늘도 메가폰을 쥐고 외쳤다.
“레디, 액션!”
주연인 최서빈은 많은 분량 탓에 잠을 거의 못 잔 상태일 텐데도.
늘 그렇듯 화사한 피부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고 금세 날카로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진행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
상대 배역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하아, 시간?”
급격히 싸늘해진 그의 얼굴.
순식간에 바뀌는 표정 연기에, 나를 비롯한 옆 스태프들의 미간까지 찌푸려졌다.
“대체 그 시간을 내가 왜 기다려줘야 하는지 모르겠네.”
소리를 지르지 않고도 낮은 톤으로 매섭게 이야기하는 모습.
맞은편에서 연기하는 배우는 떨고 있었다.
실제로 최서빈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눈을 연신 깜빡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서둘러 허리를 접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흘만 시간을 주시면 바로 처리하도록….”
최서빈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말문이 막혔고, 최서빈은 눈을 꽉 감았다.
분노를 참고 있는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곧장 다시 눈을 뜬 최서빈.
옆의 스태프가 들고 있는 대본을 곁눈질로 확인해보니, 대본에서는 최서빈이 눈을 감으며 마무리되는 신이었다.
그런데 ‘컷’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눈을 뜨는 최서빈의 행동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서빈은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상대 배역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틀이요. 그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당신이 모든 걸 책임져야 할 거요.”
간담이 서늘해지는 최서빈의 표정과 말투.
다시 한번 대본을 살펴보았지만, 확실히 없는 대사와 지문이었다.
곧장 울려 퍼지는 배 감독의 목소리.
“컷, 오케이!”
배 감독의 흡족한 표정.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빈 씨, 마지막 애드리브, 너무 좋았어.”
차갑던 표정을 순식간에 풀어낸 최서빈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았습니까, 감독님?”
“그럼. 딱 잘 맞았어, 너무 좋아.”
“하하, 감사합니다.”
몇 주 전 대본 리딩 당시, 박민준의 애드리브에 배 감독이 차갑게 돌아선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배 감독은 애드리브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서빈은 감정선이 극대화되거나, 작가가 너무나 중요하다고 하는 신 이외에는 대부분 애드리브를 첨가했다.
물론 슛이 들어가기 전에 사전에 협의하는 애드리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배 감독과 코드가 맞았는지, 그의 애드리브들은 항상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그래서 배 감독은 그런 최서빈을 더욱더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애드리브를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애드리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뭔가 딱 절제된, 대본에 가장 충실한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대본 리딩에 호되게 혼났던 박민준 역시, 그 뒤로 애드리브는 일절 없었다.
곧바로 다음 신이 시작됐고, 나는 계속 자리를 지키며 바라보았다.
배우가 연기를 잘하면 되는 것이지만.
홀로 방 안에서 연기 연습만 하게 되면 실력이 느는 것이 더딜 수밖에 없다.
다른 배우들은 어떤 연기를 하는지, 어떻게 몰입하는지, 연기 스타일과 현장에서의 분위기를 보고 배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이번 현장은 기존 단역 때와는 달리, 배우는 게 굉장히 많았다.
설정 없는 단역 역할을 맡았을 땐 한 신, 한 신을 찍고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현재 맡은 배역의 감정선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른 배역과 관계의 이해, 현장 전체의 흐름과 이곳의 생리 등 공부할 것이 넘쳐났다.
단순히 연기 외에도 배울 점이 너무 많은 현장이 좋았다.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은, 즉 내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나는 곧장 집중해 촬영 현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
하얀 연기가 자욱한 곳.
그 한가운데 놓인 등받이가 위로 길쭉한 의자 두 개.
빨간 벨벳 소재의 천으로 만들어진 의자.
테두리는 눈이 부실 만큼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두 개의 의자 앞에 놓인 커다란 화면.
그 의자에 앉은 두 명.
인간들에게 신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화면에 뜬 영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친구, 이번이 마지막 윤회 아닌가?”
중절모의 남성이 물었다.
“그렇지. 이번 마지막 10년 딱 살고 나면 죽는 거지.”
검은 망토를 두른 남성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1만 년… 인간으로서는 참 애달픈 숫자 아닌가?”
모니터에 나오고 있는 영상의 주인공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애달픈 숫자라….”
그의 말에 옆에 있는 남성이 다리를 꼬며 답했다.
“1만 년이면… 천 번째 생(生)이구만 그래.”
“그런데 천 번째 생을 끝낸다고 해도 무조건 죽는 건 아니지 않나?”
중절모의 남성이 의자에서 등을 떼어 내며 물었고.
바로 옆에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렇지. 근데 죽지도 못하고 평생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그렇지….”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어갔다.
“나도 고작 300년을 살아봤네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웠지.”
“인간 세상에서의 1천 번째 삶.”
그는 망토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저렇게 얼마 살고 나서 전생의 기억을 모두 안은 채로 선택의 순간이 오는 거야.”
“그렇지. 그 모든 기억을 가진 채, 1천 번의 삶을 더 살지. 아니면 승천할지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이니까.”
검은 망토의 남성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결정을 보는 것도 재미난 일이야.”
옆에 있던 중절모의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 고통을 어떻게 또 버티겠나. 전부 승천을 택할 거 같은데 말이야.”
그는 웃음기를 싹 꺼트리며 말했다.
“맞아. 내가 본 인간들, 몇백 년 살아간 놈들도 전부 승천을 택했지.”
“그런데 저 녀석은 무슨 죄를 지었었지?”
***
최서빈은 팔짱을 낀 채 스태프 옆에서 촬영 현장을 바라보았다.
진희성과 박민준의 대립 구도가 잘 느껴지는 장면.
살얼음판 같은 숨 막히는 대사들.
“다시 이런 식으로 하기만 해.”
박민준의 차가운 음성.
날카로운 눈빛으로 진희성을 쏘아보았다.
“컷! 오케이.”
배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바로 풀 샷 갈게요.”
연기는 다시 이어졌고, 최서빈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희성…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닌데 왜 갑자기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는 느낌이지?’
그는 다시 한번 진희성의 연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때 최서빈의 매니저가 그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서빈아,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연기하는 거.”
그의 말에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오늘은 찍은 신도 많은데 좀 쉬지. 이렇게 맨날 다른 배우들 연기 보느라 못 쉬어서 어떻게 해.”
“그래도 볼 건 봐야지.”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지금 누구 촬영 중이야?”
그러곤 고개를 돌려 촬영 중인 곳을 바라보았다.
“아… 저기에 민준이 있어서 보고 있구나?”
“누구?”
“저쪽에 민준이 보고 있는 거 아니었어?”
“저 왼쪽 더벅머리?”
최서빈은 손을 뻗어 박민준을 가리켰다.
“어, 맞아. 쟤가 우리랑 같은 회사야.”
“들었어.”
매니저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알고 있었네?”
최서빈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까 나 연기 끝나니까 와서 인사하더라고.”
그의 말에 매니저는 흡족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인사성은 밝네.”
“와서 직속 후배라고 뭐, 잘 부탁한다 어쩌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그러려니 했지.”
최서빈은 박민준을 쳐다보며 매니저에게 물었다.
“형, 근데 쟤 좀 어때. 괜찮아?”
그는 최서빈의 질문에 허공을 바라보며 답했다.
“뭐, 연기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최서빈은 뭔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데 여기 배 감독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은 아니던데.”
매니저는 몸을 최서빈 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맞아.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꽂은 애잖아.”
그의 말에 순간 최서빈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래?”
“어, 왜 별로야?”
“아니, 비중이 큰 역할이잖아. 주연급 조연인데, 왜 배 감독이 굳이 쟤를 뽑았지, 싶었거든.”
매니저는 최서빈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우리 WG 엔터에서 애초에 이야기를 끝냈더라고.”
“뭐라고?”
“너 주연으로 가니까, 좋은 배역 하나 WG 엔터에 준다고.”
최서빈이 심기가 불편한 듯 턱을 매만졌다.
“서빈이 너를 주연으로 쓰니까, 회사에서도 당연히 그 역할에 WG 엔터 애 하나 넣으면 좋은 거고.”
“…내가 업어온 놈이구나?”
그의 말에 매니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형, 그럼 저 옆에 애는 뭐야?”
“쟤는 HS 엔터.”
“그건 알고 있고. 쟤는 신인인가?”
“맞아. 아무것도 모르는 신인이지.”
그의 말에 최서빈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오디션으로 된 애라는 말이네?”
“그렇지. 그러고 보니, 쟤 너랑 몇 마디 섞어보지 않았어?”
최서빈이 진희성의 이야기에 눈썹을 들썩였다.
“응, 이틀 전에 같이 한 신 찍었잖아.”
“어땠어?”
“분명 대사는 평범했거든?”
최서빈은 그때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이상하게 쟤랑 대사를 칠 때 몰입이 너무 잘 되더라고.”
매니저는 최서빈의 말에 진희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어, 좀 특이했어. 쟤.”
매니저는 쓰읍 소리를 내며 물었다.
“진희성… 한번 알아볼까?”
최서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별거 아니야.”
“그래, 궁금하면 말해. 매니저들끼리는 가까워졌으니까.”
“응.”
“다음 신까지 좀 쉬게 차로 가자.”
매니저가 앞에 있는 밴을 가리키자, 최서빈이 알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뒤를 돌아 차로 걸어가는 그들.
몇 걸음 걷지 않아, 최서빈은 고개를 슬쩍 돌려 진희성이 연기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뭔가 묘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