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23)화 (23/303)

23화 #6 – 조연 (4)

비공개 조연을 맡은 인물이 박민준일 줄이야.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움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조연을 맡은 나보다 비중이 높은 주연급 조연 역.

박민준은 나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고.

그 모습에 난 양 주먹을 터질 듯이 꽉 움켜쥐었다.

세상이 이렇게나 불공평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오랜 연습 끝에, 400 대 1의 경쟁률로 오디션을 봤는데.

저 자식은 연습도, 엄청난 경쟁률의 오디션도 없이 배역을 따내다니.

금방이라도 욕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겨우 안으로 삼켜냈다.

박민준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해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을뿐더러, 내 입만 더러워질 뿐이니까.

불공평하다고 따진다 한들, 어쩔 수가 없는 게 이 바닥이다.

이 연예계라는 곳이 그렇지.

차분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뱉으며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연예계가 이런 불공평한 곳이라면, 더 이상 불평할 필요도 없다.

그저 여기서 살아남을 방법을 고안해내는 게 더 현명한 것이지.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수능 제도에 대해 비판하려면, 최소 서울대에는 입학하고 나서 비판을 해야 그 의미가 있는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패배자의 넋두리밖에 되지 않는다.

세상은 생각보다 그리 따뜻하고 정의롭지만은 않다.

연예계뿐만 아니라, 어느 곳도 마찬가지지.

배우라는 직업은 내가 선택한 길이다.

어차피 공평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아무런 노력 없이 오른다고 해도, 그를 깎아내리거나 비난할 수는 없는 것.

더럽고 치사해도 내가 그 정점에 오르면 되는 것이지.

꼭 정상에 오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독해지고 강해져야 한다.

이 정도에 멘탈이 흔들려 세상에 불만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손톱자국이 손바닥에 남을 정도로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스르르 풀었다.

속에서 끓고 있던 억울함과 분노는 의지로 활활 타올랐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소리 없이 외쳤다.

보란 듯이 성공하리라고.

반드시 저 자식보다 잘될 거라고.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높이 올라갈 것이다.

***

드디어 손꼽아 기다리던 대본 리딩 날.

오늘이 오기 전까지 회사, 집, 회사, 집을 반복하며 대본 연습에만 매진했다.

첫 드라마 미니시리즈였기에 조금이라도 실수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더불어 박민준 그 자식까지 함께하는 자리였기에, 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 대사뿐 아니라 상대 배역의 대사를 모두 읊을 수 있을 만큼 연습을 마쳤다.

“희성아, 잘 하고 와.”

김 실장은 대본 리딩을 하러 들어가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응, 잘 하고 올게!”

“어, 바로 앞에서 기다릴게.”

그는 파이팅을 하듯 주먹을 들어 보였고.

그 모습에 더욱 자신감이 가득 차올랐다.

나를 믿고 응원해주는 김 실장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은 채 문을 활짝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문을 열자마자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음에도 몇 명의 배우들이 도착해 있었다.

저 멀리 앉아 있는 신성현은 나와 비슷한 급의 조연 역을 맡고 있다.

자리에 앉기 전, 그와 눈이 마주쳐 인사를 주고받았다.

“안녕하세요.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네, 저는 신성현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신성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입을 열었다.

“주연 친구 역할을 맡으셨죠?”

“예, 맞아요. 희성 씨랑 자주 겹치는 것 같던데, 잘 지내봐요.”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나누며 통성명을 하던 그때.

벌컥 문을 열고 호탕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사람.

이 드라마의 감독, 배성한이었다.

안에 있던 배우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허리를 접었다.

“감독님, 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배 감독과 함께 뒤이어 들어온 작가는 자신들의 자리에 서서 짧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다들 반가워요. 앞으로 드라마 잘 부탁해요.”

오디션을 볼 때와는 달리, 배 감독은 선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사는 다 모이면 그때 같이하죠.”

동시에 문 앞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목소리.

“배성한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큰 소리로 외치며 배 감독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

바로 박민준이었다.

그의 등장에 배 감독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우리 작품의 기둥이 벌써 오셨네.”

배 감독은 박민준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고.

그는 배 감독에게 자신의 몸을 밀착한 채 답했다.

“아유, 아닙니다.”

박민준은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으며 배 감독에게 붙어 있다가, 이내 자리에 똑바로 섰다.

곧장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순간 그의 눈빛이 싸악 돌변했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눈썹을 움찔거리는 모습.

자신이 배 감독과 가깝다는 것, 자신이 기둥이라는 것을 자랑하듯 우쭐대는 얼굴이었다.

그런 박민준이 부럽기는커녕 안쓰러워 보였다.

강아지처럼 배 감독에게 갖은 아양을 떨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으스대는 모습을 보이던 박민준이 배 감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감독님과 작업을….”

그가 한창 무언가를 말하려던 무렵.

문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박민준에게서 멀어져 문으로 옮겨졌다.

이내 문으로 들어서는 한 사람.

바로 이 드라마의 주연이자, 대한민국의 유명 배우 최서빈이었다.

연예인의 연예인이라 불리는 최서빈이 등장하자 다른 배우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배 감독이 그를 보곤 박민준의 말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발길을 옮겼다.

“서빈 씨 왔어?”

“예, 감독님. 잘 지내셨죠?”

배 감독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최서빈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응, 우리 최 배우님이 오시니까, 벌써 든든하네.”

“하하, 아닙니다.”

“이번 드라마, 잘돼야 해. 이 작품의 성패는 우리 서빈 씨한테 달렸다니까?”

배 감독이 최서빈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는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한껏 미소 짓고 있었다.

조금 전 박민준에게 보였던 태도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에게는 예의상 인사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박민준은 오디션을 보지 않고, 소속사들의 푸시로 합류된 것이기에 배 감독이 잘 부탁한다고 인사치레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최서빈에게 하는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정말 그에게 부탁하듯 말했으니까.

앞으로 드라마를 위해 힘써달라는 배 감독의 염원이 드러났다.

그걸 느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 것 듯했다.

고개를 돌려 박민준을 바라보니, 목부터 얼굴까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최서빈과 자신을 대하는 배 감독의 대우가 다르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겠지.

하지만 최서빈이나 배 감독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는지, 입술만 꽉 깨물고 있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배 감독의 이야기가 맞다.

드라마의 성패는 주연들이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기도 하니까.

물론 그 외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확실히 주연의 비중이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지.

최서빈을 향해 시선을 옮기니, 그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미소 짓고 있었다.

일부러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속에서 우러나오는 여유로움과 저 인자함.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멋있다.

얼굴이 잘생기고 인기가 많아서 그렇다기보다는.

저런 여유로움과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십 분 정도의 휴식을 가진 뒤, 곧장 대본 리딩이 시작됐다.

내 인생 두 번째 대본 리딩.

지난번 단막극 대본 리딩을 해봤기에 떨리지 않을 줄 알았건만, 그렇지도 않았다.

단막극은 출연 배우가 적어 규모가 꽤 작은 편이었다.

이번 미니시리즈는 그보다 규모가 크다고는 생각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매니저들을 제외하고도 배우들만 30여 명이 넘었으니까.

이 쟁쟁한 배우들 가운데서 묻히지 않고 연기로 나 자신을 보여줘야 한다.

물론 다른 배우들에 비해 일부러 튀려고 과장된 연기를 할 생각은 없지만.

워낙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니, 뒤쳐지지 않아야 한다.

주먹을 불끈 쥐고 의지를 불태웠다.

***

“이렇게 시계태엽 하나만 가지고도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거 아닙니까.”

이미 다 외운 대본이니, 상대 배역을 바라보며 대사를 읊었다.

시계 장인의 역할을 맡은 배우가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네 나이면 충분하다.”

“시계태엽에 대해….”

나는 대사를 입 밖으로 내뱉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대본 리딩 현장에 빼곡하게 앉아 있는 30여 명의 배우들.

하지만 그들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대사를 읊을 때만큼은, 정말 이상하리만큼 꿈에서 봤던 그 장면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치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대사를 잊거나 하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의 시절로 들어간 것 같은 몰입감이 들었고.

덕분에 내 대사는 다른 이들로 하여금 연기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장인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시계장인 역인 배우를 향해 의지에 타오르는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치켜 올라간 눈썹, 주먹을 불끈 쥔 양손.

나를 빤히 바라보던 배 감독이 리딩을 중단하며 입을 열었다.

“잠깐만!”

배 감독의 한마디에 모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대사를 하던 와중에 멈춰버린 것이기에, 심장이 급격히 두근대기 시작했다.

뭐지?

내가 대사를 실수한 건가….

아니, 틀리지 않았는데?

마른침을 한 번 삼켜내고 배 감독을 바라보자, 그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희성 씨, 연기 잘하네.”

그의 한마디에 몇몇 배우는 공감한다는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에 심장 박동은 오히려 배가되듯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다 좋은데. 앞쪽 대사는 그 시절 느낌으로 말투를 조금 바꿔봤으면 하는데, 할 수 있겠어?”

배 감독이 내 연기를 보며 펜으로 하나하나 체크해뒀던 것들을 읊어주었다.

막연히 ‘다시 해봐’라는 말보다 수정할 점을 알려주는 그의 지시 사항에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해 보겠습니다!”

“좋아. 다시 한번 가볼게요.”

내 신이 끝난 후, 넘어간 대본 다음 장.

다음은 최서빈과 송유나의 대화 신이다.

주연 배우들만이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이었기에, 감독과 작가를 포함해 모든 배우가 주목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고, 최서빈은 그 시선을 느꼈는지도 모를 정도로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내 곁에만 있어준다면, 나는 그 어떤 것이라도 괜찮을 것 같네.”

대사를 외치기만 했는데도 배 감독은 손뼉을 부딪쳤다.

그는 지적할 것도 없다는 듯 펜을 내려놓고 디렉팅이 아닌, 감상을 하며 바라보았다.

배 감독의 옆에 앉아 있는 작가도 흡족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그의 연기는 나무랄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했다.

맡은 배역에 완전히 녹아든 그의 연기는, 나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배 감독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 다시 이어서 가볼게요. 유나 씨, 대사부터 들어가요.”

“네.”

송유나는 새침한 표정으로 머리를 한 번 흔들었다.

그리고 이내 집중한 그녀.

“그건 당신 생각이잖아요. 저는 무희로 일하면서… 이곳을 떠날 수 없어요.”

배 감독은 이번에도 흐뭇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연신 최서빈과 송유나를 번갈아 보았다.

송유나의 연기 역시 물이 오른 듯했다.

춤을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남자를 따라갈 수 없는 그녀의 시린 연기.

이곳의 배우들을 집중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자꾸만 꿈에서 보았던 무희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꿈속 그녀와 닮아서일까?

주연들의 연기가 끝나고 다시 찾아온 내 순서.

이번에는 나와 박민준이 대사를 주고받는 신.

라이벌 관계로 나오는 우리는, 이번 신 역시 부딪치는 장면의 대사가 나왔다.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표현해야 하다 보니, 눈을 감고 장면을 떠올리며 몰입을 시작했다.

길게 호흡을 내뱉으며 감정을 정리하던 그때.

몰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민준이 대사를 내뱉었다.

내가 눈을 뜨지 않은 것을 보았음에도 일부러 대사를 치고 들어온 것.

“어이, 김대한. 일 처리를 그딴 식으로 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럼에도 나는 당황하지 않은 채 재빨리 눈을 떠 그를 노려보았다.

절로 올라간 한쪽 입꼬리.

콧방귀를 뀌며 억양을 높였다.

“그딴 식? 말 다 한 겁니까?”

마치 진짜 싸움이라도 난 듯, 현장은 순식간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저 대사를 뱉었을 뿐인데….

박민준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더 심하게 하려는 거 겨우 참은 거야. 이 새끼야.”

나는 박민준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역의 대사까지 모두 외웠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건, 대본에 없는 대사였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둘러 대본을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저런 대사는 없었다.

나처럼 대본을 뒤적거리던 배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스톱!”

배 감독의 한마디에 이곳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런 배 감독은 못마땅한 표정과 함께 박민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민준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예?”

하나, 배 감독은 싸늘한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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