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9)화 (19/303)

19화 #5 – 꿈에서 본 그녀 (4)

팟.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천장.

순간 멍해진 나는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수차례를 감았다 떴지만 배경은 변하지 않았다.

푹신한 이불과 베개.

현실이었다.

젠장.

하필 무희에게 말을 거는 순간 잠에서 깨어나다니.

아직 목소리조차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녀와 단 한마디도 나눠보지 못했는데….

이상하리만큼 빨리 뛰는 심장 소리에 가슴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분명 깨어났음에도 꿈속에서 그녀를 볼 때처럼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현실로 돌아왔기에 놀라서 뛰는 가슴이 아니었다.

마치 사랑에 빠져 심장이 주체가 안 되는 느낌.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뜨거웠고, 그녀를 보고 설렜던 그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꿈에서 깨어난 지금, 조금 전 꾸었던 꿈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가 추던 춤.

본 순간부터 아무 행동도, 생각도 못 한 채 그저 넋을 놓아버린 내 모습까지.

꿈이 아니라 방금 겪었던 일처럼 생생했다.

그 생각에 나는 누운 자세로 헤실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순간 뇌리를 스치는 하나의 생각.

‘시계공과 무희.’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드라마 오디션 작품 이름이다.

며칠 내내 연습했기에, 드라마 내용을 빠삭하게 알고 있지.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들.

그 설정들이 드라마와 무서우리만큼 똑같았다.

정확히 따져보자면, 대본과는 오묘하게 다르긴 하다.

시계공인 것은 똑같지만, 작중에서 연습하고 있는 배역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하지만 꿈에서의 내 모습은 가난보다는 적당한 평민층 정도에 속하는 듯 보였다.

그 정도만이 다를 뿐.

하나, 이를 제외하면 비슷한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혹시나 다시 잠을 청하면 이어서 꿈을 꿀 수 있지는 않을까?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잠에서 깨느라 끊어졌던 그 장면을 이어서 보고 싶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무희, 그녀를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이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눈을 질끈 감았다.

몇 초의 시간이 흘렀지만, 잠은 들지 않고 눈앞은 그저 캄캄함 뿐.

꿈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되새겼다.

잠깐만.

그 무희 얼굴….

어디서 많이 봤던 얼굴인 것 같은데?

눈을 감은 채 눈동자를 굴리며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송유나!

분명 무희는 송유나의 얼굴이었다.

그녀를 떠올린 순간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설레던 감정이 순식간에 싹 사라졌다.

…일어나서 씻기나 해야겠다.

***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책장에는 수없이 많은 상패가 칸을 채우고 있었다.

그 옆으로 길게 뻗은 책상.

한가운데 크리스털 명패가 올려져 있고.

명패에는 ‘HS 엔터테인먼트 대표 임종주’라는 각인이 선명하게 보였다.

통유리 창을 가린 새하얀 블라인드.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이 대표실을 밝게 비췄다.

똑똑.

“들어와요.”

임 대표의 말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직원.

천천히 걸어온 직원은 들고 있던 차 두 잔을 임 대표가 앉아 있는 소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럼.”

직원이 대표실을 나가자 임 대표는 입을 열었다.

“강 본부장, 들게.”

“예, 대표님.”

커다란 소파에 몸을 기대어 다리를 꼰 채 찻잔을 드는 임 대표의 얼굴에서는 여유로움이 묻어나왔다.

쌍꺼풀이 진한 눈의 임 대표는 짙은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요즘 배우 팀은 어때?”

그의 말에 강 본부장은 황급히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지금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빠졌던 배우 풀도 다시 채워져서 슬슬 탄탄해지는 중입니다.”

“그래, 빠진 배우들 채우려면 바삐 움직여야지.”

“맞습니다.”

강 본부장은 다리를 모으고 공손히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임 대표는 코로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최서빈을 놓친 게 조금 아쉽기는 하다만….”

그의 말에 강 본부장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죄송합니다. WG 엔터 측에서 옵션을 너무 세게 걸어서, 전부 쫓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괜찮아. 아쉽다는 거지. 강 본부장 탓을 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임 대표는 인자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대화 주제를 넘겼다.

“새로 들어온 신인들은 어때?”

“잘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 이번에 들어온 배우 중에 괜찮은 애 하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멀끔하게 생긴…….”

강 본부장은 바로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진희성 말씀이십니까?”

“어, 성이 특이해서 기억난다. 진희성.”

임 대표는 소파에 기대던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걔는 좀 어때, 요즘 뭐 하나?”

강 본부장은 가져온 다이어리를 확인하며 답했다.

“단막극 마무리하고, 곧바로 미니시리즈 조연 준비 중입니다.”

“벌써? 단막극이 이제 끝난 거 아니었나?”

“맞습니다. 그 단막극을 찍은 게 평이 꽤 좋습니다.”

임 대표가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말에 경청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연기력이 더 괜찮았습니다. 이번에 한번 푸시해 보려고 합니다.”

“좋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었다.

“내가 도울 건 없고?”

“괜찮습니다.”

“자리든 뭐든 필요하면 말해. 이번에 안 되면 내가 어떻게 힘써볼 수는 있으니까 말이야.”

강 본부장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아직은 신인이라 조금 더 부딪쳐 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때 아니면 또 언제 그렇게 하겠어.”

“맞습니다. 게다가 본인 능력도 있어서 부딪치다 보면 상반기 내에 한번은 따낼 거라고 예상합니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네.”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대표님.”

그들은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강 본부장.”

“예, 대표님.”

“내가 강 본부장을 믿고 있는 거 알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임 대표는 풀었던 다리를 다시 꼬며 말했다.

“이번에 내가 배우 팀 위해서 OTT 플랫폼에까지 투자했어. 슬슬 성과가 나왔으면 해.”

그의 말에 강 본부장이 허리를 세우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안 그래도 지금 해외 지사 팀. 가수랑 배우들 다 복귀 예정이지 않나.”

“네, 날짜 체크하고 있습니다.”

“할리우드에서 패전하고 돌아왔어도 국내 분위기가 좋아야 복귀할 수 있어.”

임 대표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복귀해서 드라마나 예능, 영화에 밀어 넣으려면 지금 국내 애들이 자리를 잡아놔야 한다는 말이야.”

“최대한 끌어올려 보겠습니다.”

“지켜보고 있겠네.”

확신에 가득 찬 강 본부장의 말에 임 대표는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그리고 블랙마스크 주선 영입은 어떻게 되어가나?”

강 본부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이야기 중이지만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계약금 때문인가?”

“그건 아니고, 아무래도 기존 그룹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

***

얼마 남지 않은 오디션.

완벽한 준비를 위해 온종일 식사와 화장실을 제외하고는 연습에 매진했다.

덕분에 집에 도착한 지금, 어둠이 깊게 내려앉았다.

깜깜한 집 안에서 벽을 더듬거리며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하….”

피곤한 몸을 던지듯이 침대로 내던졌다.

스트레칭을 하기 위해 손을 머리 위로 쭉 뻗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는.

“어으윽.”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짤깍짤깍.

그때 귓가에 맴도는 거슬리는 소리.

지금 너무나 피곤해서 예민한 탓인가?

오늘따라 항상 차고 있던 손목시계에서 들리는 소리가 심기를 건드렸다.

누워 있던 몸을 이끌고 벌떡 일어나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왼쪽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바라보자, 마치 투시도를 보는 것처럼.

팟-!

시계 구조가 쫙 머릿속에 들어왔다.

‘이거 시침 옆 톱니바퀴 이가 하나 나간 것 같은데?’

지체할 틈도 없이 작은 공구함을 챙겨 들었다

그러곤 이내 홀린 듯 시계 내부를 열어 확인하기 시작했다.

고요한 방 안에서는,

끼릭. 끼리릭. 드르륵.

드라이버를 이용해 손목시계를 여는 소리만이 울렸다.

그 외엔 내 거친 숨소리뿐.

얼마 지나지 않아 굽었던 허리를 쫙 펴며 작은 부품 하나를 들어 올렸다.

“맞네, 이 톱니바퀴!”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눈을 비비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이 시계를 분해했지?

시계방에 맡기면 되는 건데… 내가 왜….

더 어이가 없었던 건.

직감적으로 추측했던 톱니바퀴의 이가 나갔다는 게 사실로 맞았다는 점이다.

들고 있던 시계와 공구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상하다.

이거 아무래도 꿈의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지난번 천문학자도 그렇고.

그동안 꿨던 꿈들.

단순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분명 뭔가가 있는데….

꿈에 대한 것들을 기록이라도 해야 하나?

근데 또 그럴 필요가 없는 게, 지난번에 꿨던 꿈들.

특히 배역과 관련된 꿈들은 단 한순간도 잊히지 않고 전부 생생하게 기억했다.

마치 겪은 것처럼.

대체 뭘까…?

***

다음 날.

대본은 어느 정도 숙지를 한 상태라, 이제는 극 중 배경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완벽하게 드라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지.

특히나 이런 시대극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연도이기에,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연습하고 있는 배역은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일까?

어떤 표정과 말투를 구사해야 조금 더 현실감이 있어 보일까?

배우란 그 배역에 녹아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를 해야 한다.

그 시절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레 피어오르는 기억.

바로 그날 꿨던 꿈이다.

꿈을 꾼 지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자료를 볼 때마다 꿈에서의 기억이 점점 더 선명하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무희로 나왔던 송유나의 얼굴이 기억 속에서 가시지를 않았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냉수 한 사발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자료 조사.

인터넷을 통해 작품과 관련된 내용들을 검색하다 발견한 한 블로그.

바로 ‘시계공과 무희’ 작품을 만든 작가의 블로그였다.

그녀는 작품을 집필하며 조사한 자료들을 자신의 블로그에 아주 세세하게 기록해둔 듯했다.

작가다운 필력.

그녀의 글이 주는 힘에 이끌려 나는 노트북이 뜨거워지도록 쉬지 않고 살펴보았다.

그렇게 블로그의 페이지가 쉴 새 없이 넘어갔고.

‘참고용 사진’이라는 게시 글을 찾았다.

그 글에는 수십 장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고, 일제 강점기 시대의 사진도 몇 장 포함되어 있었다.

‘와, 이런 사진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스크롤은 빠르게 내려갔고, 이내 마지막 몇 장을 남겨두고 있었다.

극 중 시대상 배경이 되는 일제 강점기 때의 사진.

침을 꿀꺽 삼키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사진을 하나씩 보던 중.

그러다 마지막 사진을 본 순간, 마우스에서 손을 떼어내고 말았다.

동시에 내 미간은 잔뜩 찌푸려진 채였다.

그러다 모니터에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잠깐만….

말도 안 돼.

저 사람… 나랑 똑같이 생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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