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 – 카메라 울렁증 (1)
“허으, 추워.”
칼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얼굴을 벨 듯 훑고 지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대기 버스에서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 같은 무명 배우는 촬영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눈도장을 찍어둬야 하니까.
꽁꽁 언 손을 녹이고는 인상 좋은 얼굴로 스태프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안녕하세요, 조감독님!”
“어, 희성 씨 왔어요? 저기서 기다려요.”
“네, 알겠습니다!”
조감독에게 인사를 마치고 곧장 다른 스태프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진희성입니다!”
친근하게 인사를 하며 옆에 있던 장비를 들었다.
“좀 도와 드릴게요.”
“됐어요. 그거 비싼 거니까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
“아, 네. 죄송합니다.”
물러가라는 손짓에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에도 기죽지 않고 촬영장을 돌며 스태프들에게 인사했다.
30분 가까이 인사를 했지만, 나를 먼저 알아보거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캐스팅 디렉터.
단 한 명뿐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이번 영화에서 내가 맡은 배역은 단역.
그것도 엑스트라에 가까운 역할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눈도장을 찍어두면 나중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잠시라도 더 움직이는 것이다.
26살이라는 나이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소속사도 없는 단역 배우는 어떻게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만큼 필사적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 간절한 심정을 모든 이들이 알아주는 건 아니었다.
“저기요.”
“예?”
“걸리적거리니까 저쪽 가서 쉬고 계세요.”
퉁명한 스태프의 태도에도 나는 미소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촬영장에서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 있는 대형 버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미리 대형 버스에 타고 있는 배우들에게 간단하게 목례를 하며 들어섰다.
물론, 인사를 살갑게 받아주는 이는 없었다.
다들 데면데면한 얼굴은 기본이고, 그나마 눈인사라도 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고마울 따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원래 이런 단역 배우라는 게 마음의 여유가 없는 직업이니까.
특히나 매니저도 없이 혼자 다닌다면 더욱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같은 단역이라도 소속사가 있는 배우들은 이런 버스가 아니라, 개인 차량에서 대기하는데, 그 모습을 보게 되면 알게 모르게 박탈감이 찾아오기도 하니까.
집합 시간은 오후 4시.
사전에 고지한 시간까지는 이제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못해도 한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터.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며 돌아다니는 사이, 경리단길에서 촬영 중인 주연 팀의 녹화가 딜레이 되고 있다는 소식을 주워들었으니까.
그렇기에 대부분의 배우들은 이어폰을 끼고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거나,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가방에서 대본을 꺼내들었다.
대본 숙지는 완벽하게 되어 있지만, 다시 체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부족한 만큼 노력을 더 해야 한다는 게 나의 정론이다.
***
“43신 촬영합니다. 배우분들 대기하세요!”
조감독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잠긴 목소리를 풀었다.
“네. 나가겠습니다!”
서둘러 거울을 보고 머리를 정돈한 뒤, 버스에서 내렸다.
어느새 촬영장엔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시간은 오후 7시.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늦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조감독을 포함한 그 누구로부터 촬영이 딜레이 되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물론, 기대도 하지 않았고.
“진희성 씨, 이쪽으로 오세요.”
“예!”
나는 힘차게 대답하며 빠릿하게 뛰어갔다.
“희성 씨 대사 있는 거 아시죠?”
“완벽하게 외웠습니다.”
네 줄.
고작 네 줄밖에 되지 않는 대사지만, 며칠 동안 밤을 지새우며 연습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수십, 수백 번을 되새겼고 감정 몰입 또한 미친 듯이 준비했다.
이번에는 정말 자신 있었다.
“짧아도 중요한 신이니까 NG 내시면 안 됩니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저쪽에서 준비하고 계세요. 바로 슛 들어갈 겁니다.”
“네, 조감독님.”
이번엔 실수하지 말아야지.
지금까지 기회를 놓친 것만 해도 손가락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다.
오늘만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아니, 송유나는 어디 갔어?”
그때, 스태프들 사이에 앉아 있던 최우람 감독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를 내며 조감독을 쪼아댔다.
“의상만 금방 갈아입고 온다며?”
“예. 지금 밴에 있는데 제가 한번….”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드르르륵.
저 멀리 있던 밴의 문이 열리며 늘씬한 여성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송유나.
이 영화의 주연이자, 현시대 최고의 스타로 꼽히는 여배우.
“죄송해요, 감독님. 화장 고치느라 조금 늦었어요.”
방금까지만 해도 짜증을 내던 감독은 순식간에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우리도 이제 막 준비 끝났어. 바로 갈까?”
“네.”
그녀의 등장으로 분주하게 촬영장의 스태프들이 움직였다.
누가 따로 신호를 주지 않아도, 나는 알아서 내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시골 도로에서 차가 고장 난 송유나에게 다가가 도움을 주는 역할.
“43신 첫 번째 테이크 가겠습니다. 레디, 액션!”
탁!
조연출의 슬레이트 치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도도하던 송유나는 순식간에 대본에 몰입했다.
그녀는 팔을 뻗고 애타게 흔들었다.
“도와주세요!”
나는 자연스레 차를 멈추고 운전석에서 내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세요?”
“제 차가 고장이 나서요. 연기가 나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서… 한번 봐 주실 수 있을까요?”
내가 송유나의 차를 살펴보는 사이, 그녀는 내 차를 훔쳐 달아나는 상황이다.
“네, 물론이죠.”
대답하며 그녀의 차로 걸어가자, 눈부신 조명이 나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사방에 켜져 있는 많은 카메라.
순식간에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이 빌어먹을 놈의 카메라 울렁증이 다시 도졌다.
평소엔 그렇게 몰입이 잘되고 연기도 잘되는데, 카메라만 보면 이렇게 몸이 말썽이다.
머릿속엔 두통이 몰려오고.
가슴이 쿵쿵 빠르게 뛰며 손에선 땀이 삐질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엔진에 이상이 있는 것 같거든요?”
“보, 보닛만 열어주시면 제가 보겠습니다.”
“컷!”
귀신같이 감독이 촬영을 끊었다.
“거기 너!”
아니나 다를까, 그의 호통이 내 귀를 찔렀다.
“왜 갑자기 목소리를 떨어?”
“죄송합니다.”
그는 미간을 팍 구기며 말했다.
“제대로 해.”
“알겠습니다.”
“다시 바로 가 보겠습니다.”
스태프가 슬레이트를 들고 빠르게 달려왔다.
“43신 두 번째 테이크 가겠습니다!”
쿵. 쿵. 쿵.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NG를 내니 긴장감까지 몰려왔다.
정신 차려야 한다.
어떻게 잡은 영화인데.
나는 뺨을 짝짝 때리며 정신 줄을 붙잡았다.
하지만 진정되기는커녕, 이제는 손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안정을 취할 새도 없이 다시금 슬레이트 소리가 들려왔다.
조연출의 신호를 받고 운전석에 내리며 대사를 쳤다.
“무, 무슨 일이신지….”
젠장.
너무 떨려서 말을 더듬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 컷! NG! 뭐 하는 거야?”
감독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죄송합니다! 바로 다시 갈게요!”
그러나 울렁증이 도진 이상, 안정을 취하지도 않았는데 좋아질 리가 없었다.
이후 결과는 볼 것도 없었다.
세 번째 테이크도 NG.
네 번째와 다섯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여배우 송유나는 짜증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 진짜…. 뭐 하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진짜 잘 하겠습니다!”
여섯 번째 테이크에서는 겨우겨우 세 줄까지는 대사를 외쳤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네 번째 대사.
‘뭐 하는 년이야? 너 거기 안 서!’라는 쉬운 한 문장을.
“너 뭐야? 거기 서!”라고 내 마음대로 바꿔 버렸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또 틀렸다.
고작 한 줄인데.
아니나 다를까.
“이런, X발!”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윽박지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역시 나였다.
나는 바로 허리를 90도로 접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너 촬영 망치려고 작정하고 왔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이 자식 누가 캐스팅했어?”
감독은 들고 있던 대본까지 집어 던지며 성을 냈다.
“너 당장 나가.”
“…예?”
“나가라고!”
그가 밖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발성도 못 하는 애를 앉혀놓고 무슨 영화를 찍으라고. 너 당장 안 꺼져?”
나를 믿고 뽑아준 캐스팅 디렉터도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고 있었다.
인사했던 조감독들도 모른 척 감독의 눈치만 보고 있는 상태.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머리를 숙이며 촬영장에서 빠져나왔다.
***
터덜터덜.
늦은 밤, 신림동의 언덕길을 힘없이 걸어 올라갔다.
휘이잉-.
칼바람이 아리게 불어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하아아.”
들숨 날숨마다 찬 바람이 폐를 적셨다.
오른손에 검은색 봉지 하나를 쥔 채 높은 오르막을 지나 원룸 촌에 있는 5평짜리 내 보금자리에 도착했다.
“어우, 추워.”
보일러를 끝까지 돌렸다가 가스비 걱정에 슬쩍 내렸다.
바닥에 앉아 침대에 기대어 조금 전에 사온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오늘은 왠지 술이 없으면 못 버틸 것 같았으니까.
뚜껑을 열어 잔에 따랐다.
한 모금을 마시자, 쓰디쓴 알코올 향이 입 안을 적셨다.
26살.
솔직히 말해서 배우 지망생으로는 늦은 나이다.
그럼에도 늦깎이 데뷔를 한 배우들에 비하면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나이인 것도 사실이다.
얼마든지 빛을 볼 수 있다.
젊다면 충분히 젊은 나이지.
오늘 일을 생각할 때 마음 같아서는 나발을 불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러면 안 되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소주 뚜껑을 닫아 다시금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연기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고작 이런 일로 좌절해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어디 작품이 그거 하나뿐이겠는가?
다음 오디션이 있으니, 그걸 준비해야지.
나는 방 한편에 산더미처럼 쌓아둔 대본을 하나 집어 들었다.
물론, 내게 직접 들어온 건 아니다.
배우 카페에서 공식 오디션을 진행하는 작품의 오디션 파트만 따로 뽑아둔 것이다.
대본을 하나씩 뒤적거리다가 문득 탐나는 배역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조선 시대 사극의 병사 역할.
단역으로 대사는 고작 네 줄밖에 되지 않았지만,
-호위무사: 공주님을 노리는 적군들이 늘고 있습니다.
-공주: 확실한 것이냐.
-호위무사: 예. 이곳도 언제까지 안전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서 거처를 옮기셔야 합니다.
공주: 싫다. 내가 이곳에 남아야 하는 이유를 너도 알지 않느냐. 내가 여기에 남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겠다면, 어찌 되는 것이냐.
-호위무사: 하오나….
-공주: 나는 이곳에 있을 것이다. 떠나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떠나도 좋다.
-호위무사: 제가… 아니, 저희가 공주님을 지키겠습니다. 필히…! 그럴 것입니다. (검을 들고 공주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다.)
공주 옆에 있는 호위무사.
짧은 등장이지만, 한 신만으로도 충분히 메리트가 있기에 도전해 봄직한 배역이었다.
오디션 날짜는 다음 주 수요일.
충분히 여유가 있는 일정이다.
인터넷으로 신청을 해놓은 뒤, 몇 번이고 그 대본을 반복해서 읽다가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날.
나는 특별한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