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9)화 (9/303)

9화 #2 – 예상치 못했던 (5)

“꺄아아아아아악!”

송유나는 부서지는 돌을 피하려다 그대로 몸이 기울어졌고, 결국 중심을 잃고 말았다.

그런 송유나를 보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지는 진희성.

턱!

진희성의 몸 절반 가까이가 절벽으로 떨어질 듯 바깥으로 나갔다.

절벽 아래로 늘어뜨린 그의 손에는 가느다란 송유나의 팔목이 잡혀 있었다.

송유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핏줄이 터질 듯 새빨개진 얼굴로 자신의 팔목을 붙잡고 있는 진희성이 있었다.

“아….”

송유나는 순간 자신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외마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으윽… 조심히. 가만히 있어요. 괜찮아요.”

진희성은 그 와중에도 자신의 배역인 호위무사처럼 송유나를 보호하고 진정시키려 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송유나는 침을 한번 삼킨 채 조용히 진희성만을 바라보았다.

스태프들은 당황한 듯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고, 진희성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섬광이 지나갔다.

‘저하를 살려야 한다… 저하를 지키기 위해 다가오는 적진의 목을 단숨에 베었던 그 순간처럼….’

그와 동시에 진희성에게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났다.

한 손은 절벽 위의 땅을 짚어 지탱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손만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그녀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상반신의 일부가 절벽 아래로 내려가 있던 진희성의 몸이 위로 천천히 올라올 때쯤, 스태프들이 우르르 다가가 진희성의 몸을 함께 잡아당겼다.

“뭐 해, 빨리 다들 붙어!”

“유나 씨! 손 붙잡아요, 여기!”

스태프들과 주변 단역 배우들이 소리치며 진희성과 송유나를 절벽 위로 끌어 올렸다.

“유나야! 괜찮아?”

저 멀리서 그녀의 매니저인 최 실장이 달려오며 외쳤다.

현장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뒤에 떨어져 있던 탓에 이제야 상황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최 실장을 발견한 송유나는 눈물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치마가 너무 길다고 했잖아! 이딴 옷을 입으니까 걸려서 넘어진 거 아니야! 나 죽으면 책임질 거야?”

송유나의 스타일리스트는 서둘러 담요로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이렇게 위험한데 안전장치 하나 없이 하시면….”

최 실장이 바로 옆 스태프를 향해 항의하려고 하자, 김 감독이 송유나 곁으로 다가왔다.

“유나 씨, 괜찮아?”

워낙 상황이 상황인지라 감독도 뭐라 못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모르겠어요.”

다행히도 다른 곳은 크게 다치지 않았는지, 진희성이 붙잡고 있던 자신의 손목만을 어루만졌다.

“여기 의료팀 어디 있어! 빨리 불러와!”

김 감독의 외침에 스태프들은 일사불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최 실장이 송유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유나야, 여기 위험하니까 우선 차 쪽으로 이동해서 아픈 데는 없는지 확인부터 하자.”

그의 말에 송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진희성을 향해 있었다.

송유나의 입은 할 말이 있다는 듯 움찔거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못 한 채 조용히 자리를 벗어날 뿐이었다.

그녀를 따라 스태프들이 이동한 뒤.

진희성의 곁에 있던 단역 배우와 일부 스태프들이 웅성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희성 씨는 몸은 이렇게 호리호리한데 대체 무슨 힘으로 유나 씨를 올린 거지?”

“그러게요. 아무리 여자라지만, 한 손으로 성인을 올리는 게 말이 되는 건가?”

“그것보다도 저는 순간 진희성 씨가 번개 같은 속도로 몸을 날려서 송유나 씨를 잡은 게 더 신기한 것 같아요.”

“희성 씨, 괜찮아?”

그들의 웅성거림에도 진희성은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그 역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자신이 붙잡았던 송유나를 놓치지 않고 지켜냈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만을 내쉴 뿐.

‘뭐지, 아까 절벽에서 갑자기 떠올랐던 그 장면. 예전에 꿈에서 봤던 것 같은데…?’

***

한두 시간이 지나면 곧 아침이 밝아올 이른 새벽.

해가 뜨기 전, 하루 중 가장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이 찾아왔다.

그리고 이제야 모든 촬영이 끝났다.

다시 이 절벽에 와서 재촬영을 하기는 힘들다는 이유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성공적으로 모든 신을 마무리했다.

오늘의 촬영과 함께 내 역할마저 마무리가 지어졌다.

지난번 촬영 때 목숨을 잃었지만, 작가의 힘으로 호위무사는 극적으로 살아났지.

덕분에 임팩트가 있는 호위무사 신을 추가로 촬영할 수 있었다.

이후 결국 죽는 장면으로 내 역할은 끝이 났다.

그 장면 역시 공주를 위해 목숨을 잃는 호위무사로, 강한 인상을 남길 것 같았다.

작가가 직접 내 역할을 끝냈기에, 내가 다시 살아날 일은 없을 터.

비로소 ‘황꽃’에서의 마지막 촬영이 정말 끝이 난 것이다.

저번 촬영이 마지막이었다고 생각해 김 감독과 깊은 작별 인사를 나누었던 터라, 오늘 역시 그날처럼 작별 인사를 하기는 민망했기에, 덤덤한 표정으로 김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어, 희성 씨. 오늘 고생 많았어.”

김 감독은 내게 먼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제가 뭘요, 감독님이 고생하셨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오늘 희성 씨 덕분에 큰 사고를 면했어. 진짜 다행이야.”

“아닙니다.”

“또 보자고. 꼭.”

그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예, 꼭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서울 조심히 가고.”

“네.”

이후 캐스팅 디렉터와 남은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한 뒤.

서울로 가는 단역 배우 버스로 걸어갔다.

깜깜한 강원도의 산길.

이제 이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 다시 일상을 살게 되겠지.

할 일 없이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잠시나마 행복한 드라마 촬영이었다.

항상 구박만 받던 내게 연기가 무엇인지, 연기로 인해 내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뜻깊은 기간이었다.

버스를 타고 돌아가기가 싫었지만, 이제 또 다른 드라마, 영화를 위해 달릴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저… 희성 씨!”

버스 문 앞에 선 순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발길을 멈춰 세웠다.

“네?”

“잠시 저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으실까요?”

내게 급하게 달려온 사람.

누구더라?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는 곧장 내게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저는 송유나 매니저, 최태민 실장이라고 합니다.”

“아, 네.”

나는 그가 건네는 명함을 받으며 답했다.

“오늘 일 고마워서, 보답을 좀 하고 싶어서요.”

환한 미소로 내게 말하는 최 실장에게 나는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어우,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당연한 일이라니요. 희성 씨한테도 위험한 순간이었어요. 게다가 제가 매니저로서 마음이 안 편해서 그래요. 회사에서도 알면 가만히 안 있을 거고.”

그가 말끝을 흐렸고, 나는 재차 되물었다.

“네?”

“좋은 의미로요!”

“아, 네.”

“그리고 그….”

최 실장이 내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며 데시벨을 낮춰 말을 이어 붙였다.

“서울 오면 연락해요.”

“아닙니다. 정말 보답은….”

재차 하는 거절에 최 실장은 입꼬리를 올려 선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답도 하고 싶고, 일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요.”

“…예?”

“오빠! 출발 안 할 거야?”

저 멀리 보이는 송유나가 최 실장을 향해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갈게!”

최 실장은 큰 소리로 송유나에게 답한 뒤,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가봐야 해서요.”

“네, 얼른 가보세요.”

나와 눈을 맞춘 최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꼭 연락해요.”

그러고는 곧장 송유나가 타고 있는 차로 달려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시동이 걸려 있던 탓인지, 최 실장이 차에 오르자마자 밴은 촬영장을 떠나갔다.

나는 떠나는 밴을 멍하니 바라본 후, 이내 시선을 손에 쥐어진 명함으로 옮겨왔다.

보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 이야기라….

일 이야기라면, 설마…?

***

“출발할게?”

최 실장은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며 송유나에게 물었다.

“어, 피곤해. 빨리 서울 갈래.”

“알겠어, 얼른 가자. 오늘 고생했다, 유나야.”

최 실장은 그 말을 끝으로 액셀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그는 곧장 사이드미러를 통해 비치는 진희성을 바라보았다.

‘내가 준 명함을 보고 있는 건가? 연락이 와야 할 텐데….’

“오빠! 오빠, 안 들려?”

“어?”

진희성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최 실장은 송유나에게 또다시 한 소리를 듣고 말았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바로 대답을 안 해?”

“미안.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왜?”

평소라면 넘어갔을 송유나지만, 생사를 오가는 힘든 일을 겪은 그녀였기에 한껏 예민해 있었다.

“아까 뭐야?”

“뭐라니?”

“아까 그 남자애한테 명함 준 거 말이야.”

진희성에게 명함을 준 장면을 송유나가 봤다는 사실에 최 실장은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보답해야지.”

“보답? 아까 보니까, 오빠가 가서 감사 인사도 했잖아. 그거면 됐지 명함까지 줘야 해?”

“에이, 그래도 네 목숨을 구해준 건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잖아.”

송유나는 자신의 빨개진 손목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거 뭐, 다시 보니까 낭떠러지가 별로 높지도 않더구만.”

그녀의 말을 못 들었는지 최 실장은 곧장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연기도 좀 괜찮은 것 같아서.”

“뭐…?”

“아니, 감독님도 그렇게 말하시고, 실제로 현장에서도 잘하잖아. 솔직히 괜찮다고 생각해.”

송유나는 최 실장의 말에 발끈한 듯 바라보던 자신의 손목을 내려놓으며 외쳤다.

“아니, 그 연기도 못하는… 그래. 그 밤톨같이 생겨가지고!”

“유나야, 근데 이번에 우리 2팀 분위기 안 좋잖아.”

“…….”

최 실장의 말에 송유나는 급격히 입을 다물었다.

“최근에 우리 간판이었던 김하나를 포함해서 나름대로 인지도 있는 한별이, 준기까지 나가서 새로운 배우를 충원해야 하는 거 알잖아.”

“…그래서 계약하겠다고?”

“한번 이야기만 해보려는 거지.”

“오빠가 직접?”

“아니, 나는 팀장님한테 이야기해서 영상 한번 봐보고 괜찮다고 하면 계약하는 거지.”

송유나는 심기가 불편해진 듯 팔짱을 끼며 고개를 창가로 돌려버렸다.

“아이, 유나야. 회사 사정도 이해해줘라. 오늘 보니까 연기 잘하더만.”

“진짜 마음에 안 드는데… 오늘.”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눈동자를 아래로 떨어트려 발갛게 자국이 나 있는 손목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 손목을 어루만지며 작게 읊조렸다.

“뭐… 계약하게 되면 알려주기나 해.”

“그래, 알았어. 피곤할 텐데 좀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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