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5 – 꿈속에서 본 그녀 (3)
딩동.
초인종이 울리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김 실장.
“딱 맞게 왔네. 드라마 시작하고 나서 초인종 울렸으면 흐름 끊길 뻔했잖아.”
“하하, 그러게. 나이스 타이밍이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말했다.
“형, 문 앞의 치킨은 내가 들고 올게.”
“그럴래? 그럼 내가 잔이랑 세팅할게.”
“응.”
문 앞에 놓인 치킨 봉지.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튀김 냄새에 입꼬리가 휘어졌다.
‘별을 보지 않아’ 단막극이 방영하는 날.
김 실장이 담당하는 연예인의 첫 주연 드라마.
즉, 내 인생 첫 주연 드라마를 모니터링하는 날이다.
그 어느 것 하나 입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긴장과 설렘으로 행복이 가득할 텐데.
여기에 치킨까지 더해지다니!
벌써 환상 궁합이다.
“와! 치킨 냄새 죽인다. 드라마 광고할 때 얼른 좀 먹자.”
김 실장이 유리컵에 콜라를 따라 부으며 말을 이어갔다.
“시작되고 나면 집중하느라 먹을 시간도 없을 거야. 지금 콜라랑 좀 먹고, 드라마 끝나면 맥주 마시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치킨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십 분 정도 치킨을 흡입했다.
몇 개의 치킨 조각만 남고 포장 바닥이 보일 때쯤, 웅장한 BGM과 함께 드라마가 시작됐다.
“희성아, 시작한다.”
“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들고 있던 치킨과 콜라를 내려놓으며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집중했다.
드라마가 시작한 지 몇 분이 지나고.
장면이 전환되자,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야, 저 부분, 연기 진짜 잘한 거 같아.”
그가 말하는 장면이 생생히 기억나기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 수업하는 장면?”
“응, 이번에는 이상하게 사랑 감정 연기 같은 거보다 교수로 수업하는 연기가 찐이었어.”
“하하, 교수님 역할이 나랑 잘 맞았나?”
“그러게. 특히 그 사랑을 만유인력에 빗대어서 말하는 수업 신 있잖아.”
김 실장은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진 채 말을 이어 붙였다.
“거기서부터 뒤에 쭉 애드리브 맞지?”
“맞아. 아마 곧 나올걸?”
같은 장면을 떠올린 우리는 다시 시선을 모니터로 옮겼다.
이내 김 실장은 손뼉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 장면 나온다!”
화면 속의 나는 우수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중력을 가진 모든 물체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사람을 서로 끌어당기는 사랑 또한 이 중력의 일종이라고 보거든요.
-선생님은 그 중력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내 말에 한소정이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둘의 눈빛에서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원래는 저기가 대사 끝이잖아?”
김 실장은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게 물었다.
“맞아. 대본은 저기까지였지.”
그때, TV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
-있습니다.
내 애드리브.
사전에 협의가 안 된 애드리브였기에 NG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저 당시 박 감독은 흐름을 끊지 않았다.
상대역인 한소정 또한 내 대사에 놀라지 않고 받아쳤다.
-정말요?
-네.
-언제요?
화면 속에 잡힌 진중하고 단호한 내 얼굴.
그리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궁금증을 가득 품은 채 한소정이 물었다.
-한… 560년 정도 된 거 같네요.
-하하하.
눈썹을 치켜세우며 의미심장한 얼굴로 대답하는 나.
이내 학생 역할을 맡은 수십 명의 단역 배우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소정만이 웃지 않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고.
카메라는 이내 단상 앞에 서 있는 내 얼굴로 클로즈업되며 화면이 전환됐다.
“크으.”
김 실장은 탄성을 지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근데 저건 준비한 거야?”
“아니, 그냥 나도 모르게 떠올랐어.”
“그래?”
그는 아랫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구체적이길래 뭔가 했네.”
연기를 할 당시에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560년이 튀어나왔다.
이유는 그때도,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그 말을 내뱉은 걸 회상하며 깊은 생각에 잠길 때.
김 실장이 큰 소리로 외치며 휴대 전화를 내게 내밀었다.
“와! 실시간 반응 좀 봐. 이 정도면 괜찮은데?”
-뭔가 진짜 풀어서 설명해주는 거 같음.
-이 정도면 ㄹㅇ교수 아님?
-└ 진짜 교수면 이해 못 했지.
-└ 아ㅋㅋ 맞네ㅋㅋ
-근데 남주 좀 괜찮게 생긴 듯?
-가끔씩 리얼하게 썰 푸는 거 같음ㅋㅋ
-여자 눈빛 아련함. 청순한데, 쟤는 누구냐?
-남주랑 여주 케미 좀 잘 맞네.
-KTS 스페셜 스토리는 좀 참신한 게 맞은 듯.
-남자 이름 찾아보니까, 진희성? 이라는데, 처음 봄.
-교수님이 저렇게 잘생겼으면, 나 자체 휴강 안 했다ㅋㅋ
-└ 나도ㅋㅋ 맨 앞자리 앉아서 학점 잘 맞았을 듯
드라마가 방영되는 내내 실시간 댓글이 쉴 새 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댓글을 하나하나 읽어보며, 내 입꼬리는 자연스레 위로 휘었다.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 전화를 열어 ‘별을 보지 않아’를 검색했다.
자판을 치는 내내 요동치는 심장.
화면이 뜨고,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숫자.
시청률 1.3%.
딱 무난한 수치였다.
1화짜리의 단막극 드라마치고 쪽박도, 대박도 아닌 무난한 성적이었다.
이 정도면 필모로 쓰기에도 딱 제격이지.
우선 1%는 넘겼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첫 주연으로 출연한 작품이 평소 단막극 시청률보다 적게 나왔다면,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들었을 테니까.
홀가분한 마음으로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출근 준비에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어, 희성아. 시청률 봤어?”
“당연하지. 1.3%.”
내 말에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이미 시청률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잘했다.”
“내가 잘한 건 아니지. 하하.”
김 실장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근데 박 감독 나간다더라?”
“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직한다더라고. 뭐, 아직 확실하지는 않고.”
“이직이면… 다른 방송사로 옮기는 거겠네?”
“그거까지는 모르겠어. 아무튼, 이번 드라마가 KTS에서 마지막 작품이었나 봐.”
나는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답했다.
“아쉽다. 박 감독님이랑 잘 맞았던 것 같은데.”
“그래도 아예 그만두는 게 아니라 이직이니까. 일하다 보면 언젠가 이 업계에서 마주칠 거야.”
“그러면 좋겠는데.”
김 실장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간이 안부 인사라도 드려.”
“응, 그럴게.”
그러고는 회의실로 걸어 들어가다 다시 내게 말했다.
“그나저나 다음 작품, 바로 들어가야지.”
“어, 안 그래도 오늘 형한테 말하려고 했어.”
그러자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 좋은 작품이라도 봤어?”
“시계공과 무희.”
김 실장이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하더니, 이내 손가락을 튕기며 답했다.
“아, 그 일제 강점기 배경 시대극?”
“응, 그거 맞아.”
“그거 오디션 날짜 나온 것 같던데.”
“정말?”
“어, 잠깐만.”
그는 휴대 전화의 스케줄을 확인하며 말을 이어갔다.
“어디 보자… 2주 뒤네.”
“2주면 여유 있는 편이네?”
“아니야. 지정 연기가 6개나 돼.”
김 실장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휘휘 넘기며 답했다.
“와, 6개나? 자유 연기는 안 되는 거야?”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자유 연기는 안 돼.”
“응, 그럼 오늘부터 바로 연습을 시작해야겠다.”
“하루는 쉬었다가 내일부터 해도 돼.”
김 실장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아니야. 어차피 오늘 일정 없으니까 바로 연습 시작할게.”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못 말린다, 진짜.”
***
째깍째깍.
사방에서 울리는 초침 소리.
수많은 시계가 시간이 가고 있음을 소리 지르듯 외치고 있지만.
나는 내 눈앞에 놓인 고장 난 회중시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태엽이 문제였네….”
하루 내내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혼잣말은 이제 예삿일도 아니다.
아주 작은 수리 기구를 손에 들고 돋보기를 낀 채 고치던 중.
“어이!”
큰 외침에 놀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소리를 지르는 저 사람.
바로 내가 다니는 시계 공방의 주인이자, 시계 장인이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내게 손만 까딱였고, 재빨리 그의 자리로 달려갔다.
“자네, 지금 수리하고 있는 회중시계 언제까지 할 건가?”
“방금 고장 난 부분을 찾았습니다.”
그는 내 말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종일 잡고 있겠다는 건가? 서두르게. 다음 작업도 생각해야 할 거 아닌가!”
“예, 그러겠습니다.”
나는 허리를 수그리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시계 장인 밑에서 일을 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실력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시계 장인의 말에 고개를 숙이는 것뿐이었다.
일을 마칠 무렵까지 애를 써서, 결국 회중시계를 모두 수리했다.
고된 육체와 정신을 떨쳐버리기 위해.
오늘도 한잔을 걸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힘들 때면 훌훌 털어버리기 위해 가는 단골집.
끼이익.
오래된 나무 문을 열자, 외부와 다를 것 없이 어두운 가게 안.
캄캄한 내부에는 여러 개로 나뉜 자리가 가득했고, 자리마다 붉은 불빛의 등이 비추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그렇듯, 늘 앉는 자리로 걸어갔다.
벽 쪽에 있는 가장 앞줄.
착석하자마자 한 잔의 술이 나왔다.
한 모금을 들이켜자 하루의 힘듦이 식도를 통해 넘어가는 듯했다.
크으.
“이야기 들어보니, 어제도 기가 막혔다면서요?”
“하하하, 말도 마라. 어제 어떻게 된 건 줄 아냐.”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옆자리.
하나같이 중절모를 쓰고, 옷을 빼입은 사람들이었다.
워낙 시끄러운 탓에 홀로 있던 내 귀는 그들의 목소리에 집중됐다.
“어제 형님이….”
순간 그들의 대화가 끊겼다.
그리고 남자들이 몸을 돌려 무대를 바라보았다.
탁.
무대 위를 비추는 조명이 밝혀졌고.
사뿐한 걸음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여성.
술집 안의 모든 시선이 그 여성만을 바라보았다.
이내 무대 가운데에 선 그녀는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맡겼다.
춤을 추는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순간 심장이 튀어나올 듯 뛰기 시작했다.
쿵쿵.
무희, 그녀의 발자국에 맞춰 뛰는 내 심장 소리.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아름답다.
이 외의 어떤 말로 그녀를 형용할 수는 없었다.
넋을 놓은 채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무대가 끝나자마자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
내 말에 고개를 돌리는 그녀.
침을 한 번 삼켜낸 뒤, 그녀와 눈을 맞췄다.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