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8)화 (8/303)

8화 #2 – 예상치 못했던 (4)

한참을 가던 버스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듯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로 가길래 길이 이렇게나 험난하지?

버스에 몸을 기대어 잠을 청하던 단역 배우들은 흔들림에 하나둘 깨어나고 있었다.

닫아둔 커튼을 살짝 열고 밖을 바라보니, 온통 흙과 나무로 가득한 이곳.

달리는 버스 바퀴로 인해 흙먼지 바람이 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것도 없는 산골짜기로 올라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끼이익.

어느 순간 멈춰 선 버스.

“도착입니다. 내리세요.”

중저음의 무뚝뚝한 목소리를 가진 버스 기사.

그의 말과 동시에 우리는 버스에서 일제히 내리기 시작했다.

평소에 왔던 촬영장과는 다른 장소.

서울에서 무려 꼬박 3시간 40분을 달려온 장소는 바로 강원도였다.

정확히 어느 지역인지조차 단번에 알 수 없는 이곳은 말 그대로 산골짜기다.

주변에 사람이 살 만한 인가조차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장소를 찾았나 싶을 정도로 험준한 산골.

한 번이라도 발을 잘못 내디디면 곧장 떨어질 것만 같은 낭떠러지도 눈에 들어왔다.

놀란 얼굴로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촬영 스태프를 제외하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무와 커다란 돌들뿐이었다.

다른 단역 배우들도 주변을 살펴보더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희성 씨!”

그런 나를 향해 반갑게 다가오는 사람.

바로 현장에서 늘 나에게 먼저 인사해 주는 단역 배우였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반가워요. 근데 오늘 촬영 장난 아니래요. 스턴트맨도 오고 그러던데?”

그의 말에 한쪽을 바라보니, 몸집이 좋고 날렵하게 생긴 무리가 있었다.

“그렇구나. 근데 그….”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설마, 제 이름 몰라요?”

사실 그의 이름을 들었던 적이 없었다.

아니, 내가 물은 적도 없었지.

단역 배우는 현장에서 한번 마주치고 재차 만나게 일이 드물다.

한 신만 찍고 사라지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니까.

그렇기에 굳이 첫날 그와 통성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죄송해요. 제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괜찮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곧장 입을 열었다.

“저는 장근우라고 해요.”

나는 그에게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장근우 씨, 꼭 기억하겠습니다.”

“예, 이번에는 기억해 주세요. 하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우리는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그렇게 웃던 장근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희성 씨, 근데 오늘 아무래도 몸을 좀 사려야 할 것 같아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현장 분위기며, 스턴트맨까지. 아무래도 오늘 촬영이 꽤 위험할 것 같은데요?”

“그러게요. 칼싸움하는 장면이 있던데, 그 부분 때문에 스턴트 배우님들이 오시지 않을까 싶네요.”

“맞아요. 게다가 우리는 케어해줄 매니저도 없으니, 더더욱 조심해야 해요. 하루 연기하고 사라질 수는 없잖아요.”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격하게 공감하는 바니까.

우리같이 매니저가 없는 단역 배우는 몸을 다쳐서는 큰일 난다.

주연 배우들이야 다친다고 한들, 회복이 된 후에 재촬영을 할 수 있지만, 단역 배우는 얄짤없다.

이 배우가 아니어도 대체할 단역 배우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맡았던 배역을 빼앗기는 건 물론, 며칠 동안 누워 있더라도 병원비나 받으면 다행이지.

“근데 근우 씨, 저번 촬영 때 역할이 호위무사 쫓는 반란군 아니셨어요?”

“오, 맞아요. 말 타고 있는 배우님 옆에 있던 반란군. 그날 연기가 좀 인상 깊었나 봐요. 다들 기억하시네. 하하.”

“그 반란군은 저번 촬영이 끝이었다고 들었는데, 오늘 다른 역할로 오신 거예요?”

장근우는 내 말에 뿌듯한 표정을 가득 품은 채 입을 열었다.

“그게, 또 캐디님이 제 연기를 잘 봐주셔서 오늘 재차 불러 주시더라고요.”

그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나 같아도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지.

“대단하시네요.”

“에이, 뭘요. 캐디님 눈에 들어갔으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해봐야죠. 하하.”

그때, 우리의 곁으로 빠르게 걸어오는 사람.

바로 캐스팅 디렉터였다.

나와 장근우는 동시에 그를 향해 허리를 접었다.

“안녕하십니까.”

우리의 인사에 캐스팅 디렉터는 환한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드리며 답했다.

“어, 희성 씨 왔어?”

“예,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주변의 산길을 스윽 바라보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이런 곳 보고 당황했지?”

“아닙니다. 대본에 나와 있는 내용 보고 대충 예상은 했습니다.”

캐스팅 디렉터가 눈썹을 들썩이며 입꼬리를 휘었다.

“그래? 역시 희성 씨는 대단하네, 프로야.”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내 옆에 서 있는 장근우를 바라보더니, 검지를 들어 보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기는 그… 누구였지?”

“장근우입니다. 저 지난 촬영 때 반란군 역할을 했던. 완전 마초였잖아요.”

그의 말에도 캐스팅 디렉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봐두거라. 다시 올 것이다.”

장근우는 제자리에서 달리는 모션으로 연기를 선보였다.

그제야 캐스팅 디렉터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 말 타던 친구구나? 그래, 오늘도 열심히 해요.”

“아… 아니, 저는 그 말 옆에서 뛰던 반란군….”

캐스팅 디렉터의 말에 장근우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지만,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희성 씨, 이따 슛 들어갈 때 다시 보자고!”

“네.”

***

“언제 도착해?”

송유나는 차 시트에 몸을 기대어 대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5분이면 도착해.”

그녀의 매니저 최태민 실장이 재빨리 답했다.

덜컹.

차가 비포장도로에 진입한 순간, 차량 안이 세차게 흔들렸다.

“아, 오빠! 운전 좀 조심하지?”

“어… 미안. 여기 도로가 안 좋아….”

“도로가 안 좋으면 운전을 더 조심해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송유나는 까칠하게 대꾸했다.

최 실장은 정면을 바라본 채 한숨을 겨우 참아냈다.

“그래, 미안하다. 조심할게.”

‘하…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컨디션도 안 좋은데. 유나까지 저러네.’

평소 까칠한 성격의 송유나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유독 오늘 더 심하다고 느끼는 최 실장은 홀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야, 설마 카메라 깔고 있는 저기서 촬영하는 거야?”

송유나는 창밖에 보이는 촬영 팀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며 최 실장에게 물었다.

“어, 오늘 산길에서 하는 신이라 저기서 준비하는 것 같은데.”

“저 산길을 간다고? 저렇게 좁은데. 사람 서너 명이 나란히 서면 끝날 만한 폭이잖아.”

오는 내내 불평불만이었던 그녀의 성화에 최 실장은 넋이 나간 듯 보였다.

“우선 내려서 확인해볼게. 다 왔다. 유나야, 조심히 내려.”

“하….”

송유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차 밖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곧장 트렁크로 다가가 의상을 확인하는 그녀의 얼굴이 재차 일그러졌다.

“뭐야. 오늘따라 의상은 또 왜 이래?”

“그게….”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벌벌 떠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자, 또다시 최 실장이 나섰다.

“미안하다. 오늘 누가 의상실에서 옷을 잘못 가져가 버렸대.”

“뭐라고? 아니, 관리를 똑바로 해야지. 스타일리스트가 자기 담당 의상도 제대로 간수 못 하고 뭐 한 거야?”

“…정말 죄송합니다.”

스타일리스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연신 사과를 내뱉었다.

툴툴거리며 환복을 마친 송유나는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이거 치마 너무 길지 않아? 걸을 때마다 자꾸 발에 밟히는데.”

그녀는 엄지와 검지로 치마 중간을 집어 들며 말했다.

송유나의 말에 스타일리스트는 재차 고개를 숙였다.

“언니… 정말 죄송합니다.”

곧 시작될 촬영을 위해 최 실장은 애써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입을 열었다.

“괜찮아. 원래 걸을 때 좀 걸려주기도 하고 그래야 또 조선 시대 느낌도 나고….”

“뭐?”

그의 말에 송유나는 눈에 불을 켜고 최 실장을 째려보았다.

“미안하다.”

“진짜 다음부터 또 이런 일 있기만 해. 나, 그때는 진짜 가만히 안 있어!”

송유나는 스타일리스트가 아닌 최 실장을 향해 빼액 소리를 질렀다.

***

좁은 외길.

양옆으로 가파른 절벽이 펼쳐져 있다.

카메라들이 옆에 서서 찍을 수도 없이 좁은 길이었기에, 외길의 앞뒤로만 배치되어 있는 스태프들.

그런 자연의 생생한 느낌을 주기 위해 양옆 절벽 위로 두 개의 드론이 떠 있었다.

지난 촬영과는 달리 열악하고 협소한 이곳.

그 탓에 현장 분위기는 꽤 살벌했다.

현장 섭외를 누가 했냐, 이렇게 협소한 곳에서 칼싸움이 가능하겠냐 등의 소리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감독의 사나운 분위기를 눈치챈 스태프와 단역 배우들은 누구 하나 군말 없이 리허설에 임했다.

“오늘 맨 앞에 계시는 분이 누구시죠?”

“접니다.”

무술 감독의 부름에 나는 손을 번쩍 들었고, 그에게 추가 지령을 받기 시작했다.

“예, 그럼 여기서 산적이 오면 칼을 휘두르시는데, 먼저 왼쪽으로 한 번 베고 난 뒤에 우측으로 휘두르면서….”

무술 감독과 나, 그리고 상대 배역은 짧은 합을 맞췄다.

그리고 곧장 시작되는 촬영.

“자, 그럼 산적들 다가오고, 가마에서 공주가 내려서 대사하는 신까지만 먼저 가볼게요.”

“레디, 액션!”

시끌벅적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낭떠러지 외길 앞뒤로 카메라가 돌고 있고, 가마 앞에 서 있는 나를 비추는 빨간 불빛.

“…누구냐.”

외길에서 만난 산적이기에 놀라 발길을 멈춰 세웠지만, 공주를 지키겠다는 용맹함이 느껴지는 말투로 대사를 내뱉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지나가시려고 하나.”

떼로 걸어오는 산적들.

그들은 자신만만하다는 눈빛과 휘어진 입꼬리로 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가마 안에는 어느 낭자가 올라 있….”

“비켜라. 길을 내어준다면 목숨은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쓰윽…!

더 이상 산적들이 가마 안의 공주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칼을 뽑아 들고 위협했다.

눈빛에서는 한 발짝이라도 다가온다면 네놈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는 강인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칼을 들고 온몸에 힘을 주자, 낭떠러지에 있던 드론이 주변을 크게 돌며 상황을 찍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고, 무슨 일이냐.”

싸늘한 분위기.

갑자기 멈춰서 움직이지 않는 가마 탓에 송유나는 그 안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가마 안에서 들리는 송유나의 목소리에 산적들은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내리지 말고 안에 계셔야 합니다.”

나는 시선을 산적들에게 고정한 채 공주를 향해 외쳤다.

하지만 내 걱정스러운 바람과는 달리, 공주는 멈춰 선 가마에서 나오며 말했다.

“누구이기에… 으악!”

“NG!”

그동안 실수한 적이 없던 송유나가 가마에서 나오다 머리를 부딪쳐 NG가 나고 말았다.

그녀는 재빨리 모두를 향해 외쳤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바로 다시 갈게요. 레디, 액션!”

“내리지 말고 안에 계셔야 합니다.”

“누구이기에 이리 멈춰 선 것이냐.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아! 죄송합니다.”

“…NG!”

이번에도 송유나의 대사 실수였다.

이후 크고 작은 몇 번의 NG가 반복되었다.

총 5번의 NG가 났고, 1번은 단역 배우.

나머지 4번은 송유나의 실수였다.

“NG! 하… 유나 씨, 오늘 왜 그래. 컨디션이 별로야?”

“진짜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실수 없이 하겠습니다.”

그녀는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허리를 접은 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실수를 연달아서 하다니.

열악하고 힘든 환경 때문에 긴장을 한 건가?

“유나 씨, 지금 호위무사 옆으로 다가가서 겁이 나지만 용기를 주는! 그런 표정 연기 좀 세세하게 보여줘.”

“예, 해 보겠습니다.”

“그래. 레디, 액션.”

언제 긴장을 했냐는 듯, 송유나는 곧장 연기에 몰입하더니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에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눈빛을 짧게 보낸 뒤, 다시 시선을 산적들 쪽으로 돌렸다.

“공주님, 이곳은 제가 있을 터이니, 뒤쪽으로 가시지요.”

앞에 있는 산적들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하하하.”

곧바로 뒤에서 음흉한 웃음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산적들.

진퇴양난이었다.

앞뒤에서 몰려나오는 산적들 탓에 그녀는 한 걸음 더 내 곁으로 붙어 섰다.

이에 한 손으로 그녀의 옷자락이 가까이 있는 것을 확인한 뒤, 칼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가장 가까운 산적부터 다가가 베려는 순간….

파스락.

“어? 어… 꺄아악…!”

바로 뒤에서 들리는 송유나의 목소리에 나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송유나가 서 있던 절벽 끝자락의 돌이 부서졌고, 그녀의 몸은 그대로 기울어졌다.

절벽 밑으로.

순간 나는 들고 있던 칼을 내동댕이친 채, 본능적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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