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2 – 예상치 못했던 (2)
박민준.
대학 연극 영화과 동기다.
연극 영화과를 나왔기에 지금 연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동기는 박민준을 제외하고도 셀 수 없이 많지.
달갑지는 않지만, 동기들 중 현재 가장 잘나가는 게 박민준이기는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 주연 급은 아니지만, 비중이 꽤 큰 조연 역을 많이 맡고 있다.
박민준은 대학 시절부터 잘난 척이 끝도 없던 놈이었다.
자타 공인 잘난 놈이 아닌, 잘난 ‘척’.
그런 그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바로 나였다.
대학 시절의 나는 항상 에이스였기에.
그래서 박민준은 내 연기에 대해 질투를 했고, 늘 음해하고 모략하기 바빴다.
심지어 여교수와 불륜 관계라서 즉흥 연기 대본도 미리 받아서 연습한다는 소문까지 낸 적이 있으니까.
그걸 알게 된 뒤로, 난 녀석을 아예 사람대우도 하지 않았다.
다른 동기들한테도 비슷한 취급을 받았고.
하지만 박민준은 졸업 후, 운이 좋게 WG 엔터에 들어가며 과거를 세탁하고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태다.
그에 반해 나는 거지 같은 카메라 울렁증이 생겨버렸고.
승승장구하는 박민준에 비해 나는 단역에서 헤매게 된 것이다.
여기서 끝나면 좋았겠지만, 녀석은 여전히 나에 대한 라이벌 의식으로 대학 동기들에게 내 근황을 물어보고는 ‘그럴 줄 알았다’, ‘걔 연기는 딱 교내용이라니까’, ‘동기라고 하기 쪽팔린다’라는 등 나에 대해 온갖 험담을 한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왔다.
그런데 하필 이 자식을 여기서 볼 줄이야.
단역들이 모여 있는 곳에 서 있던 나는 몸을 돌려 박민준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특별 출연으로 온 그를 굳이 마주쳐서 인사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는 밴에서 내려 곧장 김 감독에게 걸어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나는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대본에만 집중했다.
그때.
아주 큰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그.
“진희성!”
어떻게 알았는지 그는 내게 다가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멀리서 보고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희성이 맞네. 이야, 반갑다!”
그의 커다란 목소리에 주변에 서 있던 단역들과 스태프들이 나를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이런 자리에서 박민준과 기분 좋게 인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이런 자리가 아니라, 평소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야, 네 소식은 들었는데….”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아직 단역하고 있구나…. 뭐, 오늘 대사는 좀 있어? 한… 줄?”
“여섯 줄.”
“우와, 대단하네. 너 아직 대사도 없이 지나가는 엑스트라일 줄 알았는데.”
그의 입꼬리가 휘어졌고,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애써 숨기는 듯 보였다.
재수 없는 놈.
“그래.”
자신이 나보다 잘나가고 있음을 표출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놈인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장단을 맞춰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난 오늘 특별 출연하러 왔어. 들었으려나?”
그의 질문에 내가 호응을 하지 않자, 재차 말을 이어갔다.
“여기 감독님이랑 예전에 술 한번 마신 적이 있는데, 꼭 한번만 나와 달라고 부탁을 하셔서 말이야. 내가 감독님과 인연이 있는데, 빠질 수가 없잖아? 하하.”
어찌나 떠벌리고 싶었을까.
묻지도 않은 말을 온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외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할 말을 모두 쏟아내는 걸로 자랑이 끝났는지 내 팔을 툭 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튼, 오늘 잘해봐. 파이팅 하라고. 그럼 나는 감독님한테 가봐야겠다.”
이후 몇 시간이 흘렀을까.
수차례의 촬영이 끝나고 다가온 내 차례.
이번 촬영은 공주를 지키는 호위무사들이 대거 나오는 신이었다.
여러 명의 병사가 나오지만, 검을 들고 공주의 곁에 있는 유일한 호위무사가 바로 내 역할이었다.
옷과 검을 점검한 뒤, 현장에서 자세를 잡았다.
“이번 신은 대사만 딸 거니까 검 휘두르기 전까지만 갈게요!”
조감독은 대본을 들고 다가와 촬영 설명을 해주었다.
“예, 알겠습니다.”
“네, 촬영 들어갑니다!”
“레디, 액션!”
“공주님, 이제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서둘러 피하셔야 합니다.”
내 대사에 송유나는 금세 몰입한 얼굴로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허나… 앞에 병사들이 있지 않느냐.”
단호하게 말을 내뱉는 내 뒤로, 긴장 가득한 역할에 몰입한 송유나까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곳에 오로지 그녀와 나만이 자리해 있는 것 같았다.
공주를 지켜내야 한다는 용맹한 눈빛으로 검을 쥔 채 입을 열었다.
“병사들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저는 목숨을 걸고 공주님을 지켜야 합니다. 어서….”
딸그락!
“NG!”
모든 사람들이 송유나와 내 연기에 몰입하고 있기에 들려오는 잡음은 더 크게 느껴졌다.
“누구야!”
분명 칼 같은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김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통을 쳤다.
“아! 죄송합니다, 감독님. 제가 옆에 소품이 가까이 있어서 옷자락에 떨어졌나 봅니다.”
젠장.
박민준이다.
저 자식,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다.
촬영 현장에서 소품을 떨어트려 NG가 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소품이 위험하게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저 내 연기를 방해하려는 셈이다.
김 감독은 화를 억누르며 답했다.
“괜찮아. 조심해, 안 다치게.”
“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김 감독이 애꿎은 소품 팀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소품 팀! 뭐 하는 거야. 여기 검이랑 이거 다 걸리적거리지 않게 빨리 안 치워?”
그 와중에 몰입이 깨져버린 송유나는 내 앞에서 짜증 섞인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자자, 다시 바로 갈게. 방금 연기 너무 좋았어. 했던 것처럼 다시!”
김 감독이 주변을 살핀 후, 의자에 앉으며 외쳤다.
“레디, 액션!”
첫 번째 신 촬영이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물론 박민준의 방해로 인해 NG가 났지만, 나는 금세 몰입해 연기를 펼칠 수 있었다.
“유나 씨가 여기서 피하지 않고 있을 때, 희성 씨가 검을 휘두르면서 막으면 됩니다. 아시겠죠?”
무술 감독이 자신의 몸을 움직이며 우리에게 신 설명을 늘어놓았다.
“예, 여기서 검으로 막고….”
“그렇지. 여기 신이 중요하니까, 희성 씨가 방금 보여줬던 연기 그대로 몰입해서 보여주면 될 것 같아.”
김 감독은 언제 왔는지 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예, 감독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조금 전 연기 너무 좋았다고. 다음 신도 잘 부탁해.”
김 감독은 눈썹을 들썩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연기도 대성공이었다.
그동안 내가 앓았던 카메라 울렁증이라는 게 있었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넵! 믿고 맡겨 주십시오!”
혹시 모르는 일이다.
오늘로 끝날 내 역할이 내일도 이어질지.
어제도 마찬가지로 내 연기에 역할이 늘어났으니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자.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다짐했다.
“저….”
그때 현장으로 걸어오는 사람.
박민준이었다.
김 감독이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 무슨 일이야?”
“감독님, 제가 특별 출연이라서 말씀을 드리기가 조금 선이 넘는 걸 수도 있는데….”
“무슨 말인데?”
“잠시 저쪽에서 말씀 좀 드려도 될까요?”
박민준이 감독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고, 김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박민준은 나를 한번 쓰윽 훑어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걸어갔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
박민준은 의뭉을 떨며 미소를 지은 채 이야기했다.
“감독님, 여기서 호위무사가 칼싸움을 하면서 공주를 지켜내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 김 감독이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황꽃 열혈 시청자로서 공주가 호위무사를 통해 바로 위기를 넘기는 것보다는 호위무사가 죽어 버리면서 쫓기는 장면이 나와야 더 쫄깃쫄깃할 것 같아서요. 시청자 게시판도 제가 다 봤는데, 긴박한 장면이 없는 사극이란 댓글이 있더라고요. 작가님도 이 정도는 오히려 좋아하실 것 같아요.”
박민준의 말에 김 감독이 아무런 대꾸가 없자, 그는 김 감독의 팔을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감독님! 진짜 그냥 시청자의 의견이라 생각해 주시고, 혹시나 제 말이 기분 나쁘시다면 단칼에 제 입을 막으셔도 됩니다.”
그의 말에 김 감독은 자신의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낮게 읊조렸다.
“음…. 일리는 있네.”
이에 그치지 않고 박민준이 큰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네, 그게 더 심장이 쫄깃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어차피 호위무사는 오래갈 만한 캐릭터가 아니잖아요.”
박민준은 김 감독과 독대를 하면서도 현장에 서 있는 진희성을 힐끔거렸다.
진희성과 박민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진희성 근처에서 하는 이유.
당연히 대화 내용이 진희성에게 흘러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었다.
‘진희성이 다음 회차에 출연하는지 안 하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가능성의 싹을 잘라 버려야지.’
“그건 맞지. 어차피 이후에 호위무사 신이 없기는 하니까 말이야.”
김 감독의 말에 박민준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잠시 그들의 대화에 공백이 생겼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여는 김 감독.
“고마워, 민준이가 이제 연출까지 생각하고 대단하네?”
“아닙니다! 감독님이 하시는 거라면, 제가 항상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하.”
“조감독! 희성 씨 좀 불러줘.”
“네, 희성 씨! 이쪽으로.”
곧장 진희성이 박민준과 김 감독의 앞쪽으로 달려왔다.
진희성은 박민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김 감독을 바라보며 섰다.
“감독님 부르셨습니까?”
“어, 희성 씨. 아까 말했던 장면에서 검을 휘두르며 싸우다가 마지막에 칼에 꽂히면서 쓰러지는 거로 가려고 하거든?”
진희성은 감독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박민준에게 분노를 느낄 뿐.
“아… 칼을 쳐내지 말고 찔려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응, 그렇게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말이야. 상대 배역이랑 호흡은 다시 무술 감독님이 알려줄 거야. 바로 연습 가능하지?”
“…네.”
“그래, 준비되면 슛 들어가자고.”
진희성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곧장 현장으로 투입됐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리는 박민준.
그런 박민준에게 김 감독이 물었다.
“근데 민준이는 안 들어가? 오늘 역할 끝났는데, 가도 괜찮아.”
“아닙니다. 현장 분위기도 너무 좋아서 조금 더 보다 가려고요. 괜찮을까요?”
“그럼, 당연하지.”
‘진희성, 넌 내 한마디에 좌지우지될 수 있는 아주 작은 단역 따위야.’
박민준은 거센 콧바람을 내쉬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붙잡았다.
몇 분의 시간 동안 진희성과 상대 배우는 연기 연습을 마쳤다.
그리고 곧장 시작되는 촬영.
“자자, 바로 호위무사 다음 신으로 들어갈게요.”
“레디, 액션!”
“…두렵지 않으십니까.”
카메라에 빨간 불빛이 돌자, 진희성의 눈빛이 돌변했다.
중저음의 걱정 어린 눈빛으로 상대 배역인 송유나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옆에서 항상 지켜줄 터인데, 내가 두려울 리가 있겠느냐.”
“공주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옥체를 보존하셔야 합니다. 그게 이 나라를 위한 일이자, 백성을 위한 일입니다. 부디…. 누구냐!”
송유나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설득을 하려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진희성은 검을 들고 비장하게 일어났다.
그러곤 카메라 옆을 비스듬히 바라보며 시선 처리를 한 뒤, 검을 양손으로 터질 듯 쥐였다.
온 스태프의 숨이 멎었고 시선은 진희성의 칼을 쥔 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목을 놓아 외치는 소리.
“공주님을 지켜라!”
진희성의 우렁찬 대사에 주변에 서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가 공주를 에워쌌다.
순간 현장에는 차가운 공기가 가득 찼고, 당장이라고 칼부림이 일어날 것처럼 긴장감이 가득했다.
“안 된다. 나를 항상 지켜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송유나의 울부짖는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에 한층 더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검은 옷, 검은 천을 얼굴까지 쓴 적군이 진희성의 앞에 칼을 휘둘렀다.
챙챙!
칼이 허공에서 몇 번을 부딪치며, 긴장감을 자아냈다.
진희성은 어디서 수차례 검술을 연습했던 것처럼 자유자재로 검을 휘둘렀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공주를 지키겠다는 비장한 눈빛과 적군을 향한 매서운 표정.
그의 눈빛과 목소리는 현장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윽….”
적의 검에 맞아 턱 하고 무릎을 꿇는 순간.
김 감독 옆에 서 있던 박민준의 입꼬리가 씨익, 하고 잔뜩 휘어졌다.
그가 자신의 신이 끝났음에도 현장에 남아 있는 이유.
바로 진희성의 역할이 없어지는 순간을 구경하고 싶어서였으니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희성은 연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실제로 칼에 맞은 듯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고통스러워하는 진희성.
눈을 파르르 떨고 새빨개진 얼굴로 마치 잃어가는 생명을 겨우 붙잡고 있는 듯 보였다.
그의 실감 나는 연기에 걱정하듯 바라보는 스태프의 시선이 쏟아졌다.
순간, 송유나와 진희성의 눈이 마주쳤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송유나.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진희성은 파르르 떨던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송유나를 아련하게 바라보며 눈물을 한 방울 떨어트렸다.
“안 돼!”
진희성의 눈물에 송유나는 호위무사를 잃은 슬픔에 울부짖으며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
“컷! 오케이!”
김 감독은 자리에 앉은 채로 손뼉을 부딪치며 힘차게 외쳤다.
나와 눈이 마주친 무술 감독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동시에 나를 바라보고 있던 박민준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인상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자신이 방해했는데도 몰입이 깨지지 않고 단번에 OK 받은 게 심술이 난 듯이.
그리고 열이 잔뜩 받은 얼굴로 뒤를 돌아 밴으로 걸어갔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결심했다.
내가 기필코 떠서 저놈의 코를 짓눌러 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