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6 – 조연 (3)
“희성아, 촬영 일정 나왔다.”
김 실장은 다이어리를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
“그럼 그때 조연 3명 비공개 떴던 것도 정해진 거야?”
“잠깐만.”
그는 휴대 전화 메시지를 뒤적였다.
“어, 나왔네. 근데 3명 중에 2명만 나왔어.”
“아직도?”
그는 아랫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연 2명. 둘 다 회사가 더블제이야.”
더블제이.
3대 엔터 소속 중에서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무려 2명이나 같은 소속사에서 나올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이다.
회사에서 무슨 힘을 썼길래, 이렇게 많이 넣었지?
그리고 남은 비공개 한 자리.
바로 그 배역은 나와 대립 관계에 있는 역할이었다.
대본을 보면 항상 나와 부딪치고, 무녀 한 명을 두고 다투기까지 하는 일종의 라이벌.
사실 더블제이에서 꽂은 2명의 조연보다도, 나머지 한 명의 배역이 궁금했다.
나와 호흡을 맞춰야 하는 상대 배역이기에.
그 역할은 주연급까지는 아니지만, 조연 중에서 비중이 높은 조연이다.
나보다도 더 비중이 큰 역할이었다.
시쳇말로 ‘서브남’이라고 불리는 배역.
무녀를 두고 라이벌 구도를 그리지만, 시계공인 내 선배 역할이기도 하다.
나에게 꾸중과 혼냄을 도맡는 역이기에 너무나 그 배우가 궁금했다.
“형, 그것보다 나머지 한 명은 누가 될 것 같다는 이야기도 없어?”
“내부에서는 어느 정도 확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매니저들 사이에는 말이 돌지가 않네.”
“아, 너무 궁금한데?”
“늦어도 다음 주 내에는 확정하기로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알겠어. 나오면 바로 좀 알려줘.”
“당연하지.”
김 실장은 다이어리를 확인하다가 말고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내게 물었다.
“맞다, 희성아. 그보다 너 주말에 일 있다며?”
“아, 그냥 동창회야.”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그래? 동창회면, 뭐 필요한 거 없고?”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형, 말이 거창해서 동창회지, 그냥 동기들끼리 모여서 술 마시고 이야기하는 거야.”
“필요하면 연락해. 시간 맞춰서 태우러 갈게.”
나는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에이, 아니야. 그냥 택시 타면 되는 건데.”
“그래도 명색이 배우인데 또 차로 데리러 가면 좋지.”
그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괜찮아, 형.”
“그래도 필요하면 꼭 말해.”
“알겠어.”
그는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드라마나 회사 관련해서 보도된 내용 이외에는 비밀 엄수해야 해. 알지?”
“넵! 당연하죠. 걱정 마, 형.”
“응,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
동네에 있는 작은 호프집.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창들이기에, 잠깐 입구에 서서 목을 가다듬었다.
문을 열기도 전부터 새어나오는 시끌벅적한 소리.
이미 여러 명이 도착해 수다를 떨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둘러 문을 열자,
“야, 진희성!”
나를 향해 소리치는 친구들.
“오랜만이다.”
활짝 미소를 지으며 친구들에게 향했다.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희성이 너 안색 좋아졌다?”
“하하, 너는 그대로다, 인마.”
자리에 앉기도 전에 서로의 안부를 묻느라 정신이 없었다.
생맥주의 빈 잔이 몇 차례 채워지고.
대화의 흐름은 자연스레 근황 이야기로 넘어갔다.
옆에 앉은 친구가 맥주를 한 모금 넘기며 입을 열었다.
“지온이, 너는 요즘 뭐 해?”
“혜화에서 연극하고 있지.”
“맞다. 너 작년부터 혜화 쪽으로 갔다고 했지?”
“응, 너도 소극장에 있다고 하지 않았냐?”
그는 박지온의 말에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하, 나는 결국 취업했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취업? 무슨 회사로.”
내 말에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영업직.”
덩달아 내 마음도 편치 않아졌다.
연극 영화과에서 다 함께 연기를 하며 지내던 친구들.
그때는 연기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연기가 아니면 죽을 거 같다던 우리는 졸업 후 현실에 부딪힌 것이지.
나 역시 HS 엔터에 들어오기 전까지, 단역 배우로 전전하며 편의점 알바로 생계를 유지했으니까.
동기 중에는 나를 포함해서 번듯하게 자리를 잡고 배우 일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자식, 단 한 명을 빼고는.
그나마 연기의 전공을 살려 전업으로 연극을 하는 친구는 한 명뿐.
나머지는 뮤지컬이나 연극, 단역 배우를 하며 배를 굶주리며 살다가, 결국 현실과 타협해 취업 전선에 합류했다.
그래도 꿈을 놓지 않고 취미로라도 연기를 이어가는 친구들을 보면, 항상 대단하고 멋있다고 느꼈다.
물론 돈을 벌어야 하기에 연기에만 집중하며 살지는 못한다.
그런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만큼 세상에는 연기를 잘하는 사람도, 재능이 많은 사람도 넘쳐난다는 의미다.
무거운 주제를 떨쳐 버리려는 듯, 우리는 술 한 잔과 함께 대화 주제를 전환했다.
“야, 그때 동물 연기 알려주던 박 교수님은 아직 계신대?”
“하하, 진짜 추억이다. 나 그때 타조했던 거 기억나냐?”
“얘 봐라? 내 기린이 더 대박이었지!”
우리는 금세 웃음꽃을 피워냈다.
그렇게 안주가 한 번 더 추가되고, 소주가 테이블에 올라올 때.
이명진이 나에게 물었다.
“희성아.”
“응.”
“너 요즘 알바 계속하고 있냐?”
내가 조연에 합격한 것은커녕, HS 엔터와 계약한 것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기에.
이명진의 말로 인해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아니, 나 알바 그만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박지온이 소리쳤다.
“야, 맞다! 희성이 이번에 지상파 나왔잖아.”
시청률이 저조한 단막극이기에 주변에서 많이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기인 그 역시 연기에 대한 관심을 다 버리지는 않은 듯했다.
대학 시절부터 단막극이나 독립 영화를 좋아하던 그였기에, 내가 출연한 단막극 역시 빠지지 않고 본 모양이었다.
나를 향하던 눈길들은 박지온의 말에 홀린 듯 옮겨졌고.
금세 자리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진짜로?”
“뭐야, 희성이 연기 계속하고 있었어?”
“몰랐냐? 희성이 계속 단역으로 연기하고 있었잖아.”
당사자에게 묻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떠들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대화가 잠잠해지자 이내 이명진이 내게 물었다.
“그래서 희성아, 대답해봐. 지상파 어디 나온 건데?”
나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한데, 그냥 단막극이야.”
그냥 단막극이 아니다.
내 인생 첫 주연의 단막극이었지.
주변에, 그리고 친구들에게 떵떵거리며 자랑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곳에 있는 친구들이 연기를 업으로 삼고 있지 않은 이유는,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현실의 벽에 부딪혀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이니까.
그런 동기들에게 구태여 내가 연기로 인해 잘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법.
박지온이 손을 뻗어 흔들었다.
“그냥 단막극이라니. 희성이 무려 주연이었어.”
“진짜?”
“와, 정말로?”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손뼉을 부딪치는 친구부터, 입을 틀어막는 친구까지.
“이야, 희성이 출세했다.”
“그래. 진짜 자랑스럽다, 희성아. 앞으로 TV에 더 많이 나와서 얼굴 보여줘라.”
그들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하. 고맙다, 얘들아.”
그때 통유리 벽을 통해 들어오는 밝디밝은 라이트.
자동차 조명에 우리는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아, 뭐야. 눈뽕!”
곧장 자동차의 라이트와 시동이 꺼지고, 그제야 보이는 차량.
“야, 저거 연예인 차 아니야?”
한 명이 소리치자, 맞장구치듯 대답이 쏟아져 나왔다.
“맞네. 드디어 주인공 납셨다.”
“그래, 우리 중에 제일 잘나가는 연예인님 오신다!”
아까 말했던 그 유일하게 자리 잡은 놈.
아니, 오히려 잘나가는 자식.
문이 벌컥 열리고.
딱 붙는 슈트에 풀 메이크업.
거기에 잔뜩 힘을 준 머리.
박민준이 손을 흔들며 들어왔다.
이 자리에 있던 모두의 시선은 순식간에 박민준에게로 쏠렸다.
“이야, 우리 대배우님 오셨다!”
“연예인이다, 연예인!”
친구들은 한마디씩을 덧붙였고, 박민준은 민망해하기는커녕 활짝 웃으며 자리로 다가왔다.
“하하, 대배우는 무슨.”
“네가 우리 동기 중에서 제일 잘나가는 배우잖냐.”
“맞아. 오늘도 이렇게 멋있게 하고 오기 있냐?”
박민준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미안하다. 오늘 바빠서 스케줄 끝나고 바로 오는 길이야.”
“미안하기는. 멋있다, 야. 얼른 앉아.”
“어, 옆으로 한 칸씩만 가줄래?”
박민준은 많고 많은 자리 중에서 굳이 내 앞을 차지했다.
이미 들어올 때부터 나와 눈을 마주쳤지만, 박민준은 구태여 큰 소리로 내게 인사했다.
“어? 희성이도 있었네.”
심기가 불편했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굳이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싫었다.
그렇다고 이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응.”
그때 직원이 박민준의 앞에 술잔과 1인 세팅을 하면서 우리의 대화가 끊겼다.
친구들은 모두 박민준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성아, 너 시계공과 무희 드라마 들어간다며?”
모두가 들으라는 듯 박민준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의 말에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뭐지?
내가 출연한다는 이야기를 얘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게다가 굳이 내 이야기를 자신의 입으로 하는 의미가 뭐지?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이명진이 입을 열었다.
“그거 MBS 미니시리즈 아니냐?”
“대박.”
“맞아. 나도 인터넷에서 봤어!”
예상치 못한 소식에 친구들은 환호를 내질렀다.
“우와! 희성이 단막극 찍더니, 이렇게 바로 미니시리즈 들어가는 거야?”
“나도 그거 오디션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경쟁률 장난 아니었다면서!”
박민준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들을 향해 외쳤다.
“얘들아, 희성이 무려 미니시리즈 조연 맡았어.”
이상했다.
내가 아는 박민준은 절대 내 칭찬을 할 리가 없는데.
무슨 의도가 있는 게 분명했다.
박민준이 내 좋은 이야기를 신나서 떠들 리가 절대 없으니까.
“희성이 최근에 주연이었으니까, 이번에는 주연급 조연인가?”
드라마나 영화에는 배우 3개 급이 존재한다.
주연과 주연급 조연, 조연.
그리고 이 외의 모두 단역인 셈이다.
일반인들은 주연을 제외한 모두를 조연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조연에도 급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두 연기를 배웠던 사람들이기에, 같은 조연이라도 급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조연이야. 이제 천천히 올라가야지.”
“대단하다, 희성아. 미니시리즈 조연이라니, 나는 단역이라도 좀 해보고 싶다.”
박지온이 진심을 다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흠흠.”
그때 박민준이 목을 가다듬었다.
내 칭찬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것이지.
그러고는 팔꿈치를 테이블에 얹으며, 턱을 괴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동시에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열었다.
“너, 나랑 같이 일하겠다.”
가늘게 뜬 눈, 비열하게 올린 한쪽 입꼬리.
이런 말투와 표정으로 말을 내뱉는 것이 불쾌했다.
“뭐?”
“나도 한다고. 시계공과 무희.”
순간 멍해졌다.
시계공과 무희에 박민준이 들어온다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녀석이 단역을 맡을 리는 없으니, 비어 있는 배역은 극 중 나와 라이벌 관계인 시계공 최민환 역, 하나뿐이다.
설마….
“네가 최민환 역이야?”
박민준은 씨익, 입꼬리를 비틀며 대답했다.
“어, 최민환 역할이 나야.”
극 중에서도 나와 시도 때도 없이 부딪치는 역할이 박민준이라니.
박민준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몰랐지? 조만간 기사 날 거야.”
그의 말에 내가 아닌 박지온이 입을 열었다.
“뭐야, 민준이 너도 같은 드라마 들어가는 거야?”
“어, 그렇게 됐어.”
“너는 뭐야, 주연?”
박민준은 언제 비열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이, 그 정도는 아니고.”
“그럼 민준이도 같은 조연 역할이야?”
박민준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아니, 나는 ‘주연급’ 조연.”
녀석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조연을 맡은 나보다 굳이 자신이 한 단계 높음을 어필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이야, 민준이 대박이네.”
“역시 민준이 대배우라니까?”
내 옆에 앉은 이명진은 나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민준아, 희성이랑 같이하는데 잘 좀 해줘라.”
“그럼 당연하지. 희성이가 조연은 처음이니까.”
그는 의뭉스레 입술을 비틀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잘 챙겨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