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1 – 카메라 울렁증 (2)
타닥타닥타닥.
저 멀리 보이는 수많은 말.
그 말 위에 올라타 있는 수두룩한 적군들.
적군들이 빠르게 다가오는 탓에 휘날리는 모래바람으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모두 저하를 지켜라! 저하,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적군들은 우리 병사들과 부딪치기 시작했다.
챙.
챙.
적군과 아군 모두 피를 튀기며 쓰러지기 시작했고, 점차 내가 지키고 있는 저하의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하! 여기를 벗어나셔야 합니다. 어서요!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살기가 어린 눈으로 말하는 나에게 굳은 표정으로 외치는 그.
“너도 나와 함께 가야 한다.”
“그렇지만 저하…!”
그의 옆을 지킬 사람이 필요했다.
이 나라를 지키는 것도, 왕세자를 지키는 것도 모두 다 내 임무이자 몫이었으니까.
목숨을 걸고 싸우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하를 지켜야 한다.
가슴속 깊이 끓어오르는 뜨거운 무언가.
나는 나라를 위해 내 목숨을 내놓았다.
반드시 모든 것을 지켜야만 한다.
주변의 비명 소리와 외침들이 점점 내 귓가에 흐릿해져 갔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 급격히 모든 소리가 뚜렷하게 귓가에 들려왔다.
“아악!”
긴 검을 뽑아 저하 옆까지 다가온 적군의 숨통을 한 번에 끊었다.
연신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어서, 서둘러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때,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팟.
나도 모르게 확 눈이 떠졌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항상 보이던 내 방 천장과 새하얀 벽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뭐지?
꿈인가?
“하악, 하아.”
나는 눈동자만을 연신 깜빡이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습한 느낌.
나는 양 볼에 흐르는 땀을 쓰윽 닦아냈다.
온몸은 땀으로 배어 있고, 그 탓에 내 베개와 이불까지 모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누운 상태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들.
온몸의 작은 세포들까지 긴장하고 있던 그 순간.
등줄기에 뜨겁게 흐르던 땀방울들.
내 얼굴에 튀었던 검붉은 핏방울들.
그리고 내 앞에서 적군이 동료이자, 아군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보며 흐느꼈던 눈물들.
온몸에 소름이 돋아 가라앉지도 못할 정도로 모든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의 장면 하나하나, 그리고 그 기억과 느낌 모두.
꿈에서 보았던 병사의 삶.
그 병사의 10년간의 삶들이 파노라마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꿈에서 보았던 왕세자를 지키던, 그 짧은 순간의 기억만이 아니었다.
무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의 기억.
병사로서의 삶.
그 긴 시간 동안 행복했던 기억, 슬펐던 기억,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그 10년간의 삶 전부가 내 머릿속에 정확히 박혀 있었다.
방금 꾸었던 꿈 역시, 생생하기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뭐지?
꿈인데 이렇게 생생할 수가 있는 건가?
마치 방금 검을 휘두른 것처럼 손에는 그 감각이 남아 있는 느낌.
게다가 꿈에서 꾸지 못한 장면까지 왜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를 수 있는 거지?
이런 꿈은 처음인데….
대체 내가 무슨 꿈을 꾼 거지?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다시 한번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흐르는 한 줄기의 땀방울.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젠장…!
지각이다!
나는 재빨리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는 후드 티와 청바지를 급하게 입었다.
***
삑.
“3,800원입니다. 봉투 필요하세요?”
“네, 주세요.”
나는 편의점 로고가 크게 박혀 있는 봉투를 잡아당겨 물건을 담았다.
“여기 카드요. 감사합니다.”
“예. 안녕히 계세요.”
손님이 나가고 나 홀로 남아 있는 편의점.
확실하게 손님이 아무도 없는지, 나는 고개를 빼꼼 들고 주변을 살폈다.
가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른 적이 있었다.
한창 노래에 심취해 있을 때, 과자 매대 쪽에서 쓰윽 일어난 손님이 어색한 박수를 치며 나온 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항상 꼼꼼히 확인한다.
마주쳤을 때 민망한 건 피차 마찬가지니까.
아무도 없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한 나는 큰 소리로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그러고는 순식간에 눈썹에 힘을 잔뜩 준 채 입을 열었다.
“공주님을 노리는 적군들이… 아아, 아에이오우.”
나는 입을 다시 한번 풀고 웅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공주님을 노리는 적군들이 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대사 역시, 연습을 할 때는 내 몫이다.
“확실한 것이냐.”
1인 2역을 하며,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냈다.
“예. 이곳도 언제까지 안전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서 거처를 옮기셔야 합니다.”
뭐지?
오늘따라 몰입이 조금 더 잘되는 거 같은데?
항상 이 편의점이 내 주된 연습실이었다.
기껏해야 5평짜리의 작은 원룸은 방음이 잘될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한 번은 대사 연습을 하는데, 벽에다 대고 ‘조용히 좀 해, 잠 좀 자자 이 자식아!’라며 소리치는 사람까지 있었다.
벽 하나를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고시원과 다를 바가 없지.
그 뒤로 집에서는 대사를 조용히 읊조릴 뿐, 몰입하여 큰 소리로 대사 연습을 할 수는 없었다.
물론, 내가 대사 연습을 온종일 할 정도로 배역이 많았던 적도 없었지만.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편의점은 내 돈벌이 수단이자, 연습실이 되었다.
그렇다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소홀히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빈 매대를 물건으로 채우며 대사를 연습했고, 음료 진열대에 살짝 비치는 내 얼굴을 보며 표정 연습을 했다.
그리고 청소를 하기 위해 움직이며 동선 연습을 하는 것까지.
내 연습실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나는 손님이 없는 잠깐잠깐 사이에 빠르게 몰입해 연습해야 했다.
그 결과, 빠르게 몰입하는 훈련은 어느 정도 숙련이 됐달까?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몰입이 더 잘되는 느낌이다.
공주와 호위무사.
이 두 역할을 1인 2역으로 해보고 있음에도 남자 역할인 호위무사에 당연히 몰입이 잘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단순히 남자 역할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역에 확 빠져드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런 날은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음료 매대 옆 기둥에 세워둔 밀걸레를 집어 들었다.
“필히…! 그럴 것입니다.”
다음 대사를 외친 후, 들고 있던 밀걸레를 검으로 삼고 허공을 찌르기 시작했다.
들고 있는 것은 파란색 플라스틱 밀걸레였지만, 내 상상 속으로는 아주 커다랗고 무거운 긴 검으로 느껴졌다.
“다시 해보자!”
나는 제자리에서 자세를 고쳐 잡고 빠르게 몰입했다.
“공주님을 노리는 적군들이 늘고 있습니다…. 필히…! 그럴 것입니다!”
짧은 네 줄의 대사.
카메라가 돌면 이상하리만큼 대사를 절기 때문에, 이 짧은 네 줄이 툭 치면 나올 정도로 연습을 하고 또 해야 한다.
어깨를 들었다 내려놓으며 숨을 고르게 내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공주님을 노리는 적군들이….”
몇 차례의 연습을 하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몰입이 깨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연습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 배역에 깊이 빠져들었다.
오늘 정말 뭔가 이상한데?
“필히, 그럴 것입니다.”
나는 플라스틱 밀대를 앞으로 푹 찔렀다.
“어?”
“헉! 죄송합니다!”
“풉, 아니에요.”
젠장.
너무 몰입한 탓에 손님이 들어오는 문의 종소리조차 듣지 못한 채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휘두른 검에, 아니 밀걸레에 놀란 손님은 내 사과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쪽팔려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
끝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
바로 오늘 오디션에 참가하는 사람들이다.
나와 같은 배역의 오디션을 보러온 사람들도 있지만, 다른 배역을 보러온 사람들까지 있기에 줄은 끝이 없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 대기하는 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게냐.”
“살려 주십시오. 목숨만 구제해 주신다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악!”
하나같이 자신이 오디션을 볼 역할의 대사를 연습하며 혼란스러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나는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으며, 내 역할을 연습하기 위해 몰입했다.
“공주님을 노리는 적군들이….”
오늘 역시 편의점에서 연습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대사가 술술 쏟아져 나왔다.
“와, 진짜 잘하세요.”
“네?”
내게 다가와 입을 벌리고 말을 거는 남자.
깔끔하게 완전히 깐 머리 덕에 훤히 보이는 이마.
그리고 그 이마 아래로 보이는 진한 눈썹.
진한 이목구비 탓에 남자의 첫인상이 눈에 들어왔다.
“연기요! 진짜 잘하신다고요. 오늘 오디션 붙으실 것 같은데요?”
“아…. 감사합니다.”
“꼭 같이 붙어서 현장에서 뵀으면 좋겠네요. 하하.”
그는 나를 보며 감탄을 하고,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역시 오늘 오디션을 보러온 모양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이 준비한 배역의 대사를 읊기 시작했으니까.
이 대사 네 줄.
나도 알고 있다.
완벽한 숙지를 떠나, 누구보다 몰입을 잘했고 연기를 잘한다는 걸.
항상 오디션에서는 잘해왔다.
대부분의 오디션에서 합격을 할 만큼.
하지만 내가 아직도 조연도 아닌, 단역에 머무는 이유.
바로 카메라 때문이다.
카메라만 보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새하얘지는 일명 ‘카메라 울렁증’.
배우에게 카메라 울렁증이 말이 되는 건가 싶지만, 바로 내가 그렇다.
주조연급이라면 모를까, 나 같은 단역급 오디션에서는 카메라 없이 주먹구구식 진행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 덕분에 대부분 만족스러운 평가를 받으며 현장으로 나오라는 합격 통보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카메라를 보는 순간, 나는 꼴랑 대사 몇 줄, 아니 한 줄도 완벽하게 해내지를 못했다.
카메라 울렁증을 없애려면 익숙해지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카메라를 보아도 나는 그 카메라가, 그 현장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런다고 별수 있겠는가, 노력하는 수밖에.
“하.”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마시고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대사를 되뇔 때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느낌.
며칠 전, 너무나도 생생하게 꾸었던 그 꿈.
그 모든 장면, 장면이 너무나 생생해서 감정들이 여전히 마음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장면을 그려내며 대사를 한 번 더 읊조렸다.
그리고 확신이 들었다.
오늘 오디션은 평소 보았던 것보다 이상하게 더 잘될 것이라는 확신이 온몸을 감싸는 순간,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래, 이번에는 느낌이 좋아!
“37번! 37번 들어오세요.”
호명하는 목소리에 떠들썩하던 대기실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다들 두리번거리며 37번을 찾는 듯했다.
“네! 갑니다.”
나는 가슴팍에 달아놓은 ‘37’이 적힌 종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손으로 주먹을 꽉 쥔 채 스태프를 따라 오디션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스태프가 문을 열어 안내했고, 나는 차분하게 심호흡을 한 채 안으로 한 발짝 걸어 들어갔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다.
떨리고 설레는 마음을 한편으로 미뤄두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바닥에 표시되어 있는 곳에 발걸음을 멈춰 섰다.
인사를 하기 전, 빠르게 눈동자로 눈앞에 펼쳐진 곳을 살펴보았다.
‘어? 저게 뭐야.’
순간 내 호흡이 멈추고, 몸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한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았다.
빨간불이 돌고 있는 저건, 바로 카메라다!
‘오늘 카메라 테스트는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카메라를 보는 순간 내 심장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다짐하고 들어왔건만, 울렁증이 도지는 것 같았다.
이거…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