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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1054화 (1,054/1,055)

0살부터 슈퍼스타 1054화

단어와 문장과 단락을 읽어 내려가던 서준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한 번 더 페이지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 읽어보았다.

하지만 새로운 종이에 새롭게 적힌 [첫 생의 책]은 그 어떤 오류도, 구멍도 없었다. 단어는 온전히 그 뜻을 나타냈으며 문장도 마침표까지 찍혀 있었으며 단락도 누락된 단어나 문장 없이 깨끗했다.

막 서점에서 산 깨끗한 새 책처럼, 새롭게 만들어진 [첫 생의 책]은 오해하거나 잘못 읽을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러니 서준이 읽은 것도 사실이란 이야기였다.

첫 생은 평생 다리를 절었다.

그 믿기지 않는,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에 서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래서…….”

서준은 첫 생이 계속 무명배우였던 이유가 시기가 맞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또는 좋은 작품,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운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준서가 연기를 잘했으니까.

분명 첫 생 또한 한준서와 똑같이 연기를 잘했을 터였다.

그래서 서준은 무명배우였던 것은 그 외의 요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연예계는 아쉽게도 연기만 잘한다고 해서, 재능이 있다고 해서 모두 이름을 알릴 수 있지는 않으니까.’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연기력이긴 하지만, 그것은 대중들에게 보여질 때야 비로소 쓸모가 있었다.

자신의 연기력을 전부 보여줄 좋은 작품에 출연하고, 그 좋은 작품이 대중들의 입맛에 딱 맞는 시기와 때를 만나야 했다.

좋은 작품에 출연하지 못해, 그 작품이 시기와 때가 맞지 않아, 훌륭한 연기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무명인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서준은 첫 생 또한 그런 무명배우들과 같은 경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재의 ‘한준서’가 이름을 알리고 스타가 된 것이 서준이 출연한 [내의원]을 보고 첫 생보다 일찍, 또는 늦게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덕분에 시기와 때를 잘 맞췄다고 추측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구덩이에 빠진 한준서를 자신이 구해준 덕분이었다.

때마침 오계리에 촬영을 하러 왔던 서준이 산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별생각 없이 구해준 소년이 첫 생, 한준서였을 줄이야.

그리고 그 덕분에 한준서가 다리를 절지 않게 되어 꿈꾸던 배우가, 주인공이 될 줄이야.

불현듯, 이사실 입구에서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던 한준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반가워하셨구나.”

그때 한준서를 구해준 게 서준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랬던 거였다.

‘이서준’이 있고 없음에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니.

이거야말로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나 싶었다.

‘한준서’의 생이 왜 이렇게 달려졌는지 알게 된 서준은 다시 [첫 생의 책]의 페이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침음성을 흘렸다.

첫 생이 이런 신체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낡고 오래된 [첫 생의 책]에 이것에 대한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마치 잊어버리고 싶었던 듯, 지우고 싶었던 듯 페이지가 찢어지고 문장이 지워져 있는 바람에 서준은 읽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신체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배우가 되어 이름을 알리는 것은 보통 사람이 배우가 되어 이름을 알리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서준이 당장 떠올리는 배우들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종이를 내려다보던 서준은 고개를 들어 두 번째 집필대에서 새롭게 쓰여지고 있는 [첫 생의 책]을, 그리고 그 위를 날아다니는 종이 소용돌이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죽을 때까지 연기를 사랑했고 죽어서도 연기를 하고 싶어 했던 첫 생이 어째서 무명배우로만 남을 수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첫 생이 앞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도 조금이나마 짐작이 되었다.

하아…….

마음이 무거워진 서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밍!”

“아, 그래. 고마워.”

미밍이 내민 새로운 페이지에 서준이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받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고 행동한 첫 생의 삶이 궁금했다.

【P.68】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온 한준서는 주영 고등학교 운동장 옆 스탠드에 앉았다.

손에는 곧 다가올 여름방학에 해야 할 숙제가 적힌 유인물이 있었다. 다른 것들은 다 무난한데, 하나는 조금 마음에 걸렸다.

[연극/뮤지컬 관람]

[※어린이 연극/뮤지컬 제외]

‘사람들이 많은 곳은 싫은데.’

한준서는 제 오른쪽 다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겉만 보면 멀쩡해 보이지만 걷거나 움직이면 바로 다르다는 것이 티가 났다.

그래도 사고로부터 3년이나 지난 지금은 움직이는 것이 익숙해졌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영 익숙해지질 않았다. 앞으로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또 한숨이 나올 것 같았던 한준서는 애써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관람비를 지원해 줘서 다행이야.’

아빠와 엄마가 떠나고, 한준서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한준서에게 돈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한 푼도 함부로 쓰고 싶지 않았다.

유인물을 보던 한준서가 고개를 들었다.

점심시간이라서 그런지 운동장에는 축구를 하는 학생들이 보였고, 매점을 향해 달려가거나 수업시간 내내 앉아 있어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산책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한준서는 그걸 조용히 구경했다.

“야! 김수한!”

친구를 부르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한준서는 저도 모르게 그쪽을 바라보았다.

김수한이라고 불린 학생과 친구로 보이는 세 명이 낄낄 웃으며 한준서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름방학 숙제 봤어? 어린이 연극 제외라고 적힌 거 우리 때문인 것 같지?”

“백퍼 우리 때문일걸. 쌤한테도 엄청 혼났잖아.”

“맞아. 작년에 엄청 혼났지…….”

뭐? 어린이 연극을 봤다고?!

하고 펄쩍펄쩍 뛰던 작년 담임선생님을 떠올린 세 친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김수한이라고 불린 학생이 투덜거렸다.

“너희도 남은 돈으로 피시방 가서 좋았다며. 근데 어린이 연극치고는 괜찮지 않았어?”

“괜찮긴. 딱 아역배우들 연기 같았는데. 제목이 여름이었던가?”

“봄이야. 봄. 제목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게 연기는 기억나?”

“뭐, 기억에 안 남으니까 별로였던 게 아닐까?”

네 사람은 각자 손에 주스를 들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준서는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 너흰 진로계획서에 뭐라고 썼어?”

“난 공무원이라고 적었어.”

김수한의 말에 다들 낄낄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무원 안정적이지.”

“이게 현실을 깨달은 K고등학생이지.”

“근데 요새는 공무원도 되기 어렵지 않나?”

쭙- 하고 빨대로 주스를 빨아들인 김수한이 대답했다.

“그럼 회사원.”

“나도 그렇게 적어야겠다.”

“쌤이 넌 꿈도 희망도 없구나, 하고 말하실 것 같다.”

담임선생님을 흉내 낸 친구에 김수한과 두 친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친구 중 한 명이 말했다.

“근데 수한이 너 드라마, 영화 같은 거 좋아하니까 감독이나 작가도 괜찮지 않아?”

“오, 감독. 하긴 나 정도면 데뷔하자마자 영화제에서 대상 받고 바로 칸 영화제 가지. 어때, 투자하실?”

장난기 가득한 김수한의 말에 친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천 원이면 되냐?”

“김수한이 감독이면 영화 촬영도 못 하고 말아먹을 듯.”

“나 주연배우로 캐스팅해 줘라.”

“네가 주인공으로 나오면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김수한도 친구들도 낄낄 웃었다.

감독이라니.

그들처럼 평범하디평범한 학생들이 꿀 꿈은 아니었다.

그렇게 웃던 중 김수한이 발을 삐끗했다.

“억!”

하고 얼른 몸의 균형을 바로 잡는데, 거기에 한준서가 앉아 있었다. 한준서와 부딪힌 김수한이 얼른 몸을 바로 세웠다.

“어어! 미안! 미안! 어디 다친 곳 없어?”

“주스 안 쏟음?”

팩주스라서 쏟아질 리는 없겠지만, 착한 김수한과 세 친구는 얼른 한준서의 상태를 살폈다. 앞머리가 긴 데다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인지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하얀색 명찰을 보니 1학년인 것 같은데.

“……괜, 괜찮……아…….”

갑작스러운 부딪힘에 놀란 한준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야로 ‘김수한’이라고 적힌 노란색 명찰이 보였다.

노란색 명찰은 2학년.

그리고 자신은 1학년.

“……요…….”

동갑이지만 눈앞의 2학년들이 1년 유급한 한준서의 사정을 알 리 없으니, 한준서는 말을 높였다.

“다행이네.”

“진짜 미안해.”

“어디 아프면 바로 양호실 가.”

1학년 후배에게 진심으로 사과한 2학년들이 걸음을 옮겼다.

“김수한 사고 칠 줄 알았다.”

“걸을 때는 앞을 보고 걸어야지.”

“내가 그럴 줄 알았겠냐고…….”

한준서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걸어가는 네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같이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하고 같이 방학을 보내고 같이 진로를 생각하고.

누군가 실수해도 타박하면서도 같이 사과해 주고.

그건 한준서가 바라던 친구 그 자체였다.

1년의 유급은 중학생이었던 한준서를 괴롭힘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지만, 한 살 차이가 큰 차이인 중학생들에게는 쉽게 다가갈 수 없게 했다.

사고로 1년 꿇은 한 살 형이라니.

중학생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엔 딱 좋은 상황이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그전에도 또래와 어울리지 못했던 한준서는 회복이 끝나고 다시 중2가 되어서도, 중3이 되고 졸업하고 고1이 되어서도 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한쪽 다리가 멀쩡하지 않은 것도 아이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이리라.

걸어가는 김수한과 친구들이 보였다.

뭐가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는지 웃음이 가득했다.

‘어쩌면…….’

사고가 없었다면, 1년 유급을 하지 않았다면 저들과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같이 방학 때 뭐 할까 의논하고, 미래의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질지 이야기하고, 수능을 칠 때까지도, 대학생이 되어서도, 어른이 되어서도 함께 웃고 떠들며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시야가 흐릿해졌다.

한준서는 언제나처럼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김수한과 친구들의 반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균형이 맞지 않은 다리가 절뚝거렸지만 익숙했다.

그러나, 수백 번 수천 번을 삼킨 눈물을 다시 또 한 번 참는 건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어린이 연극 [봄] 이야기에 반가워하고(현실처럼 화제가 되지 못한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겠다는 김수한의 말에 ‘형은 감독이 천직이에요!’(영화제에서 대상도 받고 조감독으로 칸에도 갔는데!) 하고 안타까워하던 것도 잠시.

이어지는 이야기에 입만 벙긋거리던 서준이 겨우겨우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니…… 수한이 형이랑 한준서 배우가 친구가 아니라고?”

‘지금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친한 친구인 한준서와 김수한, 세 친구가 ‘첫 생의 세계’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이라니.

현실에서 한준서를 소개해 준 게 김수한인데!

[한준서의 책]에서도 계속 함께 나왔던 김수한인데!

앞서 읽었던 페이지에 나왔던 ‘회복으로 인한 1년 유급’이 이런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김수한이 없다면 다른 친구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홀로 눈물을 참아내는 한준서의 모습을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아니야.’

그건 모르는 일이다.

나중에 한준서와 함께해 줄 누군가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생겼겠지?’

서준은 예전에 읽었던 낡고 오래된 [첫 생의 책]의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첫 생’과 계속 함께 언급되었던 사람이 분명히…….

“……없었던 것 같은데.”

끄응.

서준은 제발 찢겨 사라진 페이지에 한준서와 함께한 좋은 인연들이 있기를 바라면서, 미밍이 건네준 다음 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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