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7)화 (7/303)

7화 #2 – 예상치 못했던 (3)

“와, 희성 씨, 연기 뭐예요?”

“제 말이요! 원래 어디서 연기하시는 분이길래, 이렇게 연기를 잘하세요?”

연기가 끝나자마자 단역 배우들이 어느새 내게 모여들었다.

그들은 내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까 보니까, 저희뿐만 아니라 감독님들이랑 스태프들도 입을 떡 벌리고 감탄하시더라고요.”

“맞아요. WG 엔터에서 명함은 희성 씨한테만 줄 것 같던데요?”

“그건 아쉽지만 힘들겠네요.”

초 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항상 내게 먼저 다가오던 그 단역 배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벌써 촬영장을 떠났어요.”

“아, 그래요?”

“네, 그런데 WG 엔터에 그 박민준 배우와 무슨 일 있었어요?”

그의 말에 나를 포함한 다른 단역 배우들이 집중했다.

“왜요, 무슨 일 있나요?”

“아니, 자기 촬영 끝나도 자리를 뜨지 않길래 희성 씨랑 친분이 있어서 따로 커피라도 한잔하려나 보다 생각했는데, 희성 씨 연기 중간에 갑자기 부리나케 차로 달려가더라고요. 그러더니 곧장 차도 출발했어요. 인사도 안 하고요.”

그의 말에 모두 내게로 시선을 옮겼으나,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모른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때 우리의 이야기를 뚫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촬영 끝! 수고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난 모양이었다.

오늘로써 내 촬영은 정말 끝이 났다.

어제는 내 연기를 보고 김 감독이 재차 역할을 주었지만, 오늘은 호위무사 배역이 죽어 버렸으니 이어갈 수가 없지.

마지막이니만큼 김 감독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갔다.

“감독님,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 희성 씨도 고생 많았어. 오늘 연기도 훌륭했어.”

첫날은 내 이름조차 몰랐던 터라, 단역인 내 이름을 감독이 기억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아닙니다. 역할도 이어주시고,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기회 되면 같이 한번 일해보자.”

“저야 감독님과 또 일할 기회가 생긴다면 영광이죠!”

그는 내게 악수를 청하며 입을 열었다.

“다음 작품도 오디션 하니까, 꼭 서류 넣어.”

“네.”

나는 그의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간 쉬지 않고 내리 달려온 서울.

버스는 오늘도 PBC 방송국 앞에 멈춰 섰다.

스태프와 배우들과 인사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꿈같던 이틀간의 촬영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이제 또다시 오디션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며 다시 편의점 알바를 해야겠지.

매일같이 오디션의 결과를 기다리는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래도 이번 드라마 촬영으로 큰 것을 얻어냈다.

카메라 울렁증을 없앤 것.

그로 인해 내 연기를 인정받은 것.

어제 연기를 했을 때, 칭찬을 받고 기분이 좋았지만 얼떨떨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항상 카메라 앞에서는 구박만을 받아왔기에 칭찬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도 아닌 두 번 연속 연기로 인정을 받으니 자신감이 차올랐다.

드디어 내 연기가 빛을 발하는 건가.

포기하지 않고 연습하던 내게 보상을 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나 자체를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더 열심히 연습하고, 공부해야 한다.

나는 휴대 전화를 열어 달력에 체크를 했다.

어제오늘 촬영한 내 신이 드디어 다음 주에 TV로 방영되기 때문이다.

모니터링은 빠뜨릴 수 없는 가장 좋은 공부니까.

공부하자, 공부!

곧장 배우 카페에 들어가 새 오디션 대본 목록을 확인했다.

언제까지고 편의점 알바만 하는 일상에 멈춰 있을 수는 없으니까.

***

새하얀 벽지와 벽면을 가득 메운 책장.

그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책과 대본들.

말소리 하나, 숨소리 하나 제대로 들리지 않고 적막만이 가득한 곳.

이 큰 공간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타닥타닥.

쉴 새 없이 두드리는 키보드 자판 소리.

언제 씻었는지, 언제 밥을 먹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퀭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여성.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 듯한 모습으로 안경을 추켜올리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띠디디띠디디!

“아씨, 깜짝이야!”

그녀는 조용한 이곳에서 커다랗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휴대 전화 알람을 끄고 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발길을 향했다.

틱.

리모컨을 들어 재빨리 TV를 켰다.

-잠시 후 황국에서 피어나는 꽃이 방송됩니다.

“여보세요? 어, 나 이제 드라마 봐야 해. 응, 모니터해야지. 알겠어, 보고 연락할게.”

휴대 전화를 쥔 채 냉장고를 열어 마실 것을 가지고 오자, 타이밍 좋게 드라마는 시작되었다.

자신이 만든 내용이지만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이 더해지니 항상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녀는 흥미로운 듯 몸을 기울인 채 드라마에 집중했다.

‘오, 이번 드라마 예상보다 더 잘되겠는데?’

점점 드라마에 몰입하던 그녀는 한 손에 펜과 종이를 쥔 채 무언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모니터링을 하며 피드백을 적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새 그녀의 손이 멈추고 말았다.

-공주님, 이제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서둘러 피하셔야 합니다.

-허나… 앞에 병사들이 있지 않느냐.

-병사들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저는 목숨을 걸고 공주님을 지켜야 합니다. 어서….

종이와 펜을 탁상에 올려둔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며 TV 화면으로 빠져 들어갈 듯 더욱 집중했다.

-공주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옥체를 보존하셔야 합니다. 그게 이 나라를 위한 일이자, 백성을 위한 일입니다. 부디…. 누구냐!

그녀는 호위무사의 대사에 몸을 움츠렸다.

자신이 쓴 대본을 연기하는 배우를 보고 있지만, 그 연기에 흠칫 놀란 모양새로.

위기일발의 순간에 그녀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켜냈다.

-공주님을 지켜라!

-안 된다. 나를 항상 지켜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챙! 채챙!

-윽….

모니터에 나오는 호위무사를 바라보며 그녀는 잔뜩 몰입한 눈빛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집중하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어…. 쟤 뭐지. 캐릭터 있는데?’

지이잉.

그때 그녀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어, 봤어? 호위무사 말이야. 무슨 진짜 조선 시대 공주 호위무사마냥 사명감이 넘쳤…. 그래, 그 중간에 칼에 찔리는 그 배우! 몰입감이 장난 아니더라니까? 쟤 괜찮던데?”

그녀는 앞에 놓인 음료수를 들이켜며 말을 이어갔다.

“저게 바로 내가 말했던 병사의 기백이야! 아, 끊어봐.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났어. 쟤 좀 살려보면 재밌을 것 같은데? 응, 내가 다시 연락할게.”

그녀는 전화를 끊고 TV 전원을 껐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래, 내가 생각했던 게 바로 이거야!’

마치 원래부터 쓰려고 했던 원고인 양, 그녀의 손은 피아노 치듯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의 집의 불은 아침까지 꺼지지 않았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와 함께.

***

삑.

“5,600원입니다. 봉투 필요하실까요?”

“그럼 이걸 어떻게 다 들고 가라고요?”

할 말이 많지만 참았다.

‘네, 주세요’ 이런 한마디면 되는 걸….

이렇게 삐뚤어진 사람들이 많다니까.

“카드 여기 있습니다.”

“빨리 좀 해줘요. 왜 이렇게 느려.”

“손님이….”

내 손에 있는 카드를 확 빼간 뒤 이미 편의점을 나가버리는 손님.

성질도 급하다.

하지만 별수 있겠는가.

오랜 시간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손님과의 이야기에서 감정 소모를 하지 않는 방법이다.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이 모든 말들을 가슴으로 들으려면 결국 속이 상하는 것은 나니까.

손님이 나가자마자 휴대 전화를 들어 보고 있던 영상을 재생했다.

-공주님을 지켜라!

며칠 전 방영했던 드라마의 영상 클립.

내가 나온 부분을 닳고 닳도록 보았다.

이제는 영상 몇 분 몇 초에서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것까지 알 정도였으니까.

영상을 볼 때마다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나오는 신은 대사 한마디와 함께 사라지는 엑스트라가 아니었다.

대사가 여러 줄인 것도 가슴 벅찬데, 무려 두 신이나 나오다니.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것도 처음이다.

물론 다른 조연에 비해서는 무척이나 작은 역할이지만, 이렇게 성장해 나가는 것 아니겠는가.

조선 시대 호위무사로 빙의가 된 듯한 저 연기를 볼 때면 나조차도 감탄이 나오곤 했다.

실제로 연기를 할 때, 스스로도 빙의가 된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댓글에서도 간간이 호위무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기쁨과 뿌듯함도 잠시.

새로운 오디션 준비를 해야 한다.

내가 이곳을 탈출하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연기’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노력하고 또 노력할 것이다.

원하는 일을 하며 성공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노력뿐이다.

의자 위에 올려둔 대본을 꺼내들었다.

배우 카페에서 찾아둔 대본 종이들.

어떤 역할이 내가 가장 표현하기에 알맞을까?

지이잉.

그때 울리는 휴대 전화.

[발신인: 캐스팅 디렉터.]

‘황꽃’ 드라마의 캐스팅 디렉터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황꽃은 아직도 촬영 중일 텐데….

무슨 일로 내게 전화를 건 거지?

나는 재빨리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희성 씨. 통화 가능할까?

“네, 그럼요. 잘 지내셨습니까?”

-응, 희성 씨도 잘 지내지?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황꽃 드라마 촬영 중 아니십니까?”

-맞아. 오늘은 촬영이 좀 길어질 것 같네. 그나저나 희성 씨, 드라마 봤어?

“그럼요. 방금도 한 번 더 보는 중입니다. 하하.”

-와, 희성 씨 연기 진짜 잘하더라. 그때 오디션 볼 때부터 내가 알아봤다니까?

“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황꽃 촬영을 잘할 수 있었습니다.”

-내 덕은 무슨… 희성 씨, 다음 주에는 무슨 일 있어?

“다음 주요?”

-응, 작가님이 희성 씨를 좋게 본 것 같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희성 씨 대사가 좀 더 늘었어. 다음 주에 촬영해야 할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 근데 제가 이미 저번 신에서 칼에 맞아 죽은 거잖습니까.”

-아… 다행히 칼 맞고 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서, 작가님이 극적으로 되살아난 그림으로 가자고 하시더라고. 이번에 호위무사가 나오는 에피소드가 추가되었어. 희성 씨 연기 보고 역할을 늘리신 거지.

“…정말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내 연기로 인해 별거 없던 단역의 역할이 되살아났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주변에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

목소리가 떨림과 동시에 휴대 전화를 들고 있던 손마저 떨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스케줄은 괜찮아? 다음 주에 3일은 빼야 하는데, 가능하겠어?

“예, 빼 보겠습니다. 아니, 무조건 빼겠습니다!”

-하하, 그래. 그럼 다음 주에 보자고.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다음에 작가님께 드려.

“넵.”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연기를 보고 내 배역을 늘려주다니!

이게 실제로 가능한 일이었구나.

뛸 듯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산대를 열고 매대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속으로 환호를 지르며 편의점을 빙빙 돌았다.

그래, 앞으로 보여줄 일만 남은 거야.

떨지 않고 연습하던 대로만.

아니, 그것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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