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5)화 (5/303)

5화 #2 – 예상치 못했던 (1)

김 감독의 말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조차 필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망설임은 내게 사치였다.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답했다.

“넵! 정말 자신 있습니다. 믿고 맡겨 주신다면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어찌나 당찬 목소리로 말했는지 옆을 지나가던 조연출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쓰윽 훑고 지나갔다.

내 말에 김 감독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뭐… 엄청난 기대는 안 하니까, 오늘 하던 대로만 해줘. 딱 그대로만.”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는 이내 양쪽 입꼬리를 흐뭇하게 올렸다.

그러고는 턱을 들어 내 뒤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따가 저기 조감독한테 내일 호위무사 역을 하기로 했다고 말하고 대본 받아서 가.”

“예, 감사합니다.”

“감사를 몇 번이나 하는 거야. 하하, 내일 보자고.”

김 감독은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돌아 걸어갔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허리를 접었다.

“넵, 열심히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

촬영장에서 탔던 버스는 한참을 달려 PBC 방송국 앞에서 멈춰 섰다.

버스 안에 타 있는 많은 배우를 일일이 원하는 곳에 내려줄 리는 없으니까.

버스에서 내린 스태프들은 인사도 없이 자신들의 일을 하러 떠났다.

그리고 버스가 떠난 이곳에 남은 몇몇 단역 배우들.

“조심히 가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이들이 스태프들처럼 빨리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인사를 하며 서성이는 이유.

그건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단역 배우.

즉, 비중이 크지 않은 엑스트라 역할의 배우들이다.

그래서 촬영 시작과 동시에 끝나버린, 단 한 컷만 찍은 배우들이 수두룩하다.

나 역시도 김 감독의 제안이 없었다면, 오늘로써 내 촬영은 모두 끝났을 터.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 또다시 이 현장에서 볼 일이 없을 수도 있기에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황꽃’ 촬영장이 아닌, 새로운 드라마나 영화에서 또다시 단역으로 만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물론 이 중에서 내일 또 촬영장에 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바로 나처럼.

주저로운 마음이 가득한 사람들 틈에 있는 나의 손에는 지금 ‘황꽃’의 대본집이 들려 있었다.

현장에서 버스에 올라타기 전, 조감독에게 받은 내일 자 촬영 대본.

“그럼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예. 다들 열심히 합시다.”

“또 봬요.”

저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길.

내 심장은 연신 두근대고 있었다.

어깨가 축 처져 돌아가는 배우들이 있었지만, 나는 달랐다.

언덕을 올라 집으로 향하고 있지만,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아마 손에 들린 대본 때문이겠지.

촬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이렇게 설레고 즐거울 수가 있다니.

아니, 이랬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기는 했나?

단연컨대 오늘의 내 연기를 돌아보며 뿌듯함이 들고 행복한 건, 연기를 시작하고 나서 처음인 것 같다.

항상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슬픔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렇게 연습을 해도 촬영장에만 가면 도지는 카메라 울렁증.

그로 인해 현장에서는 수없이 모진 말을 들어야 했다.

‘NG!’

‘하, NG. 다시!’

‘연기를 왜 이렇게 못해.’

칭찬은커녕 쫓겨나듯 촬영장을 벗어나던 일이 손에 꼽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그보다 더 슬펐던 건, 카메라 울렁증으로 인해 수없이 연습한 것들이 물거품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모두에게 연기로 인정을 받았다.

그뿐이랴, 내 손에는 예상에도 없던 추가 대본이 쥐어져 있지 않은가.

들뜨고 가슴이 두근댄다.

이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앞으로도 늘 이런 기분을 가지고 집으로 향하고 싶다.

집에 도착해 씻고 나오자마자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곧장 휴대 전화를 열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통화 가능해?”

-응, 혹시 대타 때문에 전화한 거야?

“어떻게 알았어?”

-그냥. 목소리가 그럴 것 같아서.

“…혹시 가능할까?”

-언젠데?

“내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부탁 좀 하려고.”

-내일? 음…. 그래, 희성이 네가 부탁하는 거면 중요한 일이겠지. 알겠다.

“진짜로 고맙다. 부탁할게.”

전화를 끊은 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랜 편의점 알바 생활을 하며, 다른 시간대의 알바생들과 친해져 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에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혹시나 내가 배우 일 때문에 편의점을 쉬어야 하는 날이 온다면 대타 부탁을 하기 위해 그동안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다른 알바들의 대타도 가능하면 전부 내가 했지.

바로 이런 날을 위해.

쾅쾅.

쾅쾅쾅쾅.

그때 들려오는 노크 소리.

현관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치킨이다!”

이놈의 원룸은 몇십 년이 된 건지, 초인종이라고는 그저 벽에 달린 그림이나 마찬가지다.

색이 바래서 노래진, 버튼도 언제부터 빠져 있던 건지 눌리지 않는 그저 장식품.

그새 배달원은 사라졌는지, 문 앞에는 덩그러니 비닐봉지가 놓여 있었다.

편의점 알바로 먹고사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이런 날에는 치킨이 빠질 수 없지.

작은 상을 펴고 따뜻한 치킨을 봉지에서 꺼내 세팅했다.

이런 날 마음 같아서는 치맥 딱 달리고 싶었지만.

내일 촬영이 있으니 술은 참아야 한다.

대신 치킨에 딸려온 콜라를 꺼낸 뒤, TV를 켜 요즘 잘나가는 드라마를 틀었다.

내가 나오는 드라마는 아니지만, 잘나가는 드라마를 봐야 요즘 유명한 배우들의 연기력을 배울 수 있다.

모니터링도 빠질 수 없는 연기 공부인 셈이지.

채널까지 모두 세팅한 뒤에야 콜라 뚜껑을 열 수 있었다.

치이익.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뒤에 뜯는 닭 다리.

하루 내내 야외에서 고생한 뒤 뜯는 치맥, 아니 치콜은 환상이다.

한 입을 베어 물자마자 시선은 TV가 아닌 치킨 옆에 놓여 있는 대본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다음 한 입을 먹기도 전에 그 대본에 미친 듯이 몰입하기 시작했다.

손에 닭 다리가 들려 있다는 것도 잊을 만큼.

내일 할 배역은 호위무사 역.

그러니까 오늘 내가 맡았던 배역에서 이어지는 신이다.

원래대로라면 이 역은 내가 아닌 다른 배우가 할 역할이었던 것이다.

그 배우의 역할을 내가 가져온 만큼 몇 배로 보여주어야 한다.

오늘 했던 대사는 4줄.

그리고 내일 연기할 대사는 무려 6줄!

내가 맡아본 배역 중에 제일 많은 분량이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오늘의 그 몰입감.

그대로만 이어가자.

***

다음 날.

버스는 오늘도 현장 초입에서 멈춰 섰다.

두 번째인데도 왠지 모르게 사람들이 익숙해진 느낌이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우렁찬 목소리로 스태프들을 향해 인사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가는 스태프.

내 인사에 눈을 흘기는 스태프.

어제에 이어 두 번째로 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도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어제 내 연기로 인해 충분히 변화된 반응이 나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 인사에 소리를 지르거나 핀잔을 주는 스태프는 없었으니까.

나는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보낸 뒤, 단역 배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어, 진희성 씨?”

먼저 도착해 있던 남성이 내게 손을 흔들며 물었다.

“아… 어제 그분.”

어제 이 자리에서 내게 말을 걸었던 단역 배우.

그 역시 오늘도 촬영이 있는 모양이다.

내심 반가운 마음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는 손으로 타고 온 버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버스 타고 오셨죠?”

“네, 맞아요.”

“저도 버스 타고 왔는데, 왜 몰랐지? 아무튼, 또 만나서 반가워요.”

그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그러게요. 반갑네요.”

맞잡은 손을 빼내자마자 그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질문을 던졌다.

“근데 그거 들었어요?”

“네? 어떤….”

그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오늘 WG 엔터에서도 온대요.”

“WG 엔터… 거기서 왜요?”

“특별 출연으로 한 명 온다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WG 엔터테인먼트.

우리나라의 유명한 3대 엔터 중 한곳이다.

그렇게 유명하고 큰 엔터에서 굳이 특별 출연으로 한 명이 온다라….

“빨리 거울이라도 한 번 더 봐요. 아마 곧 올 거라던데?”

그는 내게 자신의 손거울을 내밀며 말했다.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에이, 그래도 WG 엔터에서 오는데요? 일생일대의 기회일지도 모른다고요.”

그가 이렇게까지 외모에 신경을 쓰는 이유.

당연히 WG 엔터에 잘 보이기 위함이다.

3대 엔터가 있지만, 배우들은 특히나 WG 엔터를 선호한다.

WG 엔터가 아닌 나머지 2개의 엔터에는 소속 배우보다 아이돌이 더 많다.

그러니 당연하게 배우보다 아이돌에 더 많은 투자를 하는 편이지.

하지만 WG 엔터는 아이돌보다는 배우에 많이 치중된 회사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아이돌에 비해 소속 배우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우를 위한 투자를 서슴지 않는다고 유명한 곳.

“혹시 모르잖아요. 오늘 그 매니저 눈에라도 띄면 명함이라도 한 장 받을지?”

언감생심.

명함?

나는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오늘 준비해온 대사나 절지 않고 해내기를 바랄 뿐.

그는 앞에서 연신 거울을 보며 외모를 치장하기에 바빴다.

“…정말 WG 엔터에서 오늘 오는 거예요?”

우리의 대화가 들렸는지 주변의 단역 배우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WG 엔터는 촬영 현장에서 마음에 드는 단역들을 발견하면 적극적으로 명함을 돌리기로 유명하니까.

“예, 그렇다니까요? 누군가까진 못 들었는데, 누구든 알 게 뭡니까. 매니저 눈에 들면 되죠.”

“맞아요. 분명 와서 소속사 없는 우리 단역 배우들을 눈여겨볼 거라고요.”

내 주변에 있는 단역 배우들은 하나같이 거울이나 휴대 전화를 꺼내 자신의 얼굴과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난 그런 그들을 뒤로한 채, 한쪽으로 빠져나와 대사를 복기했다.

오늘 역시 완벽하게 해내야만 한다.

몇 번의 대사 복기를 하고 있을 때쯤.

어수선하던 현장이 정리되고 있었다.

곧 촬영이 들어간다는 신호지.

“오늘 첫 번째 신 준비할게요!”

스태프가 큰 소리로 외치자 첫 번째 신 촬영을 하는 배우들이 빠르게 이동했다.

내 순서는 아직 남았기에, 다시금 대사에 집중했다.

그때.

저 멀리서 화려한 밴이 버스를 지나 현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일반 배우들도 타기 힘든, 그러니까 톱 배우만이 탄다는 신형 초대형 밴.

WG 엔터에서 온 배우가 분명했다.

분명 특별 출연이라고 했는데….

특별 출연은 한 신만 가볍게 등장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 신에 저렇게 잘나가는 톱 배우가 온다고?

내 주변에 있던 단역 배우들을 비롯해 스태프들의 시선까지 모조리 밴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열리는 커다란 문.

그 문을 향해 달려가던 스태프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외쳤다.

“박민준 배우님 오십니다!”

박민준…?

잠깐만.

저 자식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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