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7 – 방해가 된다면 (2)
최서빈의 말에 나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인사를 제외하고는 그와의 대화가 처음이었다.
유명한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거나 직접 만나본 적이 몇 번 없기에, 최서빈과의 대화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가 재차 되물었지만, 그는 기억이 나지 않는 듯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번 대본 리딩 때 만났던 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 말에 최서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때 말고 또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설마….
우리 HS 엔터 회사의 테라스에서 마주쳤던 걸 기억하는 걸까?
아주 짧은 찰나에 마주쳤고, 그 순간을 기억하는 건 나뿐일 거라 생각했다.
그 외에는 최서빈을 다른 곳에서 본 적은 없지.
나만 그를 커다란 전광판이나 TV, 영화관에서 보았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에게 물었다.
“HS 엔터 테라스… 말씀하시는 걸까요?”
“아, 맞아요!”
내 말에 최서빈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아! 맞아요. 익숙하길래 어디서 봤나 했네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짧은 찰나에 스쳐 지나간 나를 이렇게 기억해 주다니.
최서빈은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배우이고.
그를 마주쳤을 때의 나는 단역 배우에 불과했다.
물론 지금도 널리 유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낯이 익다고 말해주니, 괜스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서빈의 손을 맞잡았다.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악수를 하며 그와 눈을 맞췄다.
그의 따스한 미소와 선한 눈매.
그리고 내게 속삭이듯 말하는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단순하게 인사 몇 마디만을 나눈 것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톱스타의 분위기가 풍길 수 있지?
이게 바로 스타에게서 나오는 ‘아우라’라는 것인가.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의 모습에 감탄을 자아냈다.
한마디로, 멋있었다.
그의 말과 행동, 태도까지.
저런 여유는 타고난 게 아니라, 유명해지며 생겨난 거겠지?
그를 보며 배우고 싶고, 닮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연기뿐.
최서빈과의 맞잡은 손을 빼내며 나는 의지를 불태웠다.
***
“자, 다음 3신 가겠습니다!”
조감독의 말에 최서빈과 송유나는 곧장 현장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조명이 밝혀졌고, 카메라 감독들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어 배 감독의 메가폰이 켜졌다.
“바로 가볼게요. 레디, 액션!”
카메라의 빨간 불빛이 돌자마자 최서빈의 표정이 돌변했다.
1초도 지나지 않아 몰입하는 모습에 숨을 죽인 채 그의 연기를 바라보았다.
“서희야, 네가 이러는 게 너를 위한 거라고 생각해?”
최서빈이 송유나를 아련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눈빛에서는 슬픔과 동정심이 모두 묻어나오는 듯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해도 할 수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송유나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고.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송유나의 눈에는 이내 눈물이 가득 고였다.
나를 비롯한 옆에 있던 배우들 모두 입을 떡하니 벌렸다.
이 둘의 대사를 이미 대본 리딩 때 들었지만,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현장의 배경, 그 시절의 의상과 화장.
모든 박자가 딱 맞아떨어졌다.
가장 중요한 그들의 연기까지.
숨이 멎을 듯한 고요한 분위기에서 들리는 송유나의 흐느끼는 울음소리.
때맞춰 녹색의 작은 전철이 그 옆을 지나갔다.
전철 특유의 삐거덕대는 소리가 더욱 가슴을 쓰라리게 만들었다.
송유나는 긴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결심한 듯 뒤를 돌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최서빈의 눈빛.
아무 대사 없이 눈으로만 하는 연기.
카메라는 홀린 듯 그의 얼굴을 줌으로 당겼고, 그의 눈에서는 여러 감정이 섞여 보였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아랫입술을 꽉 물고는 송유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서희!”
그의 손에 잡힌 송유나의 팔목.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최서빈이 입술을 움찔거리며 말했다.
“…가지 마.”
단 세 글자의 말이 심금을 울렸다.
나도 모르게 팔에 소름이 돋았다.
역시나 연기를 잘하는 배우다웠다.
대사를 전달하는 딕션부터 표정까지 모든 게 완벽에 가까웠다.
“컷! 오케이.”
배 감독은 만족스럽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손뼉을 부딪치며 말했다.
“너무 좋았어. 바로 바스트 샷 가볼게요. 지금처럼만!”
곧장 카메라가 다시 돌았고, 나는 재차 그들의 연기에 집중했다.
그러다가 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최서빈과 송유나는 소름 돋을 만큼 연기를 잘해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꿈에서 봤던 그 장면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시대를 너무나도 잘 표현했지만, 그들의 연기를 보면서 그 시절로 내가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없다는 것.
연기를 잘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건가?
아니면 그들이 연기를 너무 잘했기에, 다른 생각이 들지 못하는 건가?
묘했다.
시간이 흘러 해가 쨍쨍해졌을 때쯤.
몇 신이 지나 내 차례가 다가왔다.
조감독의 부름을 받기 전까지 한쪽으로 빠져 대사를 복기했다.
완벽하게 숙지했지만, 그럼에도 슛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툭 치면 감정이 쏟아질 정도로 연습하고 또 연습을 해야 한다.
이내 멀리서 소리치는 조감독이 보였다.
“12신 갈게요!”
“네!”
그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외친 뒤, 곧장 현장으로 달려갔다.
상대 배역이 오기 전, 눈을 감고 차분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목을 풀자 송유나가 도착했다.
이번 신은 나 홀로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무희인 송유나가 무대로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송유나는 조감독과 이야기를 한 뒤, 무대 옆으로 걸어갔고.
내가 자리로 걸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촬영이 시작됐다.
“레디, 액션!”
배 감독의 슛 소리에 눈을 떴다.
나를 촬영하는 카메라들.
그리고 카메라에서 매섭게 쏟아지는 빨간 불빛.
숨을 길게 내쉰 후, 자리로 걸어갔다.
아무런 대사 없이 내가 걸어가고 있는 장면을 찍고 있었고.
온종일 일한 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술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었기에,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앞에 보이는 테이블과 낡은 패브릭 소파.
천천히 걸어가는데 묘하게 주위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애초에 배역의 표정 연기와 다를 바가 없었기에 힘든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오른손을 살짝 위로 들었다.
“나… 오늘도 앉던 자리로 가요.”
“그래, 앉아 있어.”
내 말에 지나가던 사장이 나를 툭 치고 지나갔다.
순간….
주변에 보이던 스태프와 카메라가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보았던 그 술집.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전혀 놀라거나 눈이 커지는 듯한 표정 변화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빠른 속도로, 그리고 깊게 몰입을 한 기분.
이곳에서 느껴지는 공기와 흐름에 내 몸이 자연스레 움직였다.
오래된 패브릭 소파에 몸을 기대자, 곧장 무대 위로 오르는 송유나의 모습.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튀어나왔다.
“곱다. 어찌 저리 어여쁜 여인이 눈앞에 나타난 것인가….”
혼잣말하듯 말을 내뱉었지만, 모두 대본에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대사를 생각하고 말하는 게 아니라, 송유나를 보고 자연스레 나온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홀려서 대사가 줄줄 나오는 느낌.
“안녕하세요. 서희예요. 항상 슬픔도 있고, 기쁨도 있는 것이죠. 오늘 모든 것을….”
그녀는 내게 눈길을 한번 흘기고 술집 안의 모두를 훑어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 송유나를 바라보는데, 순간 머리가 아려왔다.
마치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듯한 느낌.
저 무대, 그녀의 얼굴, 목소리까지.
어디선가 분명 보고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꿈속에서 봤던 장면은 아닌데.
뭐지, 데자뷔인가?
데자뷔라고 하기에는 시대가 전혀 맞지 않는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컷, 오케이.”
팟-!
배 감독의 오케이 소리에 나는 홀린 듯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카메라와 수많은 스태프들.
분명 송유나를 바라볼 때 무대 양옆이 흐렸는데, 지금은 스태프들이 가득 차 있는 모습.
뭐지?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몰입했을 때, 그리고 빠져나올 때에도 이질적인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마치 전생 체험을 한 기분이랄까?
내가 역할에 과하게 몰입한 탓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배 감독은 그런 나를 향해 소리쳤다.
“희성 씨, 표정과 목소리, 말투 전부 다 너무 좋았어. 딱 그거야!”
그의 말에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
“오늘 마지막 신입니다. 한 번에 끝내고 다들 들어갑시다!”
“네!”
배 감독이 메가폰을 쥐고 배우들을 향해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연기를 쥐어짜 봅시다. 갈게요.”
그는 메인 카메라 옆 의자에 앉으며 외쳤다.
“레디, 액션!”
배 감독은 메가폰 전원 버튼을 껐다.
어느 때보다 신중한 얼굴.
날카로운 빛으로 모니터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모니터에 비친 사람은 진희성.
그는 대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눈빛과 표정 연기로 배 감독을 끌어들였다.
“오늘도 이곳에 오르는 겁니까?”
촉촉한 눈망울.
송유나를 향한 걱정스런 마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진희성의 연기에 몰입한 스태프가 처진 눈으로 한숨을 삼켜냈다.
송유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항상 이 자리에 있습니다.”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소.”
진희성의 말에 송유나는 감았던 눈을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허나, 이곳에만 머무르기에는 당신의 존재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오. 모든 것이 당신을 온전히 담기에는 비좁으니 말이오.”
등을 기대어 앉아 있던 배 감독은 모니터 쪽으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턱을 어루만졌다.
‘저건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냥 그 시대 사람인 것 같잖아.’
송유나는 표정 없이 몸을 움직여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진희성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를 이대로 둘 수는 없다.”
배 감독은 모니터 옆으로 고개를 내밀고 진희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송유나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고.
가만히 시간이 지체되자, 옆에 있던 조감독이 대본을 빠르게 살폈다.
대본은 모두 끝난 상황이었다.
조감독이 배 감독을 바라보자, 그제야 끝이 났음을 인지한 배 감독이 소리쳤다.
“컷, 오케이!”
재빠르게 배 감독에게 달려가는 조감독.
“감독님, 컷 안 하시길래 다시 찍자고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조감독의 말에 배 감독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
배 감독은 그제야 조감독에게 답했다.
“성우야, 쟤 원래 이 정도 수준이었냐?”
“네?”
“진희성 말이야. 몰입감은 있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조감독은 크게 공감한다는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현장 스타일인가 봐요. 저도 조금 전 연기를 보고 좀 놀랐습니다.”
“그렇지?”
배 감독이 쓰읍,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나도 방금 끝나는 타이밍을 놓치고 연기만 봤다니까?”
그는 진희성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휘었다.
“오디션에서 쟤 진짜 잘 뽑은 거 같은데?”
조감독은 배 감독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배 감독이 눈을 찡그리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쟤는 확실히 떡잎이 남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