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7)화 (17/303)

17화 #4 – 꿈에서 본 그녀 (2)

기다리던 첫 촬영 날.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연습에 매진했기에, 긴장되기보다는 설레는 마음이 더 컸다.

오디션 이후로 오랜만에 받는 풀 메이크업.

꽃단장을 마치고 현장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라탔다.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하니까, 희성이 더 잘생겼네.”

“하하, 이렇게 옷까지 차려입으니까 빨리 촬영하고 싶어.”

“대학교수 배역이라 오늘 입은 옷부터 다른 신 옷들도 전부 멋있던데, 드라마 정말 기대된다.”

“나도.”

“얼른 가보자. 그럼 출발할게!”

차는 현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김 실장은 차에 오래 있어야 하는 나를 위해 커피와 물, 그리고 간식거리를 준비해 두었다.

더불어 목 베개와 담요까지.

역시 매니저로서 꼼꼼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아! 형, 저번에 회사에서 내가 봤다던 최서….”

김 실장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어, 최서빈 말하는 거지?”

“응, 그분 어떻게 됐어? 우리 회사로 오려는 것 같던데.”

“아쉽게도 WG 엔터로 갔다더라.”

나도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터져 나왔다.

“아… 그래?”

“아무래도 WG 엔터에 배우들이 좀 짱짱하기는 하잖아.”

“조금 아쉽네. 우리 회사로 오면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거든.”

내 말에 김 실장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은 소속사라도 얼굴이나 알면 다행일걸? 희성이 너,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들도 아직 얼굴 다 못 봤지?”

김 실장의 말이 맞다.

회사에 거의 매일같이 출근하고, 하루 내내 상주하고 있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소속 연예인을 본 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나마 소속 연예인 중 조연급만 몇 번 봤을 뿐, 메인 주연급이나 톱스타급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네. 우리 회사 연예인들이랑도 아직 친하지 않은데.”

“맞아. 다들 바빠서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어. 특히나 최서빈같이 유명한 사람은 들어오더라도 더더욱 회사에서 볼 일이 없을걸?”

“그래도 아쉽긴 하네.”

김 실장은 대화의 흐름을 바꾸며,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컨디션은 좀 어때? 첫 촬영이잖아.”

“좋아. 근데 우리 촬영 기간은 얼마나 돼?”

그는 눈을 빠르게 굴리며 답했다.

“단막극은 1시간짜리라서 그리 길지는 않아. 뭐, 해봤자 일주일 내외?”

“엄청 짧네?”

“근데 이 드라마는 촬영 장소가 거의 캠퍼스라서 빠르면 나흘이나 닷새 정도 안에 끝날지도 몰라.”

“순식간에 촬영이 끝나겠네.”

“그럴 거야. 정신없이 연기하다 보면 끝나 있을걸?”

한 시간을 넘게 달리던 차 안.

정적을 깨고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맞다. 희성아, 우리 촬영 다 끝나면 전체 회식 있다. 알고 있어.”

“응, 근데 이렇게 일주일 촬영이면 중간중간에도 회식이 있나?”

“보통 미니시리즈 같은 경우에는 지방 촬영 갈 때면, 감독님이나 주연이 술을 좋아한다? 그러면 매일같이 회식하기도 해.”

“매일?”

“응, 그에 반해 극히 안 하는 경우도 많고.”

“진짜 케이스 바이 케이스구나.”

“맞아.”

김 실장은 재차 말을 이었다.

“근데 우리는 단막극이고, 금방 끝나니까 촬영 끝날 때까지는 참는다고 하더라. 그나마 좀 편하지.”

“다행이네.”

***

“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배우분들 스탠바이해 주세요!”

조감독의 말에 진희성과 한소정은 현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박 감독은 카메라 옆 의자에 앉아 메가폰을 잡고 외쳤다.

“소정 씨가 옆으로 조금만 더 움직여줘요.”

그의 말에 한소정은 굳은 얼굴로 한 발짝 움직였다.

“좋아, 그럼 가볼게요. 레디, 액션!”

카메라가 돌자마자 한소정은 수줍은 얼굴로 단번에 표정을 바꿨다.

그러고는 금세 발그레해진 볼로 빈 강당에서 한 계단씩 천천히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진희성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소정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강단의 서류를 정리했다.

“저… 교수님.”

한소정의 떨리는 목소리.

긴장을 해서 떠는 것이 아닌, 배역에 충실한 떨림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진희성의 눈빛.

카메라가 줌인이 되며 그의 눈빛과 표정을 잡았다.

진희성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한소정을 바라보았다.

“수업은 끝났고, 질문은 다음 시간에 해야 할 것 같은데요. 학생?”

진희성의 단호한 얼굴.

카메라는 천천히 내려가 그의 손을 앵글에 잡았고.

진희성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정리하며, 교수의 내면까지 몰입하고 있었다.

“이렇게 안 오면 교수님이랑 이야기할 기회가 없잖아요. 저랑 언제 만나….”

순간 진희성의 표정은 차갑게 얼어붙었고, 한소정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수지야. 우리는 수업 시간 외에 만날 수 없어.”

단호하고 쌀쌀한 진희성의 말에 현장의 스태프들조차 숨이 멎는 듯했다.

그저 카메라의 빨간 불빛만 세차게 돌아가고 있을 뿐.

“몇 번을 찾아온다고 해도 우리가 달라질 수 있는 건 없어, 하나도.”

진희성의 떨리는 목소리.

그녀를 밀어내지만, 그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떨어지는 한소정의 눈물.

“교수님, 왜요? 왜…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데, 왜….”

진희성은 그녀의 눈물에 무심하게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그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꽉 깨물었고.

그 찰나의 포인트 연기를 보며 박 감독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컷!”

박 감독의 목소리에 한소정은 눈물을 뚝 그쳤다.

“고생했어요.”

진희성은 한소정에게 말을 건넸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와, 희성 씨, 소정 씨 연기 좋았어요.”

박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향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희성 씨는 손 떠는 거까지 연습한 거야?”

진희성은 박 감독의 칭찬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주인공이었다면 이런 마음이지 않을까 싶어서요.”

반은 연기였고, 반은 몰입해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와! 대단해. 마지막에 입술 깨무는 연기도 너무 좋았어.”

“하하,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감사해야지. 역시 희성 씨를 주연으로 캐스팅하길 잘했다니까?”

박 감독의 말에 진희성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극찬이십니다, 감독님.”

“다음 연기도 방금처럼만 해주면 되겠는데?”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

“컷! 조금 쉬었다가 다음 신 들어갈게요.”

“네,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스태프와 상대 배역에게 인사한 뒤, 카메라 밖으로 빠져나왔다.

컷 소리와 함께 표정이 확 변하는 한소정.

오늘 그녀를 보며 수없이 드는 생각이 있었다.

상당한 연기력.

늘 차디찬 그녀였기에, 슛만 들어가면 변하는 목소리와 표정을 보며 몇 번이고 입을 떡 벌렸다.

더불어 그녀의 연기를 볼 때마다 자꾸만 꿈에서 봤던 그 모습이 겹쳐졌다.

한없이 발랄하고 순수해 보이던 꿈속의 그녀.

한소정의 연기로 인해, 자꾸만 꿈속에서 보았던 그녀가 떠올랐다.

내 앞쪽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는 한소정에게 시선이 고정되었고.

한소정의 얼굴에서 꿈속 그녀의 모습이 잔상처럼 겹쳐졌다.

순간 고개를 돌리던 한소정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왜요?”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네?”

“아니, 자꾸 저를 쳐다보시길래요.”

나는 양손을 뻗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니에요.”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눈을 흘기며 자리를 옮겼다.

한소정… 차가운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까칠하네.

“희성아.”

내 어깨를 두드리며 부르는 김 실장.

“어, 형.”

“여기 물 마셔.”

조금 전 내가 목을 푸는 소리를 듣고 물을 챙겨온 모양이다.

“고마워.”

“근데 뭐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 실장이 재차 물었다.

“방금 한소정 씨, 왜 갑자기 저렇게 가는 거야?”

“아… 별거 아니야.”

물을 한 모금 먹으며 슬쩍 물었다.

“근데 소정 씨는 매일 혼자 있네?”

주변을 둘러보아도 혼자 있는 이는 그녀뿐이었다.

그에 반해 다른 배우들은 그들끼리 붙어서 사담을 나누거나, 스태프 혹은 박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기에 바빴다.

지금뿐만이 아니었다.

평소 촬영 휴식을 하거나 자신의 신이 없을 때에도 이런 광경은 마찬가지였지.

내 의아함에도 김 실장이 어깨를 들었다 내리며 답했다.

“그게 왜?”

“아니, 다른 배우들은 여기저기 붙어서 대화도 하는데 소정 씨는 항상 혼자 있길래.”

“사교성이 부족한 게 아닐까?”

김 실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

“배우들을 보다보면 저런 성격이 진짜 많아.”

“그래?”

“어, 아이돌이면 좀 선배들한테 인사도 하고 살가워야 하는데, 배우들은 그나마 좀 낫긴 하니까. 물론 덜하다 뿐이지, 여기도 체계는 확실해. 알지?”

“당연하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소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한쪽 구석에 서서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

“자, 찍겠습니다. 하나, 둘 셋!”

“별을 보지 않아, 파이팅!”

찰칵.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와아! 벌써 끝이라니, 고생하셨어요.”

마지막 단체 사진을 끝으로 내 인생 첫 번째 주연 드라마가 끝이 났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눈물을 흘리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있었다.

우리는 아쉬운 표정으로 서로를 안으며 현장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희성 씨도 회식 가는 거지?”

촬영하며 가까워진 박 감독이 내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당연하죠. 오늘 감독님이랑 진하게 한잔해야죠.”

“좋지.”

박 감독은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듣도록 소리쳤다.

“오늘 한 명도 빠지는 사람 없지?”

“예, 없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그렇게 ‘별을 보지 않아’의 촬영은 막을 내렸다.

약 한 시간 뒤.

스태프에 이어 우리 출연진들까지 전부 근처의 식당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한소정을 포함해 빠진 사람 없이 모든 배우가 참석했다.

“자, 첫 잔은 원샷인 거 아시죠?”

이번 드라마의 막내인 백승현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잔을 채웠다.

“‘별을 보지 않아’ 대박을 기원하며, 위하여!”

“위하여!”

박 감독의 선창에 식당이 떠나갈 듯 소리치며 술을 입에 털어 마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불판의 고기가 슬슬 비워져 갔고.

테이블 위에는 술병들이 쌓여갔다.

몇 병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소주와 맥주 빈 병들이 빼곡하게 채워지고 있는 상태.

박 감독은 거나하게 술이 올라 먼저 숙소로 돌아갔고.

스태프와 몇몇 배우들도 차례로 회식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내 옆에는 백승현.

맞은편에는 한소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소정 씨도, 그리고 희성이 형도.”

“너도 고생 많았어, 승현아.”

백승현은 터질 듯한 얼굴로 헤실거렸다.

“다음에 또 같이 연기하고 싶어요.”

“그러게. 다음에 다른 작품에서 다들 보면 좋겠다.”

내 말에 백승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소정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정 씨는 이제 뭐 할 거예요?”

그의 말에 한소정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답했다.

“오디션 봐야죠.”

백승현이 몸을 흔들거리며 되물었다.

“무슨 오디션이요?”

“드라마요.”

그럼에도 돌아오는 짧은 대답.

백승현은 입술을 샐쭉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무슨 드라마요. 길게 좀 대답해주면 안 돼요?”

그의 말에 한소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백승현을 쏘아보았다.

뭘 그렇게 구체적으로 물어보냐는 듯한 얼굴.

하지만 그녀는 그런 걸 따지는 것도 귀찮다는 듯 순순하게 대답했다.

“시계공과 무희요.”

드라마 이름에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외쳤다.

“어? 저도 시계공과 무희 대본 봤어요. 그거 대본 괜찮던데.”

내 말에 놀란 듯 세상 무관심하던 한소정의 눈썹이 미묘하게 들썩이더니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거 보셨어요?”

내게 묻는 그녀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피어올라 있었다.

회식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으로 활기에 찬 듯한 모습이었다.

“네, 어지간한 대본은 다 봤는데, 거기서 주인공 말고 조연이 여자와 마주치는 신. 그 비 오는 날 시계가 떨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소정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말했다.

“시계가 떨어지면서 깨지는 신이요?”

“어, 맞아요!”

“저도 그 장면이 너무 좋았어요. 그거 오디션 보실 거예요?”

그제야 그녀의 입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보고 싶기는 한데… 제가 필모가 부족해서 될지는 모르겠어요.”

어느 순간 내 쪽 테이블 가까이로 몸을 당겨 앉은 그녀.

반짝이며 생기가 있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한번 봐요. 그 감독님, 주연 외에는 필모를 아예 안 보고 뽑는다고 했거든요.”

“정말요?”

“네, 주연은 투자사에서의 입김이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조연은 직접 뽑는다고 그러더라고요.”

“소정 씨도 오디션 보신다는 거죠?”

“예, 조만간 오디션 날짜 나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거든요.”

어느 순간 테이블은 우리 둘의 대화로 가득 찼고.

그 틈을 비집고 옆에 있던 배우가 입을 열었다.

“이번 드라마도 둘이 주연이었는데, 다음 드라마도 같이하면 좋겠네.”

백승현은 기다렸다는 듯.

“그럼 기념으로 우리 짠할까요?”

술잔을 높이 들며 외쳤다.

“건배!”

나는 피식 웃으며 잔을 들었고.

한소정도 이내 온화한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