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7 – 방해가 된다면 (1)
첫 등장부터 늘 웃고 있던 배 감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오늘 대본 리딩 시작 후 처음 드러난 굳은 표정이었다.
차가운 공기를 깨트리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분위기를 반전시켜 칭찬을 받고 싶었던 걸까?
박민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대본에 잔뜩 메모해둔 부분을 펼쳐보였다.
그리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 페이지를 배 감독에게 보여주었다.
“이런 대사가 들어가면 더 좋지 않을까 싶어서 준비해 왔습니다!”
순간 몇 초의 정적이 흘렀고.
배 감독은 대본을 펼쳐 들고 있는 박민준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박민준이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상황을 눈치챘는지 대본을 스르르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펼쳐져 있던 대본은 힘없이 탁 덮였고.
배 감독은 역 팔자 눈썹으로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애드리브를 그딴 식으로 할 거면, 아예 하지 맙시다.”
박민준의 입가에 살짝 남아 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달아났다.
그리고 곧장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배 감독은 따가운 눈총을 주며 말했다.
“다시 갑시다.”
다시 대사를 하기 위해 박민준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고.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박민준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휘었다.
쓸데없이 나에게 도발하기 위해서 내뱉은 애드리브라는 것을 모를 리 없으니까.
그는 내 표정을 보더니, 곧바로 얼굴이 붉어졌다.
이곳에서 화를 낼 수도 없어 분노에 차오를 터.
가운데가 뻥 뚫린 ㄷ자형 테이블.
그 덕에 테이블 아래로 보이는 박민준의 손.
허벅지 위에 양손을 올리고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많은 배우들이 모인 날.
그것도 첫 만남인 대본 리딩에서 감독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잘난 척을 하고 싶었던 내 앞에서 말이다.
통쾌했다.
하나, 그 감정이 묻어 나오지 않게 재빨리 감정을 잡고 대사를 이어갔다.
***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오늘 고생 많았어요. 그럼 현장에서 봅시다.”
배 감독과 작가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문을 열고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배우의 매니저들이 대본 리딩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나야, 수고 많았다.”
송유나는 최 실장의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자신의 짐을 그에게 내밀었다.
최 실장이 자연스레 받아들며 송유나를 이끌었다.
“피곤하지? 얼른 차로 가자.”
주차장 입구에 세워진 차량으로 송유나와 최 실장이 올라탔다.
송유나는 차 뒷자리에 타자마자 의자를 뒤로 젖히며 몸을 기대었다.
최 실장은 룸미러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유나야, 오늘 대본 리딩은 어땠어?”
그녀는 최 실장의 말이 귀찮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답했다.
“당연히 잘했지.”
최 실장은 송유나의 일그러진 표정을 봤음에도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유나는 말 안 해도 잘한 거 알지.”
이내 차는 빨간 불 신호에 걸렸고.
최 실장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땠어?”
그의 질문에 송유나는 한숨을 쉬며 의자를 제자리로 세웠다.
“뭐… 무난했어.”
짧은 대답에 최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그래. 쉬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송유나는 최 실장이 들으라는 듯 가볍게 소리를 내며 주의를 끌었다.
“아, 근데.”
최 실장은 그녀의 말이 반갑다는 듯 재빨리 뒤를 돌아 물었다.
“뭔데?”
“그 밥맛 또 왔더라?”
“밥맛?”
그녀의 말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최 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송유나는 미간에 힘을 주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 있잖아. 밤톨이같이 생긴 애.”
“밤톨이가 누구더라….”
최 실장은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이다 생각이 났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아, 황꽃에 같이 나왔던…!”
그녀는 최 실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어, 맞아. 그 밤톨이.”
“진희성 씨?”
그녀는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뭐, 이름은 관심 없어. 아무튼, 걔 조연 됐던데?”
송유나는 자신이 한 말에서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설마… 나 주연으로 들어가는 거 보고, 꼽사리로 밤톨이 꽂은 거 아니지?”
최 실장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에이, 절대 아니지. 너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제일 잘 아는데, 내가 그랬겠어?”
“그럼 밤톨이가 어떻게 벌써 미니시리즈 조연으로 들어와?”
송유나는 의심 가득한 눈망울로 최 실장을 쏘아보았다.
“희성 씨가 공개오디션 통과해서 배역을 따낸 걸 거야.”
대답에 흠칫한 송유나는 이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나마 다행이네.”
최 실장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 네가 싫어하는 건 절대 안 하는 거 알잖아.”
그의 말에 송유나는 아랫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렸다.
최 실장이 그런 송유나를 룸미러로 슬쩍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희성 씨 이야기가 제일 먼저 나오네?”
송유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히 내 이름 걸고 꼽사리로 들어온 걸까 봐 그렇지. 난 누가 남한테 민폐 끼치는 걸 제일 싫어하는 거 몰라?”
“알지.”
최 실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무마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흥.”
“근데 오늘 그 친구한테 무슨 인상 깊은 일이라도 있었어?”
연속으로 묻는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획 돌려 룸미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최 실장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런 애가 인상 깊을 게 뭐가 있어?”
“그렇지?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최 실장은 전방 주시를 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혹시나 그 희성 씨… 그러니까 밤톨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유나 너 같은 톱 배우가 일개 조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전혀 없잖아.”
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끄덕였다.
“뭐, 그렇긴 하지.”
“그래서 이번 드라마는 어떨 것 같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송유나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대어 누웠다.
***
차는 한참을 달려 외딴곳에 있는 세트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변을 둘러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대극이라 세트장이 일제 강점기를 표현하고 있을 줄은 예상했지만.
이렇게 그 시절을 완전히 똑같이 묘사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살아본 적은 없지만, 마치 내가 일제 강점기 시대의 한복판에 온 느낌.
회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
오래된 벽지와 포스터.
군데군데 보이는 일본어로 된 간판들까지.
항상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보던 그 시절의 배경이었다.
차에서 내린 후 여전히 제자리에서 세트장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세트장이 있다는 건 항상 말로만 들었지, 관련 배역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 현장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며 세트장을 구경하다가 발견한 전차.
일본어가 작게 써져 있는 이 녹색의 작은 전차를 어디선가 많이 본 듯했다.
김두한과 구마적이 항상 싸움을 하던 이 공간.
드라마 ‘야망시대’에서 본 장소, 그곳이었다.
어릴 적에 흥미롭게 본 드라마였기에, 나는 전차와 공터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뒤를 돌아보니 불빛이 약하게 깜빡이며 위태롭게 유지해가는 이 건물.
바로 무희 역을 맡은 송유나가 주로 나타날 공간이다.
건물을 보자마자 불현듯 꿈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시계공이었던 내가 항상 가던 단골 술집.
그 건물과 매우 흡사했다.
그때 보았던 장면과 상황이 떠오르며, 동시에 겹쳐 보이는 송유나의 얼굴.
송유나와 무희.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깊은 생각에 잠겨 건물을 바라보던 그때, 신성현이 다가왔다.
대본 리딩에서 가장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던 조연 배우.
“희성 씨!”
“아, 성현 씨.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희성 씨는 세트장 보셨어요?”
그는 이제 막 현장에 도착한 모양이다.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떡 벌렸다.
“네, 저는 조금 전에 도착해서 구경하던 중이에요.”
“이런 세트장은 처음이라 신기하네요.”
신성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나저나 저번 대본 리딩 때, 인상 깊었습니다.”
“예?”
내가 되묻자, 그는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답했다.
“대본 리딩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희성 씨 연기가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뭐랄까… 저도 모르게 빠져든달까?”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그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그러고는 그에게 엄지를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성현 씨 연기도 너무 좋으시던데요? 오늘도 기대하겠습니다.”
“하하, 그래요. 저는 옷 좀 갈아입으러 다녀올게요. 이따가 봐요.”
“네.”
그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나는 곧장 스태프들에게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단역 배우 시절이나 미니시리즈 조연을 맡을 때에나 달라지는 것은 없다.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러 가는 것.
조연을 맡았다고 해서 대우가 달라질 거란 생각조차 해본 적도 없었지.
“네,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내 인사에 스태프들의 반응은 단역 배우 때와는 달랐다.
조연임에도 날 대하는 공기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확실하게 들었다.
나중에 주연이 되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들 정도로.
단역 배우 시절에는 내 인사에 대답 없이 무시하는 것만도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다.
걸리적거리니 이곳에 오지 말아라.
동선 꼬이니 저쪽으로 빠져라.
소리를 지르며 핀잔을 주던 때가 더 많았으니까.
배 감독은 조감독과 함께 저 멀리에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어 다가갈 수도 없었다.
현장은 대본 리딩과는 달리 실전이기에, 한껏 예민해져 집중한 그들에게 다가가 흐름을 끊을 수는 없는 터.
그때.
현장 입구에 들어오는 커다란 차량.
검정 대형 밴.
검정 차량은 관리도 힘든데, 고급스러운 광택을 뽐내며 들어오는 모습.
저 정도의 고급 대형 밴에, 관리가 저렇게나 잘되는 차라면….
주연 배우급일 것이다.
조연이나 더 아래의 배우들은 아무래도 스케줄이 많지 않아, 소속 회사의 다른 배우들과 차량을 공유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차를 혼자 쓰는 톱 배우보다는 차량 관리가 조금 소홀한 편이다.
아마 저 차에서는 최서빈이나 송유나가 내리지 않을까?
문을 바라보며 생각하던 그때.
밴의 문이 스르르 열리고.
차에서 한 발을 내딛는 사람.
역시나 최서빈이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으로 차에서 내린 그는 저벅저벅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현장으로 다가오는 듯 보였다.
큰 키에 화려한 이목구비.
모든 이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최서빈이 가까이 걸어오자, 내 주변에 있던 몇몇 스태프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서빈 씨.”
조금 전 나와는 달리, 스태프들이 먼저 최서빈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더군다나 허리를 접으며 인사하는 스태프까지.
확실히 유명한 배우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기는 했다.
그렇다고 그런 모습에 화가 나거나 질투가 나지는 않았다.
최서빈같이 유명한 배우를 평소에 만나기 힘드니 다들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 터.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나도 더 열심히 연기해서 정상에 오르고 싶다는 열정이 불타오른달까?
최서빈이 점점 더 내 쪽으로 다가왔고.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한 뒤 고개를 들자 최서빈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내 인사를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미소를 유지하던 그는 갑자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 잠깐만….”
“예?”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본 적 있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