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4)화 (4/303)

4화 #1 – 카메라 울렁증 (4)

송유나의 말에 김 감독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김찬기 감독과 송유나의 말에 온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으니까.

송유나….

영화 촬영 현장에서 내게 그렇게 쏘아붙인 것도 모자라 새로운 드라마 촬영장에서까지 이렇게 무례하게 나올 줄이야.

물론, 당시에 내가 대사를 여러 번 절기는 했지만, 이제 다시는 촬영장에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여기서 그녀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내가 그날 보여주었던 연기는 형편없었던 게 맞으니까.

송유나는 어깨를 들었다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 지금 촬영 중인 영화 있잖아요.”

“어, 알지.”

“거기서 봤던 엑스트라예요. 근데 이 사람, 연기 더럽게 못한다고요. 덜덜 떨고 대사도 다 틀리고. 꼴랑 대사 한 줄도 제대로 못 해서 NG도 몇 번이나 났었다고요. 또 그럴 거 뻔한데, 애초에 바꿔주세요.”

팔짱을 낀 송유나는 대놓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김 감독은 그녀의 말에 난감한 얼굴로 답했다.

“아니, 지금 와서 어떻게….”

“그냥 지나가는 엑스트라 아닌가? 아무나 바꾸면 안 돼요? 이 사람 때문에 여러 번 NG가 나면 손해 보는 건 감독님이랑 저 아니에요?”

그녀가 사나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바꿔주세요, 저는 이런 사람이랑 연기 못 하겠으니까.”

이미 모든 촬영 준비가 끝난 상태에서 무작정 연기자를 바꿔 달라는 그녀.

송유나의 말에 김 감독은 꽤나 당황한 듯 보였다.

그리고 곧장 고개를 돌려 나를 쏘아보며 물었다.

“정말 그랬어요?”

나는 그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재빨리 답했다.

“어… 아니요. 그게 아니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에 불을 켜고 말하는 송유나.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맞잖아요! 내가 지금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예요?”

“워워.”

큰 목소리로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다가오는 사람.

바로 캐스팅 디렉터였다.

오디션에서 내 연기를 보고 감탄하며 캐스팅했던 인물이다.

그의 목소리와 제스처에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워워, 유나 씨, 진정하세요. 이 친구는 제가 오디션에서 직접 연기를 봤는데 잘해요.”

“잘하긴 뭘 잘해요. 현장에서 NG 나고 난리였다니까요? 카메라 울렁증도 있는지 말도 막 더듬고, 하….”

흥분한 송유나를 바라보며 캐스팅 디렉터는 미소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

“글쎄요. 제가 볼 때는 연기를 꽤 잘하던데요?”

“엑스트라 오디션이면 몇 십, 아니, 몇 백 명이나 왔을 거 아니에요! 제대로 본 거 맞아요?”

팽팽히 맞서는 그들의 대화에 조용히 있던 김 감독이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유나 씨. 한 번 트라이해 보고 별로면 바꾸자. NG 나면 바로 다른 연기자로 바꿀게.”

김 감독이 몸을 돌려 내 눈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화가 나서 찡그리는 표정이 아닌, 내 이름을 부르려는 듯했다.

하지만 일개 단역의 이름을 알 리가 없겠지.

나는 재빨리 김 감독을 향해 답했다.

“진희성입니다.”

“아, 예. 내 말에 동의하죠?”

나는 확신에 찬 얼굴과 말투로 짧고 굵게 대답했다.

“네. 동의합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김 감독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시 송유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송유나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못 이긴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그럼 딱 한번이에요. NG 한번이라도 나면 바로 바꾸는 거예요.”

“오케이! 자자, 바로 한번 가봅시다!”

김 감독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아내며 메인 카메라를 지나쳐 바로 옆, 모니터 앞에 놓인 의자에 착석했다.

그의 움직임에 어수선하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자리를 찾았다.

“자자! 스탠바이 할게요. 송유나 님!”

송유나가 마지막으로 화장과 옷을 점검하러 간 사이, 스태프의 큰 외침에 모두 촬영장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김 감독을 포함해 스태프는 물론 엑스트라들의 시선까지 내게로 쏠렸다.

조금 전 시끌벅적했던 대화 때문인지 아까는 보이지 않던 엑스트라 배우들까지 근처에 구경을 온 듯 보였다.

갑자기 더 격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아니, 반드시 잘해내야 한다.

이번에도 실수한다면 앞으로 내게 촬영장에 설 일이 없어질지도 모르니까.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떨리는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수많은 스태프와 배우들.

그걸 떠나 수많은 카메라가 내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떨지 말자.

떨지만 않으면 해낼 수 있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연습한 만큼만….

***

“아, 진짜 열 받아. 내가 저렇게 연기 못하는 애랑 한 신에 들어가야 한다는 게 말이 돼?”

송유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의 스타일리스트는 송유나의 옷을 매만지며 답했다.

“언니, 잠깐만요. 옷소매만 한번 정리할게요.”

“하, 저 되지도 않는 게 무슨 내 호위무사 역할이야. 짜증 나, 진짜.”

“언니, 예쁜 얼굴로 그만 화내세요. 곧 슛 들어가잖아요. 네?”

미간을 찌푸린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매니저에게 다급히 걸어오는 사람은 FD였다.

“송유나 님 매니저분이시죠?”

“네, 맞습니다.”

“송유나 님 스탠바이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화가 잔뜩 올라와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유나야, 촬영 들어가자.”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자자, 스탠바이 할게요. 송유나 님!”

“네, 가요.”

송유나의 스타일리스트는 큰 소리로 외친 뒤, 그녀의 옷소매를 내려놓았다.

“언니, 잘하고 오세요!”

“그럼. 내가 언제 실수하는 거 봤어?”

오래지 않아 촬영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테이크 가겠습니다.”

숨 막히는 분위기.

‘그래, NG 나서 배역에서 떨어져 나가봐야 정신을 차리지. 어디 한번 해봐.’

진희성은 앞에서 눈을 감고 긴장을 가라앉히고 있는 것 같았다.

송유나는 그런 진희성을 한 번 훑어본 뒤, 곧장 역할에 몰입했다.

“레디, 액션!”

큐사인과 동시에 진희성의 눈빛이 바뀌었다.

표정 또한 송유나에게 매우 다급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공주님을 노리는 적군들이 늘고 있습니다.”

진희성은 실제로 목숨을 걸고라도 송유나를 지키겠다는 듯 비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사를 내뱉었다.

“확실한 것이냐.”

언제 진희성에게 화를 냈냐는 듯, 송유나는 톱 배우답게 우아한 어투로 말을 받았다.

“예, 이곳도 언제까지 안전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서 거처를 옮기셔야 합니다.”

“싫다. 내가 이곳에 남아야 하는 이유를 너도 알지 않느냐. 내가 여기에 남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겠다면, 어찌 되는 것이냐.”

“하오나….”

진희성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호위무사로서의 고뇌와 공주에 대한 걱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시선 처리 또한 완벽했다.

카메라를 의식하는 게 아니라, 몇 번이고 드라마를 찍어본 프로처럼 앵글에 잡히면서도 또 그 안에서 송유나를 바라보는 게 명확하게 눈에 보였다.

‘…뭐야, 잘하잖아?’

단순한 엑스트라라 여기고 무시했던 송유나의 미간에 옅은 놀라움이 어렸다.

‘저번에는 왜 그랬던 거지?’

그녀의 머릿속엔 의문이 피어났지만, 이미 카메라가 돌고 있는 만큼 다시 연기에 집중했다.

“나는 이곳에 있을 것이다. 떠나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떠나도 좋다.”

“제가… 아니, 저희가 공주님을 지키겠습니다. 필히…! 그럴 것입니다.”

용감무쌍한 말투로 마지막 대사를 읊조리는 진희성.

검을 빼내고 송유나 곁을 용맹하게 지키려는 표정 연기에 주변에 있던 스태프들은 소리 없이 감탄을 자아냈다.

진희성의 물 흐르듯 부드러운 연기에 송유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맡은 배역에 몰입되었다.

그 덕분에 애써 감동한 표정을 짓지 않아도 상황에 따라 자연스레 표정이 지어졌다. 이런 느낌으로 가자고.

“컷! 오케이! 좋은데? 바로 바스트 샷 가볼게요.”

감독의 우렁찬 오케이 소리.

모두 놀란 눈으로 진희성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그 말과 동시에 김 감독이 송유나를 바라보았다.

송유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외면했다.

진희성의 연기에 놀란 건, 감독과 송유나 둘뿐만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단역 배우들은 마치 자신이 인정을 받은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그들과 비슷한 입장인 진희성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누구보다 그가 연기를 잘해내길 간절히 바란 것도 사실이었다.

짝짝짝.

조금 전, 진희성에게 말을 걸었던 단역 배우가 손뼉을 쳤지만.

째릿.

송유나와 스태프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이건 너무 갔나?’

머쓱하게 그는 손을 뒤로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모기가 있네….”

***

“컷, 오케이!”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전체 신도 모자라, 바스트 샷까지 연이어 단번에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어, 희성 씨 수고했고, 바로 다음 신 가 보겠습니다.”

촬영은 이어졌지만 내 역할은 여기서 마무리였다.

하지만 자축하기엔 충분했다.

짜릿했다.

현장에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라 더더욱 기분이 이상하고 묘했다.

연기할 때 느낀 기분은 지난주 오디션장에서 연기했을 때와 비슷했다.

마치 무언가에 빙의된 것처럼.

내 몸에 호위무사가 확 들어왔다 나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내 어처구니없는 상상에 실소를 터트렸다.

빙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저 내 연기의 빛이 이제야 발하는 거겠지.

카메라 울렁증도 이제 사라진 건가?

앞으로 이대로만 연기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은데….

***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이미 버스의 반이 넘게 차있는 상태.

단역들이 따로 차량을 가져오는 것은 드문 일이다.

대부분 지방까지 촬영을 오기 위해서는 단역들, 스태프들이 버스로 함께 이동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 버스의 단점은 바로 촬영이 끝나야 이동한다는 것.

매니저와 차량이 있는 유명한 배우들을 제외하고는 짧은 자신의 촬영이 끝나면 이 버스에 올라타 하염없이 촬영이 완전히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나 역시 한 신의 촬영이 끝난 후 갈 곳이라고는 이 버스뿐이었다.

어디에 앉아야 하나 좌석을 둘러보던 중.

손을 뻗어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진희성 씨!”

아까 연기 전, 내게 송유나에 대해 이야기했던 그 단역 배우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 앉으세요. 심심한데 잘 됐다. 하하.”

“제 이름은 어떻게….”

“아까 진희성 씨라고 하셨잖아요. 촬영장의 모든 사람들이 집중하고 있을 때, 이름을 들었는데 어떻게 잊겠어요.”

“아….”

그는 내게 엄지를 치켜세우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와! 아까 연기 잘하던데요? 저 연기하는 거 구경했거든요.”

“감사합니다.”

“근데….”

그는 버스 등받이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채 주변을 살피고는 목소리를 한껏 낮춰 말했다.

“송유나 성격 지랄맞긴 하네요.”

“하하, 어쩔 수 없죠. 저번 영화 현장에서 제가 실수한 건 맞으니까요.”

“성격 좋으시네, 희성 씨는.”

“아닙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문득 들려오는 버스 밖의 소리.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리하고 빨리 철수합시다.”

오늘은 생각보다 촬영이 일찍 끝난 모양이다.

“드디어 퇴근하네요.”

“그러게요. 이 정도 시간이면 일찍 끝난 편이네요.”

“희성 씨는 집이 어디 쪽….”

“진희성 씨? 여기 있을까요?”

그때, 버스 앞 계단 쪽에서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버스 계단에 몸을 걸친 채 있는 이는 바로 캐스팅 디렉터였다.

“예, 저 여기 있습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잠깐 와볼래요?”

“넵!”

나는 옆에 앉아 있던 배우에게 눈인사를 보낸 뒤, 서둘러 그가 있는 버스 밖으로 향했다.

“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어, 다름이 아니라, 김 감독님이 희성 씨를 보고 싶어 하시네?”

“저를요?”

그는 내 말에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어쩐지 아까 너무 한 번에 오케이를 한다 싶었는데….

서둘러 내 촬영을 끝내고 다른 배우로 바꿨다는 건가?

이 불안감이 다시 도지고 말았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김 감독.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그에게 향했다.

“감독님, 부르셨습니까?”

“어, 희성 씨라고 했지?”

“네,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벌써 미소를 짓고 있는 건가?

“혹시 내일도 시간 되나?”

예상하지 못한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예?”

“내일 우리 또 스케줄이 하나 있거든. 호위무사 신이 몇 개 더 있는데, 희성 씨가 하면 잘할 것 같아서 말이야.”

김 감독은 짙은 신뢰의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덧붙였다.

“어때, 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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