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6 – 조연 (2)
천둥 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던 날.
그날은 하루 내내 자기 전까지 머리가 간질거렸다.
두피나 머리카락이 간질거리는 것이 아니다.
뇌인지, 어느 부분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머릿속이 하루 내내 신경 쓰일 정도였다.
이게 대체 뭔지는 모르겠다.
왠지 모르게 내가 꿨든 꿈들과 연관이 되었으리란 직감뿐이었다.
꿈과 관련이 있다는 분명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머릿속 느낌조차 정의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번개가 쳤을 때 떠올랐던 무희와 눈을 맞추던 모습.
그리고 그 순간 느껴지던 두통과 머릿속의 간질거림.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혹시 꿈을 다시 꾼다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대본 연습을 하던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연습실을 벗어나 회사 내에 있는 수면실로 향했다.
수면실의 빈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과연 이대로 잠을 청하면 시계공이든, 어떤 꿈이든 꿀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이이잉.
한 시간 뒤 울리는 알람 소리.
잠이 들까 걱정하던 마음이 무색하게 깊은 잠에 빠졌었나 보다.
그 한 시간의 깊은 잠자리에서 나는 아무런 꿈도,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
“감독님,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래.”
감독은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쭉 켰다.
“오늘 몇 명이나 오디션 본 거지?”
그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스태프가 입을 열었다.
“오전에는 40명, 오후에는 67명입니다.”
“하, 오늘도 진짜 많았네.”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스태프가 그의 앞에 놓인 프로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들 수고했다. 난 뒤에 일정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고생하셨습니다, 감독님.”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감독과 스태프들이 따라 일어나 허리를 접으며 인사했다.
회의실에 남은 조감독과 스태프들.
스태프들은 어질러진 서류와 물품을 정리하기에 바빴다.
그때, 스태프 중 한 명이 조감독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조감독님.”
“어, 민철아.”
자리에 앉아 있던 조감독은 의자를 빼내며 스태프를 바라보았다.
다가온 스태프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너도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조감독 앞에 펼쳐진 프로필 종이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프로필이 이번 조연 배우들이죠?”
“응,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만.”
조감독은 그에게 프로필 사진을 보여주었고, 민철이 프로필 한 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근데 조감독님, 이 친구는 왜 최종 후보에 오른 거예요?”
“누구?”
조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태프의 손가락 끝이 향한 프로필을 바라보았다.
“아… 진희성?”
“네, 카메라에 녹화된 영상을 봐서 연기를 잘한다는 건 알겠는데, 이 정도 연기력을 가진 배우는 많지 않았습니까?”
조감독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을 경청했다.
“연기력이 같다면, 이왕이면 경력이 짱짱한 배우가 낫지 않나 해서요. 진희성, 이 친구는 필모도 아쉬운 것 같던데요.”
그의 말에 조감독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필모가 부족한 거, 그건 맞지.”
조감독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건 겉으로 볼 때만이야. 이 바닥은 스펙보다 현장에서 보여주는 연기가 더 중요하잖아?”
“그렇긴 합니다.”
“근데 이 친구는 뭐라고 해야 할까. 진희성, 이 친구는 현장에서 확 빨아들이는 무언가가 있어.”
“그래요?”
“어, 이번에 최종 후보에 오른 조연 배우 중에서 오디션 들어간 심사 위원들에게 유일하게 만장일치를 받았거든.”
조감독의 말에 스태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분 모두한테요?”
“응, 전부.”
스태프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와! 만장일치로 배역이 뽑히는 게 진짜 어려운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근데 그걸 이 친구가 해냈어. 대단한 거지.”
“카메라로 봐도 연기를 잘하기는 했는데, 놀랍네요.”
조감독은 진희성의 연기가 떠올랐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회상하듯 말했다.
“막 격정적이거나 몰입이 되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연기에 빨려들어 가.”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감독님이 촬영 현장에서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작가님도 딱 이 배역이랑 맞는 배우인 것 같다고 하시고.”
그러자 스태프가 입을 모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 배역이 주인을 만난 거네요.”
“그러게. 아마 이 친구로 최종 결정될 것 같은데, 현장에서 한번 봐봐. 민철이 너도 감탄할 거다.”
“네, 기대해 보겠습니다. 하하.”
조감독은 진희성의 프로필을 집어 들어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흠흠, 아니,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연습실에 울려 퍼지는 내 목소리.
이 톤이 아니다.
다시 한번 물로 목을 축인 뒤, 소리쳤다.
“아니,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희성아!”
연습실 문이 확 열리며 김 실장이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응, 형.”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손에는 종이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김 실장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뭐야. 뭔데 그렇게 빤히 바라봐?”
내 말에도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눈을 크게 뜨고 김 실장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
“괜찮아, 형…?”
걱정스러운 내 표정을 읽었는지, 김 실장이 들고 있던 종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야?”
내 시선은 곧장 그 종이로 향했고.
상단에는 커다란 크기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시계공과 무희 – 배역’
집중한 탓에 일그러진 내 표정.
눈에 힘을 잔뜩 주고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시선이 멈춘 곳.
-남자 조연: 신성현 (주연 친구 – 박충현 역)
-남자 조연: 진희성 (시계공 – 김대한 역)
-여자 조연: 고아현 (무희 1 – 아름 역)
-남자 조연: 비공개 (시계공 – 최민환 역)
-남자 조연: 비공개 (주연 동생 – 나현민 역)
-여자 조연: 비공개 (무희 2 – 나라 역)
나는 서둘러 눈을 벅벅 비볐다.
너무 세게 비빈 탓에 눈앞이 새하얘졌고, 흐렸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와도 여전히 보이는 글자.
‘진희성’ 내 이름이었다.
재차 확인하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김 실장에게 소리쳤다.
“형, 이거 나 맞지?”
그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정된 거 맞지?”
“어, 희성아. 네가 해냈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연습실 안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열심히 했잖아. 희성이 네가 될 수밖에 없었던 거지.”
짜릿했다.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가고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만큼 힘차게 뛰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있을까?
얼마 전 단막극에 합격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의 행복이었다.
굳이 언제가 더 기뻤나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번 미니시리즈의 내 역할은 무려 400 대 1의 경쟁률.
무려 내가 400명의 쟁쟁한 배우들 중에서 배역을 차지한 것 아닌가.
이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 진짜 믿기지가 않아, 형.”
“정말 고생했어, 희성아.”
그는 나보다 더 달아오른 얼굴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참을 붕 떠 있는 기분을 느끼던 나는, 이성을 찾고 서류를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여전히 ‘진희성’이라는 세 글자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는 다른 조연들.
주요 조연은 총 6명.
나를 포함한 3명은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고.
나머지 3명의 배역 옆에는 ‘비공개’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굳이 배역에 비공개를 적어둔 이유가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김 실장에게 물었다.
“형, 이거 비공개는 대체 뭐야?”
“뻔하지, 뭐.”
그는 내 옆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저건 외부 영향이 미친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음…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어.”
김 실장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첫 번째로, 감독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 추가로 오디션을 보려는 경우.”
고개를 끄덕이다가 의문이 들었다.
“근데 그러기에는 이 배역은 말이 안 되는데?”
“어떤 거?”
“여기, 주인공 동생인 이 역할.”
나는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배역은 내 역할보다 경쟁률이 높았다며. 700 대 1이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 무려 700명이나 오디션을 봤는데, 거기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하나 없었겠어?”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 실장은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이게 바로 두 번째 경우. 투자사나 방송국의 압력.”
“압력이라면, 투자사나 방송국에서 배역을 바로 꽂아 넣는 건가?”
그는 손가락을 튕기며 답했다.
“맞아. 그걸 위해서 비워둔 자리인 거지.”
“그것도 모르고, 무려 700명이나 오디션을 본 거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배우 700명의 절실한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럼 누가 들어올지는 모르는 거야?”
“그렇지. 뭐, 보통 방송국과 투자사는 다 대형 엔터와 손잡고 있으니까.”
사실 우리 회사 역시 그 대형 엔터 중 한곳이다.
회사 내의 아이돌이 배우로 전향할 때.
혹은 드라마 주연 경쟁에서 회사의 영향이 많이 미치기는 한다.
하지만 현재의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전혀 없었지.
“누가 이 배역으로 들어올지는 지켜봐야겠네.”
“맞아.”
이해를 마친 뒤, 나는 다시 서류를 바라보았다.
-남자 주연: 최서빈 (나현우 역)
-여자 주연: 송유나 (한서희 역)
어…?
잠깐만.
송유나가 여자 주인공?
여자 주인공 역할은 무희 역인데.
꿈에서 봤던 그 장면…!
무대에서 춤을 추는 무희였던 송유나.
이제 대체 무슨 상황이지?
처음 황꽃 드라마를 할 때, 공주 역할을 맡았던 송유나와 꿈에서 보았던 공주의 모습은 분명 달랐다.
이번 꿈에서 송유나를 봤는데….
그렇다면 내 꿈이 예지몽인 건가?
아니, 예지몽이라고 하기에는 황꽃 드라마는 아니었잖아.
현실과 연결이 되는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연관성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잊었던 두통이 다시금 내 머리를 두드렸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그때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 하나.
바로 한소정이었다.
단막극 회식 때 한소정 역시 ‘시계공과 무희’ 드라마 오디션을 본다고 했으니까.
그녀도 이 드라마의 한 역할을 맡았으려나?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희성아, 전화 오는데?”
김 실장의 말에 놀라 서둘러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발신인: 한소정]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팔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김 실장에게 입을 열었다.
“형, 나 잠깐 전화 좀.”
“응, 다녀와.”
전화가 끊기기 전에 휴게실에 도착했다.
“여보세요?”
-저 한소정이에요.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혹시 통화 가능하세요?
그녀는 내게 전화를 한 것이 긴장됐는지 빠른 말로 물었다.
“네,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혹시 ‘별을 보지 않아’ 작가님 연락처를 가지고 있나 해서요.
“아… 네, 있죠. 보내 드릴까요?”
-네, 제가 저장한다는 게 깜빡하고 놓쳐버려서 못 찾겠더라고요. 오늘 내로 연락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요. 부탁드릴게요.
“예, 전화 끊고 바로 보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네, 그럼….”
전화를 마무리 지으려는데, 갑자기 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 희성 씨!
“네?”
-우리 저번에 이야기했던 ‘시계공과 무희’요. 오늘 결과 나왔다던데, 어떻게 됐어요?
한소정도 붙었다면 아까 그 합격자 목록을 받았을 터.
더불어 한소정은 아까 그 목록에 이름이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저 붙었어요.”
목록에는 없었지만, 혹시나 비공개 목록일 수도 있다는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다.
“소정 씨는요?”
-저는 안타깝게도… 떨어졌어요.
“아… 그래요?”
-네, 꼭 하고 싶었는데, 제가 실력이 부족했나 봐요.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
어떤 말로 그녀에게 답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희성 씨라도 붙었으니 다행이에요. 꼭 잘하세요.
“그렇지만….”
-제 몫까지 희성 씨가 연기해 주세요. 파이팅이에요! 저 지금 들어가 봐야 해서, 연락처 전송 좀 부탁드릴게요.
“네, 바로 보내 드릴게요.”
-그럼 다음에 또 봬요.
전화는 그대로 끊겼다.
한소정의 목소리는 내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내가 그녀 대신 붙은 것은 아니지만, 괜스레 잘못한 기분이 들고, 미안해할 필요가 없는데도 미안한 마음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평소 사근사근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떨어짐에 대한 아쉬운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밝은 척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드라마나 연기를 준비하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뭐, 그래도 한소정의 연기 실력이면 어떤 곳이든 배역을 따낼 것이다.
연기는 충분히 잘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녀가 말했던 대로 나는 이 드라마에 최선을 다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한소정의 몫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